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9월호

한국과 나

  • 가미야 다케시(神谷毅) / 일러스트·박진영

    입력2006-09-11 11: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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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과 나
    만으로 여섯 살이 된 딸은 잠꼬대를 한국말로 한다. 나는 가족을 이끌고 2005년 4월 서울에 부임했다. 한국을 피부로 느끼고 싶어해서 나와 아내는 딸을 일본인학교 부속유치원이 아닌, 동네에 있는 한국 유치원에 다니도록 했다. 이 시도는 요즘 들어 부쩍 딸의 일본어가 이상해지고 있으니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한반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게 언제쯤이었나. 돌아가신 아버지가 역사선생님인 덕분에 자연히 일본과 주변 국가의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초등학생 때 가족여행으로 오사카 지방의 나라현에 있는 절들을 돌아다녔는데, 불상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아이의 모습은 주위 사람들 눈에 조금 이상하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거기서 본 불상과 아버지가 보여주신 사진 속의 한국 불상이 너무나 비슷하게 생겨서 충격을 받았다. 그때의 일은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사람들 중에는 역사를 ‘로망’이라고 느끼는 사람과 엄연한 사실의 ‘연쇄’라고 느끼는 사람 두 부류가 있다. 나는 전형적인 전자이다. 나에게 한반도는 ‘고대(古代)를 품고 있는 도쿄(東京)’와도 같았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그런 식의 순진함만을 갖고 사는 것이 어려워졌다. 주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고나 할까. 재일교포 지인들을 통해 차별문제나 근대·현대의 역사 문제 등에 대해 자문을 구한 적도 있고, 내 눈으로 직접 역사의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수차례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기자가 됐다. 신입기자 시절 어느 선배기자로부터 “저널리스트는 시인이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을 들었다. 사람의 마음속에 숨기고 있는 기쁨이나 괴로움, 분노나 거짓말을 로망이나 감상으로 나타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가냘픈 나에게는 큰 충고였다.



    10년이 지났다. 다행히 희망이 이루어져 서울특파원으로 한반도 땅을 밟았다. 하지만 2005년 봄은 한일관계가 다케시마(한국명 독도)나 역사교과서 문제 등으로 다시 악화되던 시기였다.

    부임 후 한 달쯤 지났을 때 딸의 유치원에서 ‘민족 운동회’가 열렸다. 딸이 “선생님이 내일 입고 오라고 이것을 주셨어요”라며 보여준 것은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크게 프린트된 티셔츠였다. 딸은 그 티셔츠를 입고 운동회에 참가해 ‘독도는 우리땅’ 노래에 맞춰 친구들과 춤을 추었다. 딸은 노래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물론 이해할 수 있었더라도 양국의 영토분쟁을 깊게 생각할 수준까지는 안 됐겠지만) 즐거운 듯 보였다.

    그런 딸의 모습과 함께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유치원 선생님들이 “자, 더 활기차게 솜씨를 발휘해 춤추자!”라고 하면서 마치 스포츠라도 하는 것처럼 춤과 노래 지도를 하던 장면이다. 심각한 한일 갈등이 이런 무덤덤한 생활의 한 장면으로 이미 흡수돼 있어서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여기서 나는 영유권이나 역사인식 문제를 논할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가 생활에 기인하고 있는 한국과, 많은 국민이 섬(다케시마)의 위치조차 모르는 일본과의 인식 차이를 느끼면서 양국민이 논의하는 기반이 너무나 다르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라고 하기엔 아직 이르겠지만, 한일 간에는 ‘이런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돼서 감탄했던 일도 있다.

    “역시 마징가Z는 최고였다.”

    나와 같은 세대인 30대 중반 한국인 친구와 식사를 하면서 어릴 때 즐겨 본 TV 프로그램이 화제가 되자 그가 이런 말을 했다. 그는 애니메이션 ‘마징가Z’에 열중했다고 한다!

    “주제가가 어떤 거였지?”

    둘이서 흥얼거림과 동시에 크게 웃었다. 일본어와 한국말의 차이는 있어도 멜로디는 똑같았다. 그가 어릴 때 본 것은 일본 것을 직수입해 더빙한 애니메이션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는 여성에게도 물어보았다. ‘들장미 소녀 캔디’ ‘요술공주 세리’는 물론 그보다 더 큰 인기를 모았던 ‘미래소년 코난’이 방영되는 시간에는 길거리에 아이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나도 그맘때 텔레비전이 뚫어져라 보았던 것들이다. 외국인데도 어린 시절의 그리움까지 공유할 수 있는 나라는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밖에는 없다.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같은 역사 속에 살고 있다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러나 여기서 그 신문사 선배의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정부는 당시 일본 문화의 유입을 제한하고 있었지만, “애니메이션은 일본 대중문화라고 볼 수 없어서 무국적(無國籍)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당시에도 규제대상 외로 취급됐다”(문화관광부 담당자)고 한다. 옷(기모노·着物)이나 가옥 등 일본 분위기가 적나라하게 연출되는 장면이 있으면 한국 방송국에서 편집해 방영했다고 한다.

    우연히도 나와 이야기를 나눈 여성의 부친은 방송국의 성우로 활동하셨다고 한다. 애니메이션 ‘플란다스의 개’의 할아버지역을 맡은 분이셨다.

