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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장편소설

둔주곡(遁走曲) 80년대

제1부 / 제국에 비끼는 노을 (3화) 지방신문사

  • 이문열

둔주곡(遁走曲) 80년대

둔주곡(遁走曲)  80년대

[일러스트 박용인]



1.
휴가철이 절정이어서인지 거리는 좀 한가했다. 출근시간 도심 버스정류소에서 내려도 거리 이쪽저쪽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여느 때 같으면 그쯤에서 ‘공장’ 사람을 한두 명 만나 인사말을 건넸을 만큼 신문사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도, 사람의 왕래는 말할 것도 없고 자동차의 교행조차 드문드문했다.

시계를 보니 출근 시간 정각에 가까웠다. 신문사가 그렇게 깐깐하게 출퇴근 시간을 따지는 곳은 아니었으나, 그는 습관적으로 걸음을 빨리해 길을 건너고 가로수 그늘을 헤치듯 중앙통을 지나 정각을 넘기지 않고 현관문을 밀 수 있었다.

“아이고, 이형은 휴가도 없는가배. 8월 초순인데 아직 휴가를 떠나지 못하믄 이번 여름 피서는 언제 하노?”

일제 때 건물이라 충분하게 채광창을 내지 못한 수위실에서 불쑥 누가 나와 길을 가로막듯 그렇게 물었다. 그가 움찔하며 보니 ‘최소한 차장’이었다.

벌써 아득하게 느껴지는 3년 전 수습기자 첫날, 동기 다섯이 각기 사수(선배기자)를 따라 출입처를 돌고 2층 편집국으로 돌아온 뒤의 일이었다. 아직 책상도 배정받지 못한 편집국 구석 벤치에 굳어 앉아 있던 그들이 잠시 아래층 현관 쪽 층계참에 나와 담배를 피우며 잡담하고 있는데 누가 현관문 쪽에서 올라와 점잖게 그들을 꾸짖고 갔다. 편집국으로 들어가는 층계참은 신입기자들이 담배를 물고 ‘우왕좌왕하거나’ ‘끼리끼리 모여’ ‘킬킬거리는’ 곳이 아니라는 제법 준엄한 훈시였다.

넥타이까지 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래위가 맞는 정장에 만만찮은 관록이 엿보이는 중년이라 그들 다섯은 누군지도 모르고, 반성문이라도 쓰라면 쓸 듯 사죄하고 함부로 버린 꽁초까지 주워 그 자리를 떠났다. 편집국으로 쫓겨 들어온 뒤에야 그중 하나가 훈시한 사람의 신분에 의문을 품었으나, 그 사이 눈치 빠른 것으로 정평이 난 다른 동기 하나가 자신 있게 말했다.

“우리 신문사 선밸 거야. 최소한 차장.”

그런데 오래잖아 신문사에서 그의 직책은 수위고, 끗발 좋은 정보부대의 하사관으로 오래 근무하다가 무슨 일로 옷을 벗게 된 사람이라는 것까지 알려졌다. 하지만 그날 수습을 나갔던 다섯뿐만 아니라, 편집국 안에 남아서 일을 배운 동기들에게까지도 그는 오래도록 ‘최소한 차장’으로만 기억되었다.

“아, 예. 그동안 서울 좀 들락거리느라, 휴가 마이가리를 많이 해서요.”

평소 일본말을 많이 섞어 쓰는 ‘최소한 차장’의 말버릇을 따라 그가 그렇게 받았다.

“내 보이 우리 공장 대빵이나 오야지 급은 도로시(도리어) 이형이 그렇게 펄럭거리고 서울이다, 중앙이다, 불래(불려) 댕기는 걸 좋아하는 눈치던데. 말이사 바른 말이지, 이형이 여기 모두 낯 내주는 기 얼마라꼬. 내 이래도 한때 ‘사상계’ 검열했던 사람이라요. 요새도 여기저기 이형 글 나오는 거 내 다 읽어보고 있구마. 무단히 청광(淸狂) 부리지 말고 늦디라도 휴가는 단디 찾아 먹으소.”

곧 죽어도 이형이고, ‘해라’ 같은 ‘하소’였으나 그는 별로 고까운 느낌이 들지 않았다. 위로 띠 동갑이 되는 걸 내세우는 그의 나이보다도, 특무부대에서의 끗발 좋던 왕년이 이제는 영락이라고 해도 좋을 그의 삶에 길게 드리우고 있는 어떤 스산한 그림자 때문이었다.

신문사 건물은 일제 때는 소방서로 썼던 건물인데, 해방 후 잠시 택시회사로 쓰였다가 동란 뒤 한국 가톨릭교회가 그 신문사 대주주가 되면서 인수해 그때까지 사옥으로 써오고 있었다. 일제 때 관공서 건물이 대개 그렇듯이 서양 근대 건축양식을 이것저것 절충한 형태였지만, 정성 들여 짓고 공들여 마감해 밖에서 보면 웅장하지는 않아도 제대로 지은 석조건물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내부도 마찬가지, 붉은 벽돌에 두껍게 몰타르를 입혀 회칠한 것이라도 강도 높인 시멘트에 꼼꼼한 미장이 잘 어우러져, 제대로 다듬어 짜 맞춘 석조건물 안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거기다가 값싼 대리석이나 흔한 화강암, 쑥돌 따위를 잘 다듬어 정교하게 맞춰 넣고 군데군데 놋쇠 테로 이음매를 하여 윤기 나게 갈아둔 바닥은 서양 무도장을 연상시킬 만큼 호화스럽게까지 느껴졌다.

2층인데도 밖에서 보면 이웃의 조잡한 현대식 건물 3층 높이와 맞먹는 층고(層高) 또한 인상적이었다. 든든한 목제 난간이 휘어져 있는 층계 가운데 제법 널찍한 층계참을 두어 식민지 관공서의 위용을 더함과 아울러 보는 이의 눈을 시원하게 했다. 그 무렵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 양식과 자재에다 그 시절 일본인 특유의 정성과 자부심이 스며 있어서인지 지은 지 50년 넘은 낡은 건물이라는 느낌은 별로 없었다.

그날따라 층계참에 머물러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1층 현관 로비 쪽을 내려다보다가 퍼뜩 늦었다는 생각이 들어 종종걸음 치듯 편집국에 올라가니 편집부 쪽은 부장 포함 아홉 자리가 다 차 있었다. 휴가가 둘 있을 텐데, 하며 자리를 둘러보던 그는 비어 있어야 할 두 자리를 채운 이들을 알아보고 멈칫하며 부장 쪽을 돌아보았다. 부장이 그의 물음에 대답하듯 말했다.

