2006년 2월호

황우석 파문, 그들은 알고 있었다

  • 김현미 동아일보 출판팀 차장 khmzip@donga.com

    입력2006-02-16 1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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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우석 파문, 그들은 알고 있었다

    과학을 성찰이 아닌 열광으로 맞이할 때 겪게 되는 파국을 경고한 책.

    얼마 전 방영된 미국의 TV 드라마 ‘대지진 10.5’는, 미국 서부 해안 지역에 강력한 지진이 발생해 육지의 일부가 바닷속에 잠기고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대재앙의 상황을 현실감 있게 묘사했다. 10.5는 지진의 규모를 가리키는 것으로, 지난해 8만여 명의 사망자를 낸 파키스탄 대지진이 리히터 규모 7.6 수준이었음을 감안하면 10.5라는 설정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다.

    드라마에서 지진은 미국 시애틀에서 시작돼 북부 캘리포니아로 확산된다. 지진학자 사만사는 머지않아 샌프란시스코에 더 큰 지진이 발생할 거라고 경고하지만, 연방재난관리청장 로이는 시민이 불필요한 혼란에 빠진다며 이를 일축해버린다.

    재난 드라마의 전형적인 전개방식이 그러하듯, 사만사의 경고대로 샌프란시스코의 상징 금문교가 지진에 맥없이 무너지고 수많은 인명피해를 낸 다음에야 연방재난관리청장은 사만사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사만사는 미국 서부 해안 지역 전체가 바닷속에 잠기는 것을 막기 위해 지하에서 핵폭탄을 터뜨려 단층을 녹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다음 이야기는 예상하는 대로다. 초를 다투는 긴박한 상황에서 재난관리청장의 살신성인으로 핵폭탄이 제시간에 폭발해 단층을 녹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현실감은 지진의 위력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6개의 핵폭탄은 지진의 강도를 약화시킬 수는 있어도 지진 자체를 막아주는 ‘신의 손’은 아니었다. 결국 10.5의 대지진은 미국 서부 해안의 지도를 바꿔놓는다.



    재난 드라마는 항상 도입부에서 수많은 위기의 징후를 보여준다. 누가 봐도 빨리 짐 싸들고 도망쳐야 하는 상황인데 사람들은 태연하게 일상을 반복한다. 그중 한두 선각자가 경고해도, ‘미친 놈’ 취급을 할 뿐이고, 설령 그들의 말에 귀기울였다고 해도 “설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린다. 그래야 영화가 된다지만 이것이 현실이라면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하긴 2004년 지진해일이 동남아를 덮칠 때도 많은 사람이 해안에서 산만한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도 도망갈 생각을 하기는커녕 “어, 저 파도 좀 봐” 하며 구경하고 있다가 휩쓸려 가버렸다.

    인간의 위기감지 능력은 이처럼 믿을 만한 게 못 된다.

    지난해 연말부터 지금까지 전 국민을 공황 상태에 빠뜨린 ‘황우석 파문’을 보더라도 우리는 수많은 징후를 지나쳐버렸다. 줄기세포 진위 논쟁이 불거졌을 때 ‘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을 필요로 한다’(이충웅 지음, 이제이북스 펴냄)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맞아, 그 책에서 다 얘기했어’ 하며 뒤늦게 서가에서 먼지가 수북이 쌓인 그 책을 뽑아들었다. 과학사회학을 전공한 저자는 2005년 여름 펴낸 이 책에서 그해 겨울에 우리가 맞을 재앙을 예고했다. 저자가 쓴 ‘맺는 글’의 한 대목을 보자.

    과학이 아닌 영웅담

    “황우석 신드롬은 과학이 ‘실험실 밖’과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말해주는 좋은 예다. 그 신드롬은, ‘과학’이 아닌 ‘영웅담’과 관계한다. ‘복제 배아’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승리한 한국인’에 대한 열광이다. 월드컵에서의 응원과 많이도 닮아 있다.

    …열광은 열망에 기인한다. 온갖 열망들이 거기에 뒤섞여 있다. 열광은 겉으로는 ‘확신’에 기초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열망은 말 그대로 ‘바람’이다. 그 열광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부담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꿈꾸는 상태’ 자체가 만족스러울 수 있는 까닭이다. 그것은 현실을 견디기 위한 진통제다. 그러나 모두가 똑같은 꿈을 꾸고 있지는 않다. 진통제가 과하면 독이 된다는 것도 분명하다.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윤리적 문제뿐만 아니라, 기술적 문제를 좀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치료용’이라는 표현에 주의해야 한다. 배아줄기세포를 이용한 효과적인 치료가 얼마나 가능할지에 대해서도 아직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성체줄기세포나 다른 ‘대안’과의 관계도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엄청난 치료효과를 전제로 한 그 반대편의 ‘윤리적 문제’라는 식의 대결구도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다.”

