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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스케치

기생(妓生)에 대한 오해와 진실

말 알아듣는 꽃(解語花) 대중문화 멀티 스타로 뜨다

  • 신현규 중앙대 교수·국문학 blog.naver.com/shglem

기생(妓生)에 대한 오해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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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 강점기는 우리 민족의 장구한 역사가 단절된 시기였다. 이로 인해 왜곡된 근대화 과정으로 정치·경제·문화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심각한 후유증이 남게 됐다. 이런 변화의 와중에 기생도 희생됐다. 우리는 기생에 대해 호감과 배척이라는 이율배반적 시각을 갖고 있다. 기생은 봉건시대의 유물로서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으나 실제로는 현대의 대중문화 스타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기생(妓生)에 대한 오해와 진실

1930년대 평양 기생학교 전경.

‘근대(近代)’라는 용어는 널리 사용되고 있고, 여러 곳에서 논의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개념 규정이나 내용에 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없다. 근대화는 ‘전근대적인 상태로부터 근대적인 상태로 이행하는 과정, 또는 후진적 상태에서 선진적 상태로 발전해가는 과정’으로 정의된다. 특히 ‘대중매체의 광범위한 보급’은 근대화의 척도 중 하나다.

근대화 과정에서 평양 기생 출신 왕수복(1917∼2003)은 대중스타로 변모했다. 주목할 만한 일이다. 왕수복이 태어난 시기는 3·1운동에 위협을 느낀 일제가 종래의 무단정치 대신 표면상으로는 문화정치를 표방하던 때였다. 일제는 서둘러 관제를 고치고 조선어 신문 발행을 허가하는 등 타협적 형태의 정치를 펴는 듯했으나, 내면으로는 민족 상층부를 회유하고 민족분열 통치를 강화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의 우리말 신문이 간행된 게 바로 이러한 문화정치의 산물이다.

왕수복은 12세에 평양 기성권번의 기생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 음반 대중 가수로 진출했다. 왕수복은 콜롬비아 레코드 회사에서 폴리돌 레코드로 소속을 옮겼는데, 폴리돌에 와서는 ‘유행가의 여왕’이 되고자 했다.

왕수복은 건장한 몸집에 목소리도 우렁차고 좋았다고 한다. 특히 평양 예기학교, 즉 기생학교를 졸업한 만큼 “그 넘김에는 과연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는 레코드 문예부장 왕평(王平)의 회고가 있다. 특히 본 성대가 아니라 순전히 만들어낸 소리로 부른 ‘고도의 정한’은 대중으로부터 열광적 환영을 받았다. 당시 가장 인기를 끈 조선 유행가였으며 음반 판매량에서도 최고를 기록했다. 왕수복이 세상이 알아주는 대가수가 되자 콜롬비아, 빅터 등 음반 회사들은 평양 기생 쟁탈전을 벌이기도 했다.

10대 가수 중 3명이 기생 출신

1930년대는 한국 음악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다. 대중음악이 등장한 전환기였고 그 획을 그은 이가 기생 왕수복이다. 송방송(宋方松)이 ‘한국근대음악사의 한 양상’에서 언급한 것처럼 현대 대중가요의 뿌리에 해당하는 유행가, 신민요, 신가요, 유행소곡 등과 같은 새로운 갈래의 노래들이 당시 작사자와 작곡가들에 의해 창작되어 불려졌다. 이 중 신민요(新民謠)는 성악의 한 갈래로서, 전통 민요와 유행가의 가교였다. 신민요의 등장은 근대화의 한 사례다. 전통적인 문화에 외래적인 문화가 더해진 문화적 종합화라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근대화 과정에서 봉건적 잔재인 ‘기생’이 근대의 표상으로 일컫는 대중문화의 ‘대중스타’가 된 것이다. 축음기의 보급은 대중음악의 탄생을 불렀으며, 기생은 그 음반 가요의 주요 소비자였다. 기생들은 음반을 들고 배운 노래를 술자리에서 불러 유행의 확산에 도움을 줬으므로 음반회사에서 보면 큰 고객이었다.

이는 음반회사가 기생 출신을 가수로 발탁하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기생 출신의 가수 왕수복, 선우일선, 김복희는 삼천리(1935년) 잡지가 선정한 10대 가수에 오른 5명의 여자 가수 중에 1, 2, 5위를 차지했다.

1937년 21세의 왕수복은 폴리돌 레코드 회사와 결별한 뒤 일본 우에노 도쿄음악학교에 진학했다. 조선민요를 세계화한다는 포부를 가지고 성악을 전공한다. 왕수복은 43세 때인 1959년 북한에서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고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왕수복의 일생에는 두 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한 사람은 ‘메밀꽃 필 무렵’ 작가 이효석이고, 또 한 사람은 한때 시인 노천명의 약혼자였던 김광진(金洸鎭)이다. 김광진은 북한에서 김정일에게 정치경제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왕수복은 이효석이 죽은 뒤인 1947년 열네 살 연상인 김광진과 결혼해 아들과 딸을 낳았다. 왕수복은 1973년 남편이 김일성 훈장을 받는 장면을 지켜보기도 했다. 왕수복은 1955년 7월 김일성과 처음 만난 뒤 그 다음 달에 열리는 소련 공연에 북한 대표로 발탁되면서 인생의 절정기를 구가하게 된다. ‘조선가요의 여신(女神)’이란 별칭까지 얻은 그는 1977년 환갑, 10년 뒤 칠순, 다시 10년 뒤 팔순에 김정일에게서 생일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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