    “(극 중에서) 할아버지가 죽었을 때 ‘파파가 죽어버렸다’고 하면서 운 기억이 나요. 그건 유럽의 애니메이션인 거죠?”

    내가 “그것도 일본 게 맞다”라고 했더니 그녀는 말을 잃었다.

    ‘애니메이션 제작기술은 발달하지 못했지만 장사가 되니까 사면 된다’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사실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작품의 출처를 숨겼기 때문에 많은 어린이가 한국 애니메이션으로 알았다고 들었다. 어른들도 사실을 굳이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복잡한 대일(對日) 감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것이 애니메이션 분야만으로 끝나면 좋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한국에 와서 알았다. TV 프로그램 중에도 일본과 꼭 닮은 것이 있다. 편의점에 들어가면 일본 가루비사(社)의 ‘갓바에비(새우)센’과 꼭 닮은 ‘새우깡’이 진열돼 있고, 모리나가사(社)의 ‘하이추우’와 비슷한 한국 크라운제과의 ‘마이츄우’가 있다. 지난해 한국의 상표권소송재판에서 ‘하이추우’가 ‘마이츄우’에 졌을 때는 모리나가사를 대신해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의 ‘갓바에비센’이나 ‘하이추우’를 모르는 한국 분들에게 나의 이런 주장은 받아들여지기가 어려울 것 같다. 그렇다. 서로 ‘오리지널’을 모르면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것이다.

    대립의 고조는 ‘알고 있는 것’의 기반이 부족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경우가 많다. 서로를 아는 것만으로 ‘섬’ 문제나 ‘카피’ 문제가 100% 해결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대립의 격화(激化)는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한일관계 고시(考試)’의 모범답안이 될 수 있을까. 그럼 내가 우등생일까 하고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낙제생이다.

    독일월드컵. 일본은 첫 경기에서 히딩크 감독의 호주에 ‘아름답기까지 한’ 역전패를 당했다. 이때 한국에 거주하는 한 일본인 친구는 “아파트 위층에 사는 사람이 일부러 마루를 더 세게 밟아 소리가 울렸다”고 슬퍼했다.

    일본이 패한 다음날, 하필이면 이런 날 엘리베이터에서 알고 지내던 동아일보 기자분들을 만났다(아사히신문 서울지국 사무실은 동아일보 미디어센터 안에 있다).

    “아까웠지요?”

    “아직 16강으로 가는 길은 남아 있어요.”

    그들은 나를 위로해주었다. 물론, 당연히 본심인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분들의 입가에 부지불식간 희미한 미소가 번지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대표팀이 16강을 걸고 도전한 스위스전. 나는 서울시청 건물에서 기사와 함께 실을 사진촬영을 하면서 시합을 보았다. 슛이 골로 이어지지 않을 때마다 한국 사람들과 함께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리고 종료 휘슬. 허탈감이 밀려왔지만 어디에선가부터는 안도감도 조금 들었던 것 같다. 일본이 못 간 16강에 한국이 간다는 것,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순간 나는 잠시 동안 자기혐오에 빠졌다.

    나는 청국장을 무척 좋아한다. 술은 약하지만 폭탄주로 벌이는 ‘한일전’에는 질 수 없으니까 열심히 열심히 마신다. 팥빙수나 카레를 비벼 먹는 것을 보고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심경마저 느꼈는데 지금은 나도 가끔 비벼 먹는다(일본 사람은 안 비비고 그대로 먹습니다). 누군가 “한국 사람이 다 됐네요”라고 말하는 게 묘하게도 기쁘게 받아들여진다.

    그런데도 한일관계 문제에 있어 한국 분들로부터 이해하기 어려운 반응을 접했을 때는 또 하나의 나 자신이 얼굴을 내밀어 속으로 한국 비판을 시작한다. 그것이 ‘저널리스트’의 얼굴인지 ‘편협한 애국주의자’의 얼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국을 무비판적으로 좋아하고 로맨틱하게만 바라보는 ‘나’는 벌써 없어진 것만큼은 확실한 듯하다. 서울에서 나보다 더 오래 체류한 한 선배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한국을 정말 좋아한다’고 말해온 사람 중에 몇 년 후 한국이 싫어져서 돌아가버린 사람도 몇 명이나 보았다.”

    한국과 나
    가미야 다케시(神谷毅)

    1972년 일본 아이치(愛知)현 나고야(名古屋) 출생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 졸업

    ‘아사히신문’ 후쿠오카 본사, 도쿄 본사 경제부 국제부 근무

    동아일보사 화정재단 교환 근무

    現 ‘아사히신문’ 서울지국 특파원


    그러나 그들은 정말로 한국을 싫어하게 된 것일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정말 좋아하던 사람과는 오랜 연애(그 속에서 크고 작은 다툼이 있고) 끝에 결혼할 수 있을 테지만, 서로 싫어하는 부분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부부는 얼마 안 가 이혼하게 마련이다. 관계가 지속되는 비결은 서로 싫어하는 부분을 눈감아주든지, 아니면 철저하게 대화해 서로 고치면서 나가는 방법밖에 없다. 서로 좋아하기 때문에 싫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반대는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 나는 눈감을 생각이 없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나쁜 성격’을 유지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추신]

    지금 나는 어느 정도 한국을 알고 좋아하게 됐을까? 아무튼 나는 한국말로 꿈을 꾸는 경우가 가끔 있다. 딸처럼 잠꼬대를 한국말로 하지는 못하는 수준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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