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호

언니의 책, 아저씨의 책

  • 김현미 동아일보 출판팀 차장 khmzip@donga.com

    입력2006-08-14 16: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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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니의 책, 아저씨의 책

    인생이 어떻게 무너져 가는지를 솔직하게 보여주는 책, ‘살다’와 ‘강산무진’.

    일본 지바대학 철학과 교수인 나가이 히토시가 지은 ‘어린이의 마음으로 철학하기’(길)는 어린이철학, 청년철학, 성인철학, 노인철학의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어린이들은 삼라만상이 너무나 신기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좋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묻는다. 그래서 어린이철학의 근본문제는 ‘존재’다. 청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고민한다. 그래서 청년철학의 근본문제는 ‘인생’이다. 성인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세상의 구조를 어떻게 만들면 좋을까?’이다. 이들은 삶의 방식이나 인생의 의미와는 별개로 사회 속에서는 행위 결정의 방법을 문제로 삼는다. 노인철학의 궁극적 주제는 ‘죽음’이고 또한 ‘무(無)’이다. 그것을 통하여 한 번 더 어린 시절의 주제인 존재가 문제가 된다.”

    나가이 교수에 따르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더는 어떤 종류의 질문을 하지 않게 됨을 의미한다. 그 어떤 종류의 질문이란 ‘나는 왜 존재하는가?’ ‘왜 나쁜 일을 하면 안 되는가?’ 따위다. 하긴 한 살씩 더 먹을수록 ‘왜?’라는 의문부호가 점점 줄어드는 걸 느낀다. 아는 게 많고 이해심이 커져서라기보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도 지구는 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가이 교수는 이런 말도 했다.

    “청년철학, 성인철학, 노인철학은 각각 문학, 사상, 종교로 대용될 수 있으나 어린이철학을 대용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어린이철학이야말로 가장 철학다운 철학이다.”

    맞는 말이다. 주위를 보라. 생각의 초점이 어디에 맞춰져 있느냐에 따라 읽는 책도 다르다.



    영악한 언니들의 시대

    1980년대는 성인철학의 시대였다. 대학 언저리만 가도 모두 ‘세상의 구조를 어떻게 만들면 좋을까?’를 고민했다. 그들은 정치철학과 사회사상에 심취했고 ‘철학에세이’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 ‘자본론’ 등을 열심히 읽었다. 출판계는 1980년대를 사회과학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존재’와 ‘인생’의 문제를 뛰어넘어 곧장 세상으로 시선을 돌려버린 ‘웃자란 어른’이 많았다. 그들은 내공이 쌓이기도 전에 내지르기에 바빴다. ‘386세대’가 그들이다.

    그렇다면 2000년대는? 굳이 고르자면 청년철학의 시대다. 요즘은 사회의 모순을 없애고 세상을 개조하겠다며 덤비면 철부지 취급을 받는다. 그보다는 누가 먼저 이 험난한 세상에 어떻게 적응해서 살아남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현실 포착 능력은 언니들이 오빠들보다 한 수 위다. 요즘 팔리는 책을 보라. 영악한 언니들의 시대다.

    2004년 출간된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남인숙 지음, 랜덤하우스 펴냄)는 30만부 가까이 팔린 베스트셀러다. 올해 4월에 나온 ‘여자생활백서’(안은영 지음, 해냄 펴냄)는 두 달 만에 5만부 이상 팔렸다. 이 책은 이런 것들을 가르친다. ‘나쁜 남자를 유혹하라’ ‘작업 기간은 2주를 넘기지 마라’ ‘스킨십 도중 딴생각 하지 마라’ ‘휴대전화에 저장된 그를 지워라’ ‘다리털만 밀지 말고 다른 털도 관리하라’…. 요즘 언니들은 이런 책을 돈 주고 산다. 왜? 책 속에 답이 있다. 더는 촌스러운 걸 순수하다고 착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서른 살 여자가 스무 살 여자에게’ ‘가난한 남자와 결혼해도 부자가 될 수 있다’ ‘능력 있는 여자는 스캔들을 꿈꾼다’ ‘성공하는 여자는 당당하게 때론 뻔뻔하게’처럼 20대 싱글 여성을 겨냥한 자기계발서들은 제목부터 속물 냄새를 물씬 풍긴다. 아니 이들은 ‘속물이 돼야 성공한다’는 메시지로 당당하게 때론 뻔뻔하게 서점가를 장악해가고 있다.

    그러나 세월은 비켜가지 않는다. 청년기를 건너뛰고 어른으로 웃자란 그들도, 성인이 되기를 마냥 유예하며 살아가는 그들도 언젠가는 인생의 끝에 다다른다. 그 허무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할까.

    ‘산다는 게 뭔가’

    최근 김훈의 ‘강산무진’(문학동네)을 읽었다. 오십대인 남자 선배가 술 한잔 걸치고 “야, 넌 읽지 마라. 그냥, 우리 같은 아저씨들이 보는 책이다”라고 한 게 괜히 마음에 걸려, 차일피일 미루다 얼마 전에야 손에 들었다. 그보다 먼저 오토가와 유자부로의 ‘살다’(열림원)를 읽었다. ‘살다’는 직장 동료가 “기가 막힌 소설”이라며 손에 쥐어준 책이다. 그도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의 아저씨다.

