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호

‘갈릴레오의 진실’

기회주의자인가, 영웅인가

  • 구자현 영산대 교수·과학사 jhku@ysu.ac.kr

    입력2006-04-11 14: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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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레오의 진실’

    ‘갈릴레오의 진실’ 윌리엄 쉬어·마리아노 아르티가스 지음/고중숙 옮김/376쪽/1만4000원

    1992년 10월31일은 과학사를 전공하는 내게 특별한 날이다. 이 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360년 전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정죄(定罪)된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복권시켰기 때문. 교회가 과학적 사실을 주장한 과학자를 무고하게 이단으로 몬 것을 시인하고 사과했다는 것은 과학과 종교의 역사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내게 현대사회에서 과학과 종교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깊이 있게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갈릴레오는 아인슈타인이나 뉴턴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과학적 공적에서 탁월성을 인정받는다. 그는 근대과학의 창시자로 존경받을 뿐만 아니라 종교 권력에 대항해 과학적 진리를 옹호한 자유사상가로 명성을 얻었다. 과학적 진리를 주장하다가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을 남겼다는 이야기는 허구임에도 지금껏 그의 명성을 뒷받침해왔다. 이러한 장면에서 교회는 진리를 억압하는 무지한 권력이며 과학자는 진리를 대변하는 외로운 투사다.

    갈릴레오 재판에 대한 이러한 전통적인 시각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지만 이번에 번역 출간된 ‘갈릴레오의 진실’은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하고 있어 반갑다. 책의 저자는 과학사학자 윌리엄 쉬어와 가톨릭 신학자 마리아노 아르티가스다. 두 사람은 여러 문서고를 뒤져 찾아낸 자료들을 바탕으로 갈릴레오의 일생을 여섯 차례의 로마 여행을 중심으로 재구성했다. 저자들은 갈릴레오가 종교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게 된 정황을 자세히 추적해 이 사건이 과학 대 종교의 싸움이 아닌 정치적, 사회적, 개인적 요소들이 결합된 복잡한 사건이었음을 보여준다.

    여섯 번의 로마 여행

    갈릴레오의 첫 번째 로마 방문은 1587년 23세의 나이에 이뤄졌다. 이때 갈릴레오는 대학에 자리를 얻는 데 필요한 추천서를 받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고, 당시 유명하던 예수회 신부 클라비우스와 카에타니 추기경을 만나 자신의 논문을 보여줬다. 그 성과로 이듬해 피사 대학의 수학 교수가 될 수 있었다. 1592년부터 1610년까지는 파도바 대학에 재직했고 이후에는 자신의 고향인 피렌체에서 토스카나 대공의 전속 수학자 겸 철학자로 임명돼 더 안정적으로 과학 연구를 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로마 방문은 1611년에 이뤄졌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이용해 달 표면의 굴곡들과 목성의 위성을 발견했는데, 이것들에 대해 학계의 인정을 얻어내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방문도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는 린체이 아카데미를 비롯한 지식인들로부터 망원경과 여러 발견의 성과를 인정받았다. 이러한 발견들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관과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세 번째 로마 방문은 ‘카스텔리에게 보내는 편지’로 인한 것이었다. 갈릴레오는 이 논문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따를 때 성경에 언급된 현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신학적으로 접근해 코페르니쿠스를 옹호하려 했던 것인데 오히려 논란에 휩싸이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1615년에서 1616년에 걸쳐 로마를 방문해야 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그는 벨라르미노 추기경으로부터 코페르니쿠스를 옹호하지도 견지하지도 말라는 경고를 받고, 이를 수락했다. 이때 작성된 문서는 나중에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네 번째 로마 방문은 1624년, 교황 우르바노 8세를 알현하고 태양중심설을 옹호하는 저술을 집필할 수 있을지를 타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갈릴레오는 교황을 6차례 만난 뒤 우호적인 분위기를 감지하고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를 집필하기로 결심했다.

    다섯 번째 로마 방문은 1630년 ‘대화’의 원고를 검열받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교묘한 포장과 지원 세력에 힘입어 검열을 무사히 통과할 것이란 전망을 얻고 귀향했다. 몇 달 후 후원자인 체시 공(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마침내 1632년에 피렌체에서 ‘대화’가 출간됐다.