    저자는 책에서 할말을 다 했다. 광우병으로 온 세계가 떠들썩할 때 ‘광우병 안 걸리는 소’를 만들겠다고 한 황 교수의 발언을 대서특필하면서도 그 소가 광우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할 방법이 없다는 것에는 이상하리만큼 침묵한 언론의 불균형한 시각, 또한 유전자 조작 콩은 불안해서 못 먹겠다는 국민이 ‘광우병에 안 걸리는 소’는 낙관하고 믿어주는 아이러니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짚었다. 다만 이것을 읽어내는 눈 밝은 독자가 적었을 뿐이다.

    수상한 과학, 섹시한 과학자

    지난해 여름 이 책을 낸 이제이북스 출판사 사장에게 “필요한 책이지만 팔리지는 않을 책”이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난다. 필자의 말대로 언론에서 제법 띄워주려고 노력했음에도 책 판매는 신통치 않았다. 출판사 사장은 “왜 이리 반응이 없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했지만 정말 몰라서 물었을까.

    사람들은 경고를 인정하기보다 외면하는 쪽을 택한다. 허망한 기대일망정 열광할 때가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런 열광은 모든 불안감을 덮어버리는 진통제이며 만약 여기에 찬물을 끼얹는 자가 있다면 ‘공공의 적’이 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MBC ‘PD수첩’ 팀이 바로 그런 진통을 겪었다. 그러니 ‘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을 필요로 한다’ 같은 책을 읽으며 양날의 칼인 생명공학을 좀더 차분하게 지켜보는 것보다 ‘세상을 바꾸는 과학자 황우석’에 열광하는 쪽이 훨씬 쉬운 선택이었던 것이다.

    ‘황우석 파동’이 있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은 우리 과학계와 과학담당 기자들 대부분이 이미 오래 전부터 파국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 강도가 이렇게 엄청날 줄은 몰랐겠지만. 그래서 그들이 보낸 신호가 일반 대중에게 전달되기에는 너무 약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들에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이럴 줄 알았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꼭 2년 전인 2004년 1월, 강릉대 전방욱 교수는 생명공학의 이익이나 위험성 모두 불명확하다는 의미가 담긴 ‘수상한 과학’(풀빛 펴냄)이라는 책을 펴냈다. 눈에 띄는 것은 이 책의 8장 ‘섹시한 과학자’가 바로 황우석 교수를 지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1999년 2월 국내 최초로 복제소 ‘영롱이’를 탄생시키면서 단숨에 스타 과학자가 된 황우석 교수는 그해 여름 백두산 호랑이 복제 계획을 발표해 다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봄까지 대리모에 호랑이 수정란을 착상시켰다는 발표가 나왔지만, 여름부터 슬그머니 호랑이 뉴스가 사라졌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차리고 이상하게 여긴 사람은 많지 않았다.

    2003년 12월 언론은, 수술복을 입고 나와 세계 최초로 광우병 내성을 가진 소와 형질전환 미니 돼지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황우석 교수와 그 현장을 방문한 대통령 내외 관련 기사를 일제히 내보냈다. 그 후 황 교수 연구에 딴죽을 거는 용감한 사람은 더는 나오지 않게 됐다.

    비판적 사고의 결핍

    전 교수는 이 책에서 연구자가 연구 결과를 얻기도 전에 연구에 착수했다는 사실, 혹은 연구가 진행 중이라는 것을 언론에 흘리고 언론은 앞다퉈 그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기에 급급한 행태가 얼마나 큰 위험을 내포하는지 경고했다. 즉 기자회견이나 보도자료를 통해 연구결과를 알릴 때 선점권 및 연구비 확보 등의 장점을 가질 수 있는 반면, 다른 과학자의 재확인 없는 발표는 과학의 완결성을 훼손하고 일방적인 정보만을 제공하는 등의 단점이 있다는 사실을 적시했다.

    또한 생명윤리에 관한 한 자신들에게 맡겨달라는 생명과학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우려를 금치 않았다. “일부 과학자들이 일반 대중에 비해 윤리의식이 희박하다는 사실은 장기적으로 과학자들의 의견이 일반 대중의 신뢰를 상실하거나, 정책 결정에서 배제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전 교수의 경고가 오늘날 현실이 되고 있지 않은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심정으로 ‘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을 필요로 한다’와 ‘수상한 과학’을 다시 읽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우리가 놓쳤던 경고들이 이제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내친김에 세계적인 천체물리학자 칼 세이건의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김영사)도 재독할 참이다. 칼 세이건은 ‘무지함의 죄’에 대해 에드문드 웨이 틸리의 말을 인용했다.

    “어떤 것이 좋아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신경 쓰지 않는 것은, 돈을 벌 수만 있다면 어떻게 벌든 그 방법은 괘념치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나쁘다.”

    과학적 무지와 비판적 사고의 결핍은 현대인에게 용서받지 못할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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