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호

새 1만원권에 그려진 ‘일월오봉도’의 비밀

“태조 이성계 금척(金尺) 조형물인 마이산 석탑군 상징”

  • 최 홍 작가 deksuri-ch@hanmail.net

    입력2007-03-09 14: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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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월곤륜도’ ‘일월오악도’는 잘못된 명칭
    • 전북 진안에서 수백년 내려온 전설
    • 5개의 봉우리는 산이 아니다?
    • 이치에 맞지 않은 소나무 그림
    • 이성계가 장자를 ‘진안대군’으로 명명한 까닭
    새 1만원권에 그려진 ‘일월오봉도’의 비밀

    새 1만원권 지폐와 덕수궁 중화전에 있는 ‘일월오봉도’.

    새1만원권 지폐의 앞면 배경그림으로 삽입된 일월오봉도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이 그림은 왕권과 전혀 무관한 그림이라는 둥, 조선조 후기 때부터 사용된 것이라는 둥 섣부른 해석들도 나온다.

    이 일월오봉도가 조선왕조의 왕권을 상징하는 그림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다. 경복궁 근정전이나 덕수궁 중화전, 창덕궁 인정전에는 임금이 앉던 용상 뒤에 커다란 병풍 형태로 펼쳐져 있다. 또한 임금의 행차 때 어김없이 동행했으며, 사후 봉안된 어진(御眞)의 뒤에도 펼쳐져 있었다.

    이 그림에 대한 기록이 담긴 가장 오래된 문헌은 1688년의 ‘영정모사도감의궤(影幀模寫圖鑑儀軌)’이다. ‘…전내(殿內)에 (어진을) 봉안할 곳에 오봉산병풍(五峰山屛風) 등의 사물을 당연히 배설해야 하는데…’라는 내용이 있다. 어진을 봉안할 때 일월오봉도를 설치하는 게 관례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부 보도처럼 1688년을 일월오봉도가 처음 사용된 해로 보는 데는 문제가 있다.

    조선왕조의 묘사(廟祠)가 있는 전북 전주 경기전(慶畿殿)의 태조 이성계 어진 뒤에도 일월오봉도가 펼쳐져 있다. 경기전은 태종 10년(1410년)에 계림(경주), 평양 등과 함께 어용전(御容殿)이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어 태조의 어진을 모신 곳이다.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광해군 때 중건했으며, 현재 보존돼 있는 태조의 어진은 세종 때 그려진 것을 고종 때 고쳐 그린 것이다.

    수수께끼의 그림



    일월오봉도의 구도는 민화 형태의 그림들이 흔히 그렇듯 단순하며 좌우대칭을 이룬다. 짙은 청자색 하늘에 해와 달이 함께 떠 있고, 그 아래 바위들이 첩첩이 쌓인 5개의 산봉우리가 있으며, 봉우리 밑에는 물결 모양의 문양이 이어져 있고, 그 양쪽 언덕 위에는 소나무가 있다.

    흔히 산봉우리 아래는 동심반원형(同心半圓形)의 물결무늬가 연이어 있어서 바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나 이는 잘못이라고 본다. 이 그림은 전반적으로 짙은 색조를 사용하고 있지만 사물의 원색을 거의 살리고 있다. 따라서 유독 바다만 고동색으로 나타낼 리가 없다. 또 산봉우리의 밑 부분과 물결무늬 중간에는 희게 솟구치는 포말이 보이는데, 물결무늬가 바다라면 이와 같은 포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 포말은 별도로 처리된 데다 흰색으로 채색되어 있어 역시 고동색 물결무늬가 바다라는 해석과 맞지 않다. 이 물굽이는 일월오봉도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므로, 그에 대한 답은 해석을 전개해가는 과정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그런데 그림을 해석하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이제까지 이 그림은 ‘일월오악도’ 혹은 ‘일월곤륜도’ 등으로 불려왔는데 그러한 명칭들은 바뀌어야 한다.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간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이 그림이 일월곤륜도(日月崑崙圖)라고 되어 있다. 일월곤륜도가 왕실의 공식 명칭도 아니요, 단지 중국의 전설적인 곤륜산이 5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는 데서 차용한 이름에 불과한데 이 명칭을 그대로 사전에 올린 것이다.