    ‘살다’는 일본 에도시대에 무사의 긍지를 지니고 살아온 사무라이 마타에몬의 이야기다. 당시 무사들은 자신이 모시던 영주가 사망하면 순사(殉死)함으로써 주군에 대한 충의와 슬픔을 입증했다. 마타에몬은 아버지 때부터 2대에 걸쳐 모셔온 영주 히다노카미의 죽음이 임박하자 자신도 할복할 때가 왔음을 인식한다. 히다노카미를 주군으로 모시면서 37년간 풍족하게 살아왔으니 이제 죽음으로 은혜를 갚을 때다. 마타에몬은 아들 이호지가 아직 어리다는 점과 병약한 아내를 두고 죽어야 하는 것이 염려스러웠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본다면 아들이 더 강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석 가로(영주의 중신으로 무사를 통솔하고 실무를 총괄하는 벼슬) 가지타니가 은밀히 마타에몬과 오노데라를 불러, 순사 금지령이 내려졌으며 만일 법을 어기면 자손들에게 불이익을 주겠다고 말하고 ‘죽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게 한 뒤 마타에몬의 삶은 분열된다. 살아남았지만 살아 있지 않은 삶이 된 것이다. 가지타니는 두 사람에게 이렇게 부탁한다.

    “(순사하지 않는다면) 비겁한 일, 겁쟁이가 하는 일, 은혜를 모르는 일이라는 비난을 받겠지요. 나는 그것을 제지하는 일에 큰 도움을 주지는 못하오. 그러므로 두 사람에게는 고통스런 긴 싸움이 되겠지요. 그러나 반드시 오명을 씻을 날이 올 것이오. …어떻소.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은 셈 치고 살아줄 수 없겠소?”

    죽음 대신 삶을 택함으로써 마타에몬은 모멸과 수치 속에 살아야 했다. 영주가 죽자 순사 금지령에 관계없이 줄줄이 순사 소식이 이어졌고, 마타에몬의 주위 사람이 하나둘 사라졌다. 그중에는 사위 마나베와 아들 이호지도 있었다. 마나베 집안은 순사를 거부한 겁쟁이 마타에몬 집안과 의절을 선언하고 딸과 손자도 마타에몬을 더는 찾아오지 않았다. 이호지는 순사하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할복했다. 함께 서약서를 썼던 오노데라는 단식 끝에 죽었다. 아내 사키마저 세상을 떠났다. 마타에몬은 그렇게 홀로 10년을 버텼다. 살아 있지만 죽은 삶, 죽은 셈 치고 사는 삶. ‘살다’는 무사 마타에몬을 통해 삶과 죽음의 모호한 경계를 징그러울 만큼 잘 묘사하고 있다.

    소설집 ‘살다’에는 표제작 ‘살다’ 외에도 딸을 유곽에 팔아넘길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 ‘평온한 모래톱’, 출세하기 위해 헤어진 여자와 23년 만에 우연히 재회하는 늙은 무사의 이야기를 다룬 ‘조매기’ 등이 함께 실려 있다. 소설 한 편 한 편이 ‘산다는 게 뭔가’ 하고 곱씹게 만든다. 저자 오토가와는 이렇게 말한다.

    “어리석다고까지 할 수 있는 올곧은 사람들, 정의와 인정과 인간의 존엄성과 같은 것이 확실히 존재하는, 유감스럽게도 현재의 삶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세계를 젊은이들에게 전하기 위해 나는 시대소설을 쓴다.”

    맹랑한 가르침과 노인의 철학

    김훈의 ‘강산무진’은 읽은 이가 훨씬 많을 것이므로 그 줄거리는 생략한다. 내게 책 읽기를 만류한 오십줄 선배의 말대로 철저히 아저씨들의 시선으로 쓴 책이다. 소규모 식품회사를 운영하다 망한 뒤 택시를 모는 남자(배웅), 뇌종양으로 죽어가는 아내를 간병하는 중년 남자(화장), 새로운 삶을 위해 뭍으로 나가는 40대 등대장과 한때 잘나가던 전자회사 상무였지만 회사 부도로 인해 모든 걸 정리하고 등대로 들어오는 50대 남자(항로표지), 의류 수출회사에 근무하다 간암 판정을 받고 죽음을 준비하는 50대 남자(강산무진). 중년의 자매가 주인공인 ‘언니의 폐경’을 빼고는 모두 남자가 주인공이다. 그것도 잘나가던 시절을 뒤로하고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자의 허무가 짙게 배어 있다. 김훈의 소설이야말로 인생의 끝을 준비하는 노인의 철학이다.

    남보다 빨리 성공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자기계발서를 읽는 20대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다. ‘나쁜 남자를 유혹하라’는 식의 맹랑한 가르침보다는 인생이 어떻게 무너져가는지 솔직하게 보여주는 쪽이 약이 된다고. 때로는 노인의 철학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고민하는 청춘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가 될 것이다. 그래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읽는 짬짬이 ‘살다’와 ‘강산무진’ 같은 아저씨 냄새가 물씬한 책도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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