“25기 신입기자 중에 여기 이 두 사람은 이번 한 달, 우리 편집부에서 수습을 받을 끼요. 보자, 이짝에 헤띵구(헤딩) 하나 제대로 할 것 같은 친구는 백준기 씨, 그리고 저쪽 미인은 손하린 씨, 이제 신입기자 환영회 한 지도 한 달포 지냈으니 이 두 후배 이력들은 그간 대강 들어 알 끼요.”

눈길은 자리를 찾아 앉는 그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해놓고, 이번에는 여럿을 돌아보며 편집부에서 가장 근무연한이 짧은 끄트머리 두 기(期)를 고르는 것 같더니 그쪽으로 무얼 툭툭 던져주듯 말했다.

“거기, 윤형 21기지? 그리고 그쪽 22기 이형이 그다음 기수가 되고. 이번 25기 수습은 둘이 사수가 되어 하나씩 맡고 편집이 뭔지나 알게 해주소. 특히 이형은 이 일까지 바쁘다고 내뺄 궁리 말고. 이번 달은 휴가 때문에 편집부는 모두 옴짝달싹 못하게 됐으니까.”

그제야 그도 그 두 수습기자를 하나씩 살펴보았다. 백진기는 드물게 서울에서 명문 대학을 나온 친구였고, 손하린은 지방 사범대 출신으로 가까운 도시 여학교에서 잠깐 교편을 잡은 경력이 있는 것으로 들었다. 그러나 군 복무를 마쳐서 그런지 나이는 백진기 쪽이 훨씬 위로 보였다.

이어 시작된 편집회의는 그날따라 길어져서 첫판인 스포츠면 기사가 부장 앞에 수북이 쌓일 때까지도 늘어졌다. 9시가 넘어 더는 편집을 미룰 수 없는 때가 되자 부장은 비로소 기사더미를 그쪽으로 쓸어 밀어주며 말했다.

“이형, 이거 가지고 가서 스포츠면 시작하소. 통신사에서 들어온 외신 쪽도 챙기고. 톱은 잘 알지요? 대붕기(大鵬旗) 고교 야구 결승전. 우리 신문사가 주최인 만큼 미다시(見出·標題)를 요코(橫·가로쓰기) 2단으로 시커머이(시커멓게) 처발라도 괜찮을 끼요. 나머지는 청룡기고 황금사자기고 확 내리 깔아삐고(버리고). 그리고 이하는 알아서 그려보시압.”

2.
그날 지면을 위해 들어온 본지 기자 작성 지역 스포츠 기사들과 통신사에서 넘겨준 외신 및 전날 주요 중앙지 기사 요약한 유인물, 그리고 하단 광고 추정단수에 삽입 광고 종류와 개수 따위가 첨부된 업무국 회람 등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자기 책상으로 돌아온 그는 서둘러 편집에 들어갔다. 편집용으로 놓아둔 탁상시계를 보니, 9시 10분. 시작이 평소보다 몇 분 늦어졌지만 10시 마감이 걱정될 만한 지체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날따라 공연히 뭔가에 내몰리는 기분이 들어 먼저 통신으로 들어온 외신과 전일 중앙지 중요 기사 발췌 요약부터 훑어보았다. 반드시 스포츠면 톱기사 부근에다 올려야 할 외신이나 참고, 부연해야 할 중앙지 기사는 특별히 없었다.

다음은 각종 국내 경기 결승전 기사와 경기장의 사건 사고. 그쪽 역시 반드시 특대 호수 표제나 7단기사로 뽑아 세울 만한 게 눈에 뜨이지 않았다. 그 바람에 별 저항감 없이 그는 부장이 지정한 톱기사를 받아들였다. 그 봄 경북고가 전통의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했을 때보다 더 크게 제1회 대붕기대회의 우승을 톱기사로 밀어 올릴 수 있었다. 대붕기는 그들 신문사가 그해 창설한 고교야구 전국대회로, 제1회 우승자인 서울 배재고는 그 때문에 수십 년 전통의 황금사자기를 차지한 지역 명문고보다 그날 편집에서는 한층 더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그렇게 톱기사가 결정되자 중간 톱 이하의 편집은 평소의 관행처럼 기계적으로 처리되었다. 좀 별난 일이 있다면 재작년 니카라과 대륙간 국제컵 야구대회 한국 우승을 추억하며, 바로 그 전해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난 ‘한국프로야구 준비 위원회’의 야심만만한 기획이 무산된 것을 애석해하는 투고를 받아준 것이었다. 강경한 ‘시기상조론’으로 1976년 한국 프로야구의 출발을 막은 한국야구협회의 단견을 돌이켜보는 짧은 수필 같은 회고담이 있어 5단 박스 기사로 다루어보았다. 그리고 내친김이라, 그전에는 별로 건들지 않았던 미국 프로야구 기사 하나를 2단으로 키워 하단에 슬며시 끼워 넣었다.

그런데 더블헤더 최장시간이란 기사 제목을 뽑다 자신도 그런 상태를 잘 이해하지 못해 잠시 머뭇거리며 그 말의 원뜻을 찾아보고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등 뒤에서 가벼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별생각 없이 힐끗 돌아보니 손하린이 왼편으로 한 발짝쯤 떨어진 곳에 비스듬히 붙어 서서 이제 막 수성 색연필로 시퍼렇게 분해되어가는 그의 편집지면을 바라보고 있다가 가볍게 움찔하며 물러서는 시늉을 했다.

“아니, 손 기자 여기서 웬일이요? 뭘 하고 있어요?”

“편집 수습하고 있어요. 방해될까 봐 가만히.”

그러고 보니 그녀 곁에는 백진기가 등을 맞대듯 붙어 서서 왼편으로 비스듬히 윤 기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기수는 하나 빨라도 나이는 두 살이나 어려 어정쩡한 사이로 지내는 윤 기자는 국제면 편집을 맡고 있는데, 이제 막 내려 받은 기사더미를 나름으로 이리저리 분류하고 있었다. 손으로 쓴 기사보다는 거친 유인물과 타이프라이터 용지, 그리고 세계지도 한 부분이나 크고 작은 흑백사진 따위가 더 많은 편집 자료였다.

“부장님이 배치한 거요?”

부장자리를 바라보다 자리가 빈 것을 보고 그가 손 기자에게 바로 물었다.

“아뇨, 부장님도 따로 정해주시지 않고, 선배님들도 불러주시지 않아 저희끼리 배치했어요.”

“저희끼리라, 자가 배치라…. 그거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네.”

“가위 바위 보로 했어요. 제가 이겨 이 선배님을 고른 거고요. 구실은 나이도 있고 기혼이시라 제가 이리저리 따라다녀도 부담되지 않을 것 같다고.”

당돌한 아이구나…. 그러나 그는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고 오히려 더 무표정하게 되어 말했다.