    마이산 다섯 봉우리

    그러나 이 그림은 엄연히 우리 그림이며, 더구나 언제 어디서든 임금의 용상 뒤에 펼쳐진 조선왕실 최고의 상징 그림이다.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란 이름도 마찬가지다. 嶽이란 원래 岳과 같은 한자로, 큰 산 또는 크고 높은 산을 지칭한다. 설악산이나 월악산, 화악산 같은 큰 산에만 악자가 들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런 산들은 주변에 여러 산줄기를 거느리고 있다. 그래서 크고 높은 산이 된 것이지, 홀로 우뚝 솟은 산은 결코 큰 산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림의 산들은 긴 삼각형 형태로 나란히 솟아오른 다섯 개의 봉우리로만 이루어져 있는데도 일월오악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오악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명산인 오악(五嶽, 백두산·지리산·금강산·묘향산·삼각산)을 상징한다는 것도 근거가 없긴 매한가지다. 이렇듯 명칭부터 잘못되다보니 그림의 진정한 의미나 기원 등을 탐구하는 데 방해가 된다.

    전라북도 진안의 노인들은 일월오봉도를 진안의 마이산(馬耳山)을 형상화한 그림으로 알고 있다. 이 그림이 어떻게 마이산을 나타내고 있는지, 왜 마이산을 형상화한 그림이 그토록 중요한 위상을 갖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그저 전해오는 설에 따라 그렇게 알고 있다.

    먼저 그림에 대한 전반적인 해석에 들어가보자. 해석을 위한 그림은 덕수궁 중화전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을 택했다. 일월오봉도는 모두 규격과 형식이 통일되어 있다지만 조금씩 다르다. 중화전에 있는 그림은 조선 말 고종이 덕수궁에 거처했기 때문에 가장 원형에 가까운 그림이라고 생각된다. 고종은 기우는 국운을 바로잡기 위한 방편으로 왕실의 뿌리와 전통을 찾고 이를 되살리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일월오봉도에서 중요한 위상을 점하는 것은 5개의 산봉우리다. 봉우리들은 화면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이 산들을 유심히 보면 전통 회화에서 보던 산과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우리가 익히 봐온 산들은 능선이 섬세한 필치로 윤곽만 묘사되어 있다. 그나마도 봉우리 부분만 묘사되고 아랫부분은 안개나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산은 대부분 대지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추상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됐다. 민화의 산들도 마찬가지다.

    왕권의 표상

    그런데 이 그림의 산들은 마치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전체 모습이 드러나 있을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첩첩이 쌓인 바위들까지 묘사되어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산의 형태를 띠면서도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우리 전통 회화에서 바위가 등장하는 산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위는 산의 봉우리 부근에서 마치 산의 위용을 드러내는 듯한 관(冠)의 형태로 그려져 있는 게 보통이다. 이 그림처럼 전체가 바윗돌로만 묘사된 산은 어느 그림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 봉우리들이 산이 아니라는 증거는 그림의 양쪽 가장자리에서 대칭을 이루는 소나무로도 알 수 있다. 이 소나무들은 전체적인 면에서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 해, 달, 산봉우리, 대지 등을 소재로 한 그림에 걸맞게 소나무를 그리려면 아주 작고 가냘프게, 그야말로 눈에 띄기 힘들 정도로 작게 그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격에 맞지 않게 커다랗게 그려진 데다 양쪽에서 봉우리 하나씩을 가리고 있다. 이 그림은 왕실의 최고 상징물인 만큼 당대 최고의 화가가 그렸을 텐데 왜 이처럼 이치에 맞지 않게 그려졌을까.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일월오봉도의 5개 봉우리는 산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고 추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산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왜 이처럼 봉우리들을 바윗돌이 첩첩이 쌓인 형태로 묘사했을까.