    말썽 많은 천재의 성공과 몰락

    그러나 책은 곧 구설에 올랐고 조사위원회가 조직됐다. 조사위원회는 출판물을 검열하는 검사성성(檢邪聖省·Holy Office)으로 사건을 이관했고, 검사성성은 종교재판을 위해 갈릴레오를 로마로 소환했다. 고령과 건강을 핑계 삼아 출두를 미루던 갈릴레오는 교황청의 불호령에 어쩔 수 없이 1633년에 여섯 번째로 로마를 방문했다.

    몇 개월간 계속된 재판은 유죄 판결로 결론이 났다. 갈릴레오는 ‘대화’를 통해 1616년에 금지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옹호했다고 인정하고, 자신의 견해를 철회한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정상이 참작되어 투옥은 면할 수 있었지만 가택연금조치는 1642년 갈릴레오가 사망하기까지 풀리지 않았다.

    이 책은 탄탄한 사실적 토대 위에서 갈릴레오와 교회의 관계 변천을 조명했다. 두 저자가 과학계와 종교계를 각각 대변한다는 점에서 관점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그러나 이 책은 왜 갈릴레오가 재판을 받았으며, 왜 유죄 판결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가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것은 이 책이 정치적 문제에 주된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갈릴레오 재판과 관련된 철학적, 종교적, 과학적 논의의 핵심은 심도 있게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논의들은 이미 다른 연구자들의 저서를 통해서 깊이 있게 다뤄졌으므로 이 책이 그러한 논의들을 포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저자들의 의도도, 원제 ‘Galileo in Rome: The Rise and Fall of a Troublesome Genius’, 직역하면 ‘로마의 갈릴레오: 말썽 많은 천재의 출세와 몰락’에서 드러나듯이 6차례의 로마 방문을 통해 갈릴레오의 출세와 몰락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살펴보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의 논점은 6차례의 로마 방문이 갈릴레오에게 성공적이었는가 아니었는가에 있다.

    저자들은 1차 성공, 2차 성공, 3차 실패, 4차 성공, 5차 성공, 6차 실패로 규정한다. 이러한 규정은 그것에 동의 여부를 떠나서 과학자 갈릴레오의 경력 전체를 읽어내는 데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진리의 옹호자로서의 갈릴레오의 이미지보다는 명성과 지위를 확보하려는 야심, 대인 관계를 활용하는 정치적 수완, 위기를 모호한 말로 대처해 나가는 간교함까지 인간 갈릴레오의 면모를 더욱 부각시킨다.

    또한 그가 정죄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갈릴레오 자신의 적절치 못한 대응에서 찾는다. 이런 점은 “갈릴레오가 교회의 지시사항을 기꺼이 그대로 따르려고만 했어도 모든 일은 무난히 진행됐을 것”이라는 출판 검열관 리카르디의 말이나 “굳이 그렇게 할 이유가 없는 일을 함으로써 스스로 곤경에 빠져들었다”라는 교황 우르바노 8세의 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갈릴레오는 확실히 ‘말썽 많은’ 천재였다.

    과학과 종교의 상생

    이러한 갈릴레오의 인간성은 재판에 임하자마자 자신이 쓴 책이 의도한 바가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대한 옹호가 아니라 비판이었음을 주장하고, 스스로 코페르니쿠스 이론의 부당성을 논증하는 내용을 첨가하겠다고 말하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이런 장면에서 진리의 옹호자로서 의연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위기를 모면하려는 간교함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러한 개인적, 인격적 결함이 갈릴레오의 학문적 성취를 훼손하지는 않는다. 특히 갈릴레오가 추구한, 과학과 종교가 상생하는 길은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현대 세계를 움직이는 두 가지 주된 힘이라 할 만한 과학과 종교가 충돌하면서 갈릴레오가 직면한 것과 유사한 장면들이 오늘도 재연되고 있다. 지난날에는 천문학적 문제가 첨예한 대립점이었다면 지금은 생물학적 문제가 첨예한 대립점이다.

    갈릴레오는 성경이 인간을 하늘로 이끌기 위한 것이지 하늘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로 기독교인이 성경에서 과학과 위배되는 사실을 발견할 때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설파하였다. 지금도 기독교인들에게 ‘진화론’을 믿을 것인가 ‘창조론’을 믿을 것인가는 민감한 문제이고 많은 젊은이로 하여금 생물학을 공부할 것인가 구원을 택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게 하고 있다.

    우리는 갈릴레오가 성경에서 천동설을 지지하는 구절들을 발견하면서도 지동설을 과학적 진실로 주장할 때 취한 태도를 본받음으로써 문제의 해결을 모색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현대는 비난과 논란을 감수하면서 십자가를 짊어질 또 다른 갈릴레오를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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