“그렇다면 둘 모두 편집국 밖에 나가 바람이나 쐬고 오시오. 나는 지금부터 한 10분쯤은 머리 터지게 판을 마무리해야 할 형편이고, 저기 윤형도 이제 한 50분은 아무 딴생각 안 날 거요. 편집 수습 그거 꼭 해야 되는 거라면 오후에나 봅시다. 젖은 신문지에 수성 색연필로 환칠하는 법이라도 일러드리지.”

그러고는 다시 마무리에 들어갔다.  

정말로 그의 스포츠면 편집은 그로부터 정확히 10분 뒤에 끝났다. 마지막으로 남은 1단 기사들까지 구석구석 꼼꼼하게 분배한 뒤 공간 나는 대로 와리코미(행간 삽입 광고)까지 채워 넣은 그가 광고면으로 신문 아래쪽 5단만 비운 편집 설계도면과 해당 기사들을 공무국으로 넘기고 돌아오니 벽시계가 10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둔주곡(遁走曲)  80년대

[일러스트 박용인]


그는 그제야 책상 한구석으로 밀어두었던 재떨이를 꺼내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편집부 사람들이 담배를 태우는 태도는 대강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편집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줄곧 담배를 달아 물고 일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오히려 한 면 편집을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전혀 담배를 피우지 않다가, 끝나면 한 상 차리듯 재떨이와 담배 라이터 파이프 성냥에 손수건까지 조금이라도 흡연과 관련되는 소지품을 있는 대로 방금 치운 책상 위에 벌여놓고 꽁초와 손끝이 노랗게 찌들도록 태워대는 방식이다. 어떤 이는 그게 신문 편집을 정신노동에 가까운 것으로 여기느냐 육체노동에 가까운 것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나뉘게 된 것이라 하는데, 그는 아마도 육체노동으로 보는 쪽에 가까워 편집에 집중해야 할 때는 아예 담배를 물지 않았다.

갑자기 편집부 전화가 울린 것은 그가 편집 끝난 뒤의 담배를 맛있게 한 대 태우고 거의 필터까지 타들어간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있을 때였다. 그가 전화를 받자 상대가 바로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활기찬 목소리로 자신을 밝혔다.

“나 중앙공사 양(梁) 대리요. 그간 잘 지냈소?”

중앙공사는 중앙공원 근처에 있는 자신의 소속 경찰서를 뜻하고 대리라는 직급도 형사라는 호칭 대신에 양이 가끔씩 사칭하는 금융기관의 직급이었다.

“아, 예. 반장님. 그런데 요새 어째 뜸하십니다. 5월에 다녀가시고 처음인 것 같은데.”

그도 애써 어두운 느낌을 털며 되도록 밝은 목소리로 그렇게 받았다. 반장은 그가 양에게 붙여주는 또 다른 직급이었다.

“그래서 이 기자를 한번 만나볼라 카는 거 아이요? 이따가 점심 먹고 1시쯤에 그 짝(쪽)으로 갈 테이 오랜만에 얼굴 한번 비예(보여)주소. 거 어디 경복(慶福)인가 뭔가 하는 다방 말이라. 그짝 공장 지하층 야불테기(옆쪽)에.”

경복다방은 기실 신문사 지하실이 아니라 이웃 상가 건물의 지하인데, 그도 가끔씩은 자기네 신문사 지하로 착각하며 드나들었다. 그 건물이 워낙 신문사와 붙어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 가면 신문사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럽시다아. 오후 1시부터는 편집국 자료실에 눌러앉아 있을 테니 더 이르거나 늦어지면 그리로 전화주시고.”

3.
아시아적 왕조국가의 별난 유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연좌제란 것이 그의 삶에 구체적으로 그림자를 드리운 것은 대학교에 진학한 첫해 늦봄이었다. 신문광고를 통해 고위직 공무원으로 추정되는 어느 가정집에 입주 가정교사 자리를 얻은 그는 난생처음 해보는 일이지만 그래도 딴에는 정성 들여 아이들을 가르쳤다. 중학교 1학년 남학생과 3학년 여학생 남매였는데 아이들도 잘 따라주어 첫 번째 보수를 받던 날만 해도 1000원이나 가욋돈을 얹어줄 만큼 후대를 받았다. 남매의 월말고사 성적이 전보다 월등히 나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딘가 서먹한 분위기로 두 번째 사례를 받은 지 며칠 안 돼 그 집 사모님이 조용히 그를 부르더니 무언가 몹시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학생 혹시 전에 어디 다른 대학 다니다가 퇴학당한 적 있으세요? 데모 같은 거로다.”

“아뇨, 입학이 동기들보다 한 해 늦어지긴 했지만 퇴학당한 적은 없는데요. 더구나 학생 데모 같은 걸로는.”

“거 참, 이상하네요. 그런데 이달에 왜 또 찾아와서 그러지?”

“뭐가요? 누가 찾아와서 그러는데요?”

“경찰이었어요. 뭐라더라? 대공(對共)부서에서 나왔다는데 별걸 다 꼬치꼬치 캐묻더라고요.”

“예?”

그는 그렇게 반문하면서도 갑자기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누가 무얼 더 자세히 말해준 것도 아닌데 그는 갑자기 모든 걸 훤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들이 왔다. 어머니나 형님만 찾아다니는 줄 알았던 그들이 드디어 나를 찾아왔다. 그는 마치 오래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처럼 그런 그들의 방문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방문이 뒷날 경험하게 될 것처럼 그렇게 철저하고 정기적으로 따라붙을 줄은 몰랐다. 그 학기에 쫓기듯 가정교사 자리를 옮겨보았지만 한 달이 지나자 어김없이 따라왔고, 2학기 들어 입주 가정교사 대신 그룹 지도를 해도 자신을 살피는 눈길은 오래지 않아 감지되었다. 나중 학교를 그만두고 작은 사찰에 기식하거나 외딴 정자 또는 산속 재사(齋舍) 같은 곳에서 자취를 할 때도 그랬고, 군대처럼 확고한 그들의 제도 속에 편입되어 있을 때조차 자신을 뒤따르는 눈길을 느낄 수 있었다. 미행을 따라붙거나 불러다 심문하는 형태는 아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의식되는 그들의 눈길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사회로 나와 크건 작건 집단에 소속하게 되고 무언가 실제적인 일로 사람들과 거래하게 되면서 그 눈길은 다시 압박의 형태로 그의 삶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입시학원에서 강사 노릇 할 때, 어느 오후 별 탈 없이 몇 시간 연강(連講) 잘하고 강사실로 돌아온 그에게 학원 원장이나 총무 혹은 동료 강사들이 전에 없이 무언가 꺼림칙해하면서도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이면 그는 이내 알아차렸다. 누군가 자신이 없는 학원 교무실을 헤집고 다니며 별것 아닌 탐문으로 상사나 동료 강사들을 들쑤셔놓았음을.