    일월오봉도를 다시 정의해보자. 임금이 거하는 곳이면 어디에나 동반했고, 사후 봉안된 어진의 뒤에도 펼쳐졌던 왕권의 표상이자 가장 중요한 정치 상징물이었다. 왜 조선시대 임금들은 이 그림을 그처럼 소중하게 여겼을까. 소재가 특이한 것도 아니고 예술적으로 뛰어난 그림도 아닌데 왕실에서 그처럼 외경시했던 건 왜일까. 바로 그림의 상징성 때문이다.

    언뜻 보면 음양오행을 나타내는 그림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하늘에 떠 있는 선명한 해와 달, 그리고 5개의 봉우리가 그러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더구나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여서 음양오행설이 사상과 사회 전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이산 석탑군

    그러나 음양오행설만으로는 그림의 다른 부분, 즉 물결무늬나 소나무 등을 풀이하지 못한다. 또한 포괄적인 개념이어서 왜 조선의 임금들이 이 그림을 그처럼 소중하게 여겼는지에 대한 답이 되기에도 부족하다. 앞에서 그림 속의 5개 봉우리는 산이 아니라는 것을 밝힌 바 있다. 비록 산봉우리 형태를 취하고는 있지만 실질적인 산봉우리 기본 요건도 갖추고 있지 않다. 이 봉우리들은 과연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이 진안의 마이산에 있는 듯하다.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만 쌓인 5기의 원추형 석탑과 수십기의 외줄탑으로 이루어진 석탑군(群). 그림의 산봉우리들은 바로 마이산 석탑군 중 5기의 원추형 석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새 1만원권에 그려진 ‘일월오봉도’의 비밀

    전북 진안 마이산의 석탑군.

    그 증거로 들 수 있는 것이 봉우리가 모두 바윗돌로 첩첩이 쌓여 이뤄져 있다는 점이다. 하나 둘도 아니고 5개의 봉우리 모두 이처럼 묘사한 데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봉우리 주변에는 나무 한 그루, 새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어 흔한 언덕배기 같은 것을 묘사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마이산에 있는 탑과는 달리 그림 속 봉우리의 끝부분에 외줄탑이 없는 것은, 이 외줄탑들이 원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외줄탑은 후에 쌓은 것이다. 그리고 그림에서 가운데 봉우리가 유달리 크고 나머지 봉우리들은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배치는 그림의 구도와 균형을 위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45개의 물결무늬

    필자는 아래쪽에 줄지어 늘어선 물결무늬가 뜻하는 바를 발견하게 된 뒤 이를 더욱 확신하게 됐다. 여러 일월오봉도를 거듭 검토한 끝에 필자는 물결무늬가 모두 45개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으나, 45라는 숫자가 무엇을 나타내는지 풀 수 없었다. 우리 선조들은 그림이나 공예품 등에서 숫자를 아무 의미 없이 배치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45라는 숫자도 분명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봤다. 마침내 나름대로 이 무늬에 대한 해답을 발견했을 때 일월오봉도의 전반적 해석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됐다.

    앞에서 이 무늬가 바다의 물결을 나타내는 것이 아님은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대지를 의미할 가능성이 높은데, 희한하게도 진안의 옛 지명은 월랑(月浪 혹은 越浪)이었다. 현재도 진안의 대표적인 경관을 ‘월랑팔경(八景)’으로 부르는 등 주민들은 여전히 월랑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따라서 고동색 물결무늬가 월랑이라고도 불린 진안의 대지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은 충분히 해봄직하다. 위치상으로도 대지에 속할 뿐 아니라 무늬가 랑(浪)이라는 한자와 묘하게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 문헌들을 뒤적인 결과 이 월랑은 원래 월량(月良)에서 비롯된 데다가, 이 해석으로는 45라는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낼 수 없었다.