행동에서의 특이사항. 성향에서의 특이사항. 표현에서의 특이사항. 교우에서의 특이사항. 거주와 이전에서의 특이사항 또 무슨무슨 특이사항. 그리고 그 끝에는 참고사항입니다. 그 사람이 무슨 대단한 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고요. 하지만 사전에 파악은 되어 있어야 해서…. 그에게는 우리가 와서 묻고 갔다고 말하지 마십쇼. 사상 감시나 정치 사찰로 비치면 서로 불편해집니다. 일제 때 요시찰(要視察) 제도가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때부터 그는 상사나 동료 강사들에게 너무 깊이 사귀어서는 안 될 사람으로 은연중에 각인된다. 그리고 언제나는 아니지만 그 시답잖은 탐문은 잦은 그의 이직 혹은 전직의 원인이 되고는 했다.

편집 마감이 11시인 윤 기자가 편집을 마치고 공무국으로 내려가 판을 앉히는 것을 보러 갔다가 그날따라 빨라진 지방판 1쇄까지 보고 오는 바람에 평소보다 조금 늦어진 점심 식사는 오후 1시가 가까워서야 끝이 났다. 처음으로 사수가 된 둘이 수습기자 둘을 챙겨 함께 점심을 하는 바람에 자리가 좀 길어진 것 같았다.

그가 편집국으로 돌아와 시계를 보니 1시 어름에 양 형사를 만날 때까지 시간을 쓰기가 어정쩡했다. 여느 때처럼 자료실에 올라가 책을 보기에는 너무 짧았고, 그렇다고 그대로 멍청하게 앉아 기다리고 있기에는 또 길었다. 그가 갑자기 연좌제(連坐制)와 관련된 옛일을 떠올리게 된 것은 아마도 막연히 양 형사를 기다리는 꼴이 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서른이 되던 해 마지막 직장이라고 고른 신문사에서 최종 합격 통지를 받자마자 그는 다시 그의 담당이 한 달에 한 번씩 자신이 없는 신문사에 찾아와서 아래위 가리지 않고 그 종잡을 수 없는 탐문을 하고 다니는 상상에 먼저 진저리쳤다. 신문사가 학원이나 일반 직장과는 다르겠지만, 경찰이 그렇게 휘젓고 간 뒤의 그 이상한 분위기가 새로 시작하는 그의 삶을 함부로 헝클어놓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또 그래서는 정말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출근 닷새 만인가, 수습을 따라 나서기 전에 그는 스스로 대구서 출입 선배를 찾아가 인사를 하고 거꾸로 한 사람 수배를 부탁했다. 거기 대공계(對共係)에 청운 고시학원 강사 이휴를 담당하던 형사를 알아봐달라는 내용이었다. 한 10년 연좌제에 시달리는 동안에 그도 자신의 담당이 어디 있는지는 대강 알고 있었다. 마지막 직장인 청운고시학원이 대구서(署) 관할인 동네에 있었으니, 거기로 찾아오던 형사도 대구서에 근무하고 있을 것이란 추측이었는데, 정말로 그랬다.

“긴가민가했는데, 알아보니 바로 거기 있더만. 양민석 형사라고. 근데 어떻게 알았오? 그 친구가 거기 있는 줄. 그리고 그 친구가 이 기자에게 어떻게 해주면 되오?”

선배가 그렇게 묻자 그는 잠시 멈칫했다. 순간 여러 가지 회피나 우회의 구실이 떠올랐으나 그는 이내 그 선배의 선의에 의지해보기로 하고 정직을 최선의 정책으로 삼았다.

“아버지 일로 대공계의 사찰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번에도 또 내가 없을 때 신문사에 와서 별 중요하지도 않은 탐문으로 직장 분위기를 흐려놓을까 봐 걱정입니다. 차라리 내가 먼저 찾아가 그와 약정을 맺고 그가 내게 궁금한 게 있을 때마다 자진 출두하는 방식으로 해결해 보았으면 합니다.”

“아버님 일은 나도 양 형사에게 들었소. 그런데 아버님이 월북하실 때 이형은 잘해야 두세 살이었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엄중한 급수의 동향 사찰을 받게 된 거요? 뭐, 유신 때 빡세게 데모라도 했소?”

“짧은 대학 시절이었지만. 저는 데모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끼어들어 오히려 그 친구들을 더 험악한 처지에 빠지게 만들까 봐. 따라서 저도 막연히 뭔가 분류에 착오가 있어 부당하게 제 요시찰 등급이 오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 까닭도 달리 짐작 가는 데가 있습니다.”

“무슨 짐작?”

“아버님이 월북하실 때가 서른여섯이셨으니, 이제는 예순을 훌쩍 넘으셨습니다만 남파(南派)의 가능성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지난 50년대 60년대에는 훨씬 더 그 가능성이 높았고요. 아마도 그 가능성이 제 사찰 등급을 높였을 겁니다. 내가 자라 남파된 아버지가 접선(接線)할 만한 성년이 되어갈수록.”

“제법 그럴듯한 추측이오만 아닐 수도 있을 거요. 전쟁 끝난 지가 언젠데, 더구나 그쪽에는 아직도 워낙 오류나 오판, 오인이 많아서…. 하지만 자진 출두는 다시 생각해보시오. 우리 공장 체면도 있지, 어디 기자가 무슨 끔찍한 현행범도 아닌데, 말단 서(署) 형사계에 달마다 자진 출두한다는 거요? 그러지 말고 내 약속 잡아줄 테니 밖에서 양 형사 한번 만나 적당히 조정해보시오. 그쪽도 이제는 그렇게 이형을 막보지는 못할 거요.”

그래서 양 형사를 처음 만난 것이 이제 곧 그를 만나게 될 경복다방이었다. 그 사회부 선배가 무슨 말로 얼렀는지 거의 양 형사가 그를 찾아보러 오는 형국이었는데, 만나서 보니 이전 고시 학원시절부터 그를 담당했던 사람이 아니라, 근래 자리를 옮겨와서 그를 인수인계받은 후임이었다. 양 형사는 하급 정보형사의 여러 특징을 고루 갖춘 사람이었으나 인성만은 그가 바라던 바에 가까웠다. 그동안의 어려움을 말하자마자, 그는 거의 분개하듯 인정머리 없는 동료들의 동향보고 작성 요령을 나무라며 그의 제안을 성의 있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거기서 둘 사이에 이루어진 약정이 그의 동향 보고서는 매달 한 번 그 다방에서 둘만의 문답으로 작성한다는 것이었다.
처음 몇 달 양 형사는 제법 설문용지 같은 것을 만들어 와서 보고서 작성의 기초로 삼았다. 그러나 1년이 가고 2년이 가면서 직접 방문은 두 달에 한 번씩으로 건너뛰고 어떤 때는 전화 몇 마디로 확인을 대신하더니 이번에는 석 달 만에 만나러 오는 길이었다.
그의 회상이 그쯤 이르렀을 무렵 때맞춰 전화벨이 울렸다. 양 형사의 전화였다.
“이 기자, 나 지금 여기 와 있구마. 씰데없이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한 5분 늦었네.”

4.
신통찮은 조명에 담배연기까지 끼어선지 다방 입구에 들어서도 양 형사가 얼른 눈에 띄지 않아 두리번거리는데 한쪽 편에서 누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이형, 여기요, 여기.”

그가 소리 나는 쪽을 보니 난데없이 허름한 노타이에 맥고모자를 덮어쓴 양 형사였다.

“아이고 양 대리님 오랜만입니다.”

그가 좀 과장되게 반가움을 표시하고 맞은편에 앉으며 우스개 삼아 한마디 덧붙였다.

“요새 중앙공사 형편이 영 신통찮은 모양입니다. 이거 웬 쌍팔년(단기 4288년·서기 1955년)도 옥양목 노타이에 맥고모자까지 쓰시고.”

“더럽고 좁은 구멍으로 근근이 나온 놈이 무신 큰 용맥(용코) 있나.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같이 맨날 그 모양 그 꼴로 살다 보이, 볕 뜨거운 날은 땀에 전 노타이에 밀짚모자 덮어쓰고 댕기는 수도 있제.”

전화할 때의 쾌활한 음성과는 달리 어딘가 좀 지치고 풀이 죽은 음성이었다. 그도 더는 농조로 이야기해서는 안 될 것 같아 조금 정색하고 물었다.

“많이 바쁘신 모양이군요. 양 대리님 같은 분이 바빠지는 세상 그거 별로 안 좋은데.”

“맞지러. 이형도 이마이(이만큼) 자리 잡아 사는데 어느 쪽이든 세상 시끄러버 좋을 꺼 하나도 없구마는.”

“세상 시끄럽다니요? 대구가요? 아무리 동네북이 되어가는 유신(維新)이지만 영남 패권주의가 시퍼런 대구에서까지야.”

그가 조금은 시치미를 떼고 있다는 느낌에 민망하면서도 짐짓 그렇게 반문해보았다. 그러자 양 형사가 전에 없이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이형, 참말로 기자 맞나? 영남 패권주의가 무신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린지 모리겠다마는, 참말로 대구가 어떤지 알기나 하능교? 여기는 일제 때 조선의 모스코바였고, 해방 후 좌익폭동 1호가 대구 10·1폭동이라. 아이, 여러 말 말고 몇 해 전 인혁당(人革黨) 사건도 있잖능교? 사형만 여덟이라꼬, 여덟. 대구라꼬 절대로 만만찮구마.”

“이 지방에서 난 국무총리가 몇 명이고, 국회의장 국회의원에 장관에 안기부장 검찰총장이 얼마나 되는지도 생각해보세요. 장군과 경찰 총수도.”

“어쨋기나.”

양 형사가 그렇게 말을 끊어놓고 전에 없이 수첩까지 꺼내 메모를 살피면서 물었다.

“오랜만에 몇 개 다시 한 번 확인이나 해두자. 첫째로 그라이(그러니) 아직은 어디 딴 데로 옮기 갈 생각 없단 말이제? 글치만 새로 좋은 직장 생기믄 다를 수도 있잖능교? 서울 어디 큰 회사에서 월급 많이 줄 테이 오라 칸다던가. 동아 조선 아이믄 중앙이라도.”

꼭 얼마 전 서울에서 황 선배와 나눈 얘기를 엿듣기라도 한 사람 같았다. 그는 공연히 당황하며, 그러나 작은 일도 감추지 않겠다는 각오로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직 그런 제안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또 그런 제안이 있다고 해도 당장 움직이기는 어려울 겁니다. 이것저것 맞춰보고 옮길 만해야 옮기지요. 그리고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그때는 누구보다도 양 형사님께 먼저 알리겠습니다.”

“아니 뭐, 이형한테 그런 다짐 받자는 건 아니고…. 거가다가 그런 전직, 이직이 아니고도 주거를 옮길 일은 있을 끼요.”

“맞습니다. 전업 작가로 살 작정을 하고 문필 활동이 보다 용이한 서울로 옮길 수도 있겠지요. 신문사를 그만두고. 하지만 그것도 아직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서울에 가족이 편히 살 만한 집 한 칸이 마련 안 되면 쉽게 움직일 수 없을 겁니다.

또 그 반대로 직업을 바꾼다 해도 한동안 거주 이전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족을 옮기는 게 영 자신 없으면, 얼마간 가족은 지금처럼 대구에 두고 나 혼자 서울에 기식하며 대구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법도 있겠지요. 고속버스와 무궁화호 모두 네 시간이면 오갈 수 있는 세상이니까요.”

그가 그렇게까지 나오자 양 형사도 만족스러워하는 어조로 우스개를 던지듯 마무리했다.

“에헤이, 보이(보니), 이형도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은가배. 우쨋든 신분 변동이나 거주 이전이 있으면 그때그때 바로 알콰(알려)주소. 아(애) 방우 맹글지 말고. 그라고.”

그래놓고 잠깐 무언가를 망설이다가 작정한 듯 덧붙였다.

“우쨋든 이건 우리 오래된 약조니까, 정보 교환이나 인적(人的) 접촉 기타 특이 동향 있으면 꼭 연락 잊지 마소. 특히 춘부장 관련 사항은.”

하고 보니 자신의 말이 너무 박정한 게 아닌가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동안 나를 믿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이 몇 년은 마음 편히 지냈습니다.”

그가 진심으로 그런 감사까지 덧붙였다. 그 말에 양 형사가 시계를 보더니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무얼 연상하는지 가볍게 이맛살까지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자. 그라믄 마, 다음에 봅시다. 보자… 뭐, 달성공원 어느 모팅이라꼬? 여다서 어예(어떻게) 글로(그리로) 가믄 좋으꼬? 이것들 가마이 보이(보니) 분명히 속은 밸간(빨간) 것들인데, 뻑 하믄 인권이고, 자유화요, 민주화에, 색 쓴다 캐봐야 유신철폐나, 분배평등 따우(따위) 분홍도 못 되는 살색이라 카이, 내 참 더럽고 같잖아서. 이 꼬라지 하고 글마들(그놈아들) 새에 끼에(끼어). 언제까정 구경만 해야 되는 기고. 우쨋튼 동, 이형. 그라믄 잘 있으소 이만.”

5.
12시를 앞뒤 해서 지방판이 나오고, 오후 1시 무렵 해서 시내판 마지막 교정 교열이 끝나 교열부까지 빠지면, 시내판 초판이 나올 때까지 편집국은 한동안 조용해진다. 유가지 최다 17만 부, 도내 스무남은 군부(郡府)에 한 10만 풀어 먹이고 신문사 소재 직할시에 가판(街販) 포함 7만 부가량 까는 지방 석간신문사의 일상이었다.

그가 편집국으로 돌아갔을 때는 이제 막 시내판 초판이 나올 무렵이라 그 조용함이 깨진 뒤였다. 편집국 내근 부서 데스크 곳곳에 점심 식사 뒤의 나른함에서 깨어난 사람들이 이제 곧 그날 가판으로 거리에 쏟아질 초쇄를 기다리고 있었다. 편집부도 마찬가지, 마지막 검토가 남았다는 듯 편집국 안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모두 데스크에 몰려 있었다. 그도 비어 있는 자신의 자리에 가 앉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맞은편에 앉게 된 백진기의 얼굴에 까닭 모를 웃음기가 가득해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백형, 무슨 좋은 일 있소?”

“아임다. 조금 전에 윤 선배님한테서 편집 수습 맛을 봤는데 그게….”

그러고는 다시 참지 못해 가벼운 웃음소리까지 냈다. 그걸 보고 농담 잘하는 차장이 전혀 웃음기 없이 한마디 했다.

“보이 ‘홍도 뚝’ 했구마는.”

‘홍도 뚝’은 ‘홍도야 울지 마라’ 일곱 자를 석 자로 줄인 말이었다. ‘미다시(見出)’를 뽑는다고 해서 기사 제목을 만들 때 되도록 문장은 짧아야 하는데, 그때 문장의 음절 수를 줄이는 방식으로 신문사는 전통적으로 ‘홍도 뚝’을 가장 효과적인 본보기로 들었다.

차장의 그 한마디에 저마다 그런 식의 연마를 거친 편집부 선배 기자들이 편집 수습을 보조라도 하듯 우스개 삼아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놈아 그거, 대번(멀리 못 가) 뿌뜰었다(붙들었다)’는 능동일 때는 ‘답삭’이고 피동일 때는 ‘덜미’였다. 이를 테면 ‘소매치기 답삭’ ‘사기꾼 덜미’ 또 ‘갑자기 덤벼들어 무언가로 세게 치고 소지품 빼앗아 달아나기’란 강도 행각을 위해서는 ‘퍽치기’란 신조어가 생겨났고, ‘생떼를 쓰며 잡아떼다’ 또는 ‘완강히 부인하다’는 똑같이 ‘오리발’ 세 음절로 처리되었다. ‘수뢰 혐의에 오리발.’
마지막은 간밤 술에 취해 ‘땅에 구타를 당하야’ 얼굴을 갈아붙이고 나온 선배 하나가 공무국 말로 그 화제에 ‘시야게(마감질)’를 했다.

“그라믄 ‘와리코미’ 넣는 것도 배웠겠네. 이런 거 기사 새새(사이사이)로 여기저기 빈줄야(적당히 조정해서) 낑가(끼워)넣는 법.”
왼뺨 절반이 넘게 반창고와 일회용 밴드로 치장하고도 군데군데 타박상의 흔적까지는 다 감추지 못한 자기 얼굴의 상처들과 멍을 가리키며 술꾼 선배가 하는 소리였다. 낮지만 왁자한 웃음으로 멀리서 보기에는 편집부가 자못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데, 드디어 사환 녀석이 시내판 초쇄를 돌리기 시작했다.

내근 부서들은 저마다 그 판에 관여한 자신의 몫을 점검하느라 신문에 얼굴을 묻듯 열중해 들여다보았다. 그 바람에 잠시 편집국은 데스크마다 묘한 탐독의 분위기로 조용해졌다. 그런데 채 5분도 지나기 전이었다. 갑자기 편집국장 책상에 퍽, 하고 무슨 서류 뭉치를 패대기치는 소리가 나더니 뒤이어 누군가의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어이, 강덕현이, 너 신문 이렇게밖에 만들 수 없어?”

그가 놀라 그쪽을 보니 편집국장 책상에서 하나 건너 데스크를 차리고 있는 정치부장이 방금 나온 그날치 시내판을 몇 부 구겨 편집국장 책상 위에 팽개치며 내지르는 소리였다. 천둥벼락이 쳐도 앉은 자리에서 꿈쩍 않는다는 편집국장이 눈만 멀뚱멀뚱하며 그런 정치부장을 건너보았다.

“뭘?”

그가 보기에는 꼭 그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한마디지만 아주 느직한 말투로. 정치부장이 더욱 날 선 목소리로 몰아세웠다.
“아무리 (엠바고) 약속을 깨고 우리 신문만 특혜분양자 명단을 발표하는 기라 카지만, 발표를 할라 카믄 바로 해야지, 이기 뭐꼬? 저어(저희) 동네 나쁜 놈들은 다 빼고, 서울 놈들도 박통 부랄 잡고 알랑거리는 놈들 또 봐주고. 엉, 차 띠고(떼고) 포 띠고….”
“그래도 할 만하믄, 차포 띠고 뚜는 수도 있지 머. 어차피 뻐꿈뻐꿈한(숭숭 뚫린) 명단.”

편집국장이 듣기 답답할 만큼 느릿느릿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해놓고 슬그머니 의자를 뒤로 돌려 등을 보이며 앉았다. 정치부장이 이번에는 허리에 두 손까지 올린 채 편집국장의 넓적한 등짝과 머리칼이 반도 안 남은 뒤통수에 대고 막말에 가까운 비판을 퍼부어댔지만 더는 아무런 대응이 없어 시비는 점점 희화적인 양상으로 변해갔다.

“정치부장 저 양반, 저래도 되는 깁니까? 국장하고 기수 차이가 좀 나던데.”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몇 기 선배 하나가 누구에게 묻는다기보다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차장이 비슷한 어투로 그 말을 받았다.

“머, 3기하고 6기제. 숫자로는 세 기수 차이지만 실지(실제)는 한 기수 차이나 마찬가지라. 그해 가톨릭에서 재단 맡던 해 사세를 확충하면서 한 해에 3기, 4기 합쳐 다섯을  뽑았고, 이듬해 다시 5기, 6기 셋씩 더 뽑아 4·19 무렵의 그 황금 트리오를 만들었제.”

“그때 저 양반들 참말로 대단했다꼬. 나중에 서울로 불리(불려) 올라가 중앙지 발행인까지 지낸 몽구(夢丘) 선생 모시고 정치 사회 경제 삼총사로 안 날맀나? 저기 지금 저 두 양반하고, 서울로 올라가 논설위원 지내는 김충조 씨 하고. 거다가 나(나이)도 기수하고는 달라 강 국장님이 오히려 장 부장보다 한 살 적을걸. 그래다 보이, 그 기수로 아직 우리 공장에 남은 대여섯은 그냥 한 덩거리(덩어리)로 너나들이 하고 지내는 사이 같더라꼬.”

그들과 뚝 떨어져 10기를 넘긴 편집부장이 가운데 끼어들어 그렇게 정리해놓고는 자기 앞에 펼쳐져 있는 그날 시내판 초쇄를 덮었다. 당장 급하게 판을 갈아야 할 만큼 큰 실수나 반드시 그날 신문에 얹어야 할 새 뉴스는 없는 듯했다. 그때 백진기가 그래도 미진한 듯 물었다.

“국장님도 어지간하지만 정치부장님 성품 한번 대단하시네요. 전에는 뭐 하신 분인데요?”

“전에 뭐 하다니? 정식 기수로 입사시험 봐서 서른 안 돼 우리 공장 들어왔는데. 그 성질? 그거는 뭐 쪼매 깨끄라운(까다로운) 데가 있지만, 대낮 편집부 데스크에 모예 앉아 흉보듯이 쑤군거릴 얘기는 아인(아닌) 같고오.”

부장이 그렇게 말을 자르다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아, 참. 오늘 같은 날은 아매(아마) 편집국 회식이 있을 끼요. 최소한 홍선루(紅仙樓) 오일대연(五日大宴)으로다. 별일 없으면 퇴근하는 대로 거기 가서 골뱅이(다슬기)오이냉채와 우랑탕에 홍선명주나 마시다가 히입(헤어집)시다. 21기 이하, 특히 수습 분들 빠지지 말고.”

홍선루는 추씨 성에 홍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40대 중반 아주머니가 예순 넘어 보이는 할머니 하나 데리고 하는 술집이었다. 신문사에서 중앙통을 따라 남쪽으로 걷다가 오른쪽으로 꺾이는 대로로 들면 염매인지 연매인지 하는 이름의 재래식 시장 골목을 만나게 되고, 그 골목을 지나면 야트막한 산등성이에 기댄 서민 동네 발치 어디에 간판도 없이 술을 파는 옛날 주막 같은 집이 있었다. 이전에는 주모의 이름을 따 그저 홍선집이라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신문사 편집부가 단골로 드나들면서 미다시 뽑는 데 드는 솜씨로 승격시킨 옥호가 홍선루였다.

지난 3년 그는 적어도 백번은 신문사에서 홍선루로 갔는데 한 번도 차를 타고 간 기억이 없다, 나중에 가늠해보니 시내버스로 두 정류장 정도, 걸으면 한 20분 걸리는 거리였는데, 알 수 없는 일은 대구의 염천과 혹한을 헤치고 갈 때조차 그 길이 이웃집 가듯 하기에는 좀 멀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은 점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출발부터가 이상했다. 오후 4시쯤 편집부 마감회의 끝내고 바로 홍선루로 출발한 팀도 있는 것 같았으나, 그는 수습 후배 둘을 맡아 공무국부터 차분히 견학시키면서 대낮부터 이취 상태가 되어 저지를 수 있는 실수 혹은 추태를 피했다. 틈틈이 ‘낮술에 취해도 애비는 알아보자’고 외치며 마셨건만, 공경해야 할 아비가 없어서인지, 초저녁부터 유체이탈로 낭패를 본 게 한두 번이던가. 지난여름에도 ‘오후 4시 반의 시원한 맥주 한잔’을 하러 갔다가 웬 되다 만 시인이 양주 한 병을 들고 나와 간을 치는 바람에 저녁 8시 혼잡한 반월당 사거리에서 교통정리를 자청해 점잖은 편집부 말투로 ‘중인(衆人)의 빈축’을 산 적도 있다.

그에게 홍선루에 늦게 갈 구실을 만들어주기 위해 그날 두 수습기자는 뜨거운 여름 오후 4시의 공무국을 한 시간 가까이나 끌려다니며 추상적인 편집이 구체적인 조판을 거쳐 신문으로 인쇄되어 나오는 과정을 돌아봐야 했다. 대통령과 공화당과 박정희는 왜 한자로 석 자씩 묶여 특별하게 제작되는지, 그걸 견통령(犬統領)과 공산당(共産黨)과 박정희(朴貞姬)로 뽑아 ‘공산당 총재’ 박정희를 만들거나 ‘박정희 견통령’을 만든 식자공은 어떤 일을 당했는지를 낄낄거리며 듣는 재미도 있었지만. 너무 친절한 제작부 전문가를 만나 별 쓸모도 없는 커트용 동판(銅版) 뜨는 법을 한참이나 실습까지 해가며 들어야 하는 불상사를 만나기도 했다.

이러구러 그들 셋이 홍선루로 출발한 것은 오후 6시를 20분 남긴 때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신문사에서 홍선루까지의 거리가 전 같지 않게 그의 심사를 건드렸다. 8월 초 오후 6시경이 아직 덥고 볕도 따가운 시간이기는 하지만 그게 홍선루 가는 길을 그렇게 멀고 힘들게 만들지는 몰랐다. 몇 번이나 멈춰 서서 택시를 기다려보자고 제안하다 손하린의 간곡한 만류를 듣고서야 겨우 뭔가로 과장된 마음을 가다듬었다.

“선배님 정말로 저희 괜찮아요. 학생 때도 이보다 더 먼 길 맨날 걸어서 다녔다고요. 그렇게 미안해하지 마세요.”

아무래도 그런 손하린이 그의 까닭 없이 과장되고 굴곡 심한 감정의 원인이 되고 있는 듯했다. 문득 그걸 깨닫고 무연히 눈길을 돌리는 데 멀지 않은 곳에 홍선루의 칠 벗겨진 함석지붕이 보였다.

신문사 사람들은 옥호만 거창하게 누각의 반열에 올려놓고 정작 주모인 추홍선은 늙고 젊고를 가리지 않고 ‘추 마담’이라고만 불렀다. 추 마담의 출신에 대해서는 두 갈래 설이 있었다. 하나는 그녀가 당시까지도 대구의 일급 요정인 태화관의 색시로 60년대 후반까지 술자리에 나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70년대 초반까지도 태화관 주방 요리부에서 숙수(熟手)로 일했다는 것인데, 사람들은 대개 뒤쪽을 믿는 눈치였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 모습이 달라졌다 해도 그 생김으로는 옛날 명월관 다음 태화관이라던 일급 요정의 색시가 되기는 어려웠을 거란 추측이 우세한 데다, 값싸고 대단찮은 재료로 모두가 맛나하면서도 쉬 물리지 않는 안주를 만들어내는 요리 솜씨는 일류 요정의 숙수였다는 전력을 더 믿을 만하게 해주었다.



둔주곡(遁走曲)  80년대

[일러스트 박용인]

이를테면, 얼기 직전의 초록빛 다슬기 육수에 삶은 다슬기 속을 반쯤 말고 잘게 썬 오이채를 띄운 골뱅이 냉채나 역시 삶은 다슬기 속과 미나리와 향기로운 계절 산채를 매콤하고 짭짤하게 무쳐내는 골뱅이 무침은 대구 아니라 이 나라 어딜 가도 그 값으로는 맛볼 수 없는 별미였다. 또 소의 양물(陽物)을 중심으로 부근의 몇 가지 값싼 부산물과 조개 낙지 오징어 따위 그때그때 시장에 나는 해산물 약간을 주재료로 하고 몇 가지 채소를 더해 그녀만의 비법으로 끓여낸 우랑탕(牛囊湯)과 소의 천엽, 간, 등골에 육회 약간을 곁들인 천엽육회 같은 것도 그 값으로는 어디 가서도 그만한 별미를 맛보기 어려운 ‘홍선루 특선’이었다. 그리고 다른 안주는 뒷날 그의 기억에 남은 게 별로 없다, 누구 입에나 잘 맞는 김치와 마른 가자미 볶음, 그리고 계절에 따라 한두 가지 더 놓이는 나물 접시 말고는.

마당으로 들어서니 어떤 말보다 추 마담 찾는 소리가 더 자주 들렸는데, 그 다음이 안주 주문이었다. 추 마담의 많지 않은 메뉴를 한꺼번에 다 청하는 것 같았다. 사방 열린 문으로 살펴보니 홍선루를 통째 접수하기로 작정했는지 미닫이를 들어내 훤하게 이어진 단칸 마루와 두 칸 장방에 벌써 여남은 명이나 앉아 김치와 마른 가자미 볶음만 놓고 막걸리를 퍼 마시고 있었다. 그중에 편집부는 그들 셋을 빼고는 이미 다 나와 있는 거 같았다.

“아이, 이 기자는 수습도 과외시키나? 아까 나오다 보이, 5시가 다 돼 아무도 없는 공무국에서 수습들 데불고 뭐 했노? 지는 편집 수습도 안 하고 편집기자 먼저 돼가(되어서) 수습은 나중에 해놓고.”

마루로 올라서는 그를 보고 입 험하기로 소문난 법조 출입 홍 선배가 왼쪽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가는 특유의 웃음과 함께 빈정거렸다. 그 곁에 앉았던 편집부 선배가 후래자삼배(後來者三盃) 대신 신문사 전통의 ‘다짜고짜 세 대포’를 집행했다. 옛날같이 큰 국 사발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때는 대폿잔이라고 불리던 중간 사발로 홍선명주(紅仙銘酒)라고 불리는 막걸리가 석 잔이었다.

이따금 잔을 멈추고 숨 고르기를 해가며 그는 근래에야 구경하게 된 홍선명주 빚어지는 과정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 또한 편집부 솜씨임에 분명한 홍선명주란 이름은 아무 특징 없는 인근 술도가 막걸리가 추 마담의 특별한 관리를 받아 며칠 더 익으면서 더해지는 별난 맛 때문에 붙여졌다. 홍선루 부엌 뒷문 쪽으로 한 평 정도 가작을 달아낸 곳에 부뚜막처럼 조금 높인 옛날 두멍 자리가 있었는데, 추 마담은 거기에 닷 말들이 독 세 개를 묻고 하루 간격으로 술도가 술을 채워 적어도 사흘은 더 익힌 뒤에야 손님들 술상에 올렸다. 그리고 여분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모르지만 닷새를 넘긴 술을 술상에 올리는 일은 없었다.

거기다가 아주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세 술독의 관리였다. 언젠가 좀 일찍 홍선루에 간 그는 추 마담이 마른 대야에 조선종이 뭉친 것을 넣고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가 무심코 묻자 그녀가 그냥 지나가면서 대답했다.

“오늘 도가 술 받아 넣을 독 말리러 가요. 이걸 독 안에 넣고 불을 붙이면 독 숨통에 밴 술 찌꺼기나 잡냄새를 모두 잡을 수 있거든요. 새 술이 군맛 없이 좀 더 익을 수 있게.”

편집부 중심의 오일대연으로 굳어져 간다 싶어지자 술자리는 쉽게 무르익었다. 그 뒤에 다른 부서에서 찬조로 나온 선배들이 더 있어 모인 사람이 그 새 스무 명을 훌쩍 넘어도 편집국 전체 회식 때처럼 사회가 나서거나 배치와 정돈의 기류에 내몰리는 기분 없이 저마다 앉은 자리에서 거리낌 없이 취해갔다. 그도 7시를 넘기면서부터는 점차 얼얼하게 술이 올랐다. 편집부 선배들이 모인 곳에 수습 둘을 떼어놓고, 그래도 마음 편한 입사 동기들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전투 모드에 들어갔다.

편집부장이 그날 밤 회식의 주인공으로 짐작하고 기다려온 두 사람, 정치부장과 편집국장은 9시가 가까워서야 홍선루로 왔다. 둘이 어디서 만나 마셨는지 어깨를 맞대고 비틀거리며 들어왔는데, 벌써 혀끝들이 말려들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홍선루로 들어설 때 반짝 긴장했으나 그사이 마신 술이 있어선지 이내 아른아른한 명정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날 밤 통금을 앞두고 서로를 재촉해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까지, 그가 기억하는 의미 있는 말은 그의 자리에서 두어 상 저쪽에 자리 잡은 정치부장과 편집국장이 주정처럼 웅얼웅얼 주고받던 몇 마디였다.

…니한테 먹은 마음이 있었던 거는 아이다. 안다. 우리가 왜 이리 홍양홍양(흐물흐물) 무질러져 앉게 됐는지 모리겠다. 글케(그러게). 그때 우리 셋이 마음먹으믄 못 잡을 눔 없었다. 박정희도 지방지 중에서 우리 신문은 꼭 훑어본다꼬 안 카드나. 그래이 뭐하노. 세상은 하마 이마이(이만큼) 흘러 왔뿌랬는데. 맞다, 이제는 우리가 인냉(시비) 걸어봤자 죽자꼬 덤벼드는 저녁 모기만큼도 안 여긴다. 꼭 글타(그렇다). 하마 18년, 백성들에게는 먹는 게 하늘이라꼬, 그거 나아지는 거 보고 참을라 캐도 천불 난다. 오늘 일 똑 덕현이 니 보고 성낸 거는 아이다. 왠지 그래라도 안 하믄 내가 이대로 주질러 앉아뿌는 같아서. 나도 안다….   



입력 2017-09-10 09:00:02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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