    필자는 심사숙고 끝에 이 물결무늬가 석탑군의 외줄탑들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추측하게 됐다. 졸저 ‘마이산 석탑군의 비밀’에서 마이산의 석탑군이 우리 민족에게 천권(天權)의 상징이던 금척(金尺)의 조형물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금척은 이성계가 꿈속에서 하늘의 신인으로부터 조선 건국에 대한 천명의 계시로 받았다는 사물이다. 그러면서 외줄탑들이 나타내는 것은 우리 민족 최고의 경전인 천부경(天符經)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금척은 천부경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부경은 1에서 9까지의 숫자로 이뤄져 있다. 1에서 9까지의 합은 45이므로 천부경을 외줄탑으로 모두 나타내는 데는 45개의 탑이 필요하다. 물론 석탑군의 실제 탑의 수를 45로 보긴 어렵다. 하나의 외줄탑을 양효(陽爻)로 삼아 대신 음효(陰爻)에 해당하는 작은 2개의 탑을 배치하고, ‘生 7, 8, 9’의 항목에서 9개의 탑으로 7, 8, 9를 동시에 나타내는 운영의 묘를 기했기 때문. 그러나 원래의 탑 개수는 45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림에서 각 물결무늬의, 이른바 동심반원형의 여러 무늬가 의미하는 것은 외줄탑의 돌들이 쌓인 상태를 나타내려는 게 아니었을까. 그저 물결 형상만 나타내려 했다면 구태여 이처럼 다중적인 무늬를 사용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이 동심반원형 무늬는 5개 봉우리의 바윗돌 형상과 같이 그림의 비밀을 간직한 또 하나의 중요한 실마리다.

    금강과 섬진강의 근원

    그렇다면 그림의 해와 달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해와 달은 그동안 우리 고대의 사고방식에 흔히 등장하는 문자 그대로 일월(日月)로 풀이하기도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왕과 왕비로 풀이하기도 했다. 음양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하는 추측도 언급한 바 있다.

    연장선상에서 생각한다면 이 해와 달은 마이산의 두 봉우리, 즉 암마이봉과 수마이봉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싶다. 흔히 해와 달은 음양을 상징하는 표본으로 여겨지는데, 암마이봉과 수마이봉이 음양을 상징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위치도 닮아 있다. 석탑군을 기준으로 암마이봉은 달이 있는 왼쪽에, 수마이봉은 해가 있는 오른쪽에 있다.

    암·수마이봉이 만나는 지점을 천왕문(天王門)이라는 이름 외에 일월문(日月門)이라고 하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림의 남은 요소들에 대해서도 해석해보기로 하자. 먼저 5개의 봉우리 양쪽에는 각각 폭포가 있고, 아래쪽에는 폭포에서 떨어진 물이 포말을 이루고 있다. 이 그림은 단지 구도상의 필요에 의해서 삽입된 것일까.

    실제로 마이산 석탑군 내에는 물줄기가 흐르고 있다. 예전에는 물줄기가 더 많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도 물줄기들은 석탑군 내에서 발원해 흘러내린다. 좀더 차원 높은 해석도 있을 수 있다. 한반도 중남부를 적시는 금강과 섬진강의 발원지는 최근까지 마이산이라고 알려져 왔다. 정밀 조사한 결과 금강의 발원지는 인근 장수읍의 신무산, 섬진강의 발원지는 진안군 백운면에 위치한 팔공산으로 밝혀졌다. 이 두 물줄기가 마이산을 지나면서 수계(水系)가 나뉜다는 게 밝혀졌으나 현지 주민들은 지금도 금강은 마이산 북쪽에서, 섬진강은 마이산 남쪽에서 발원한다고 믿고 있다. 그림의 두 폭포는 이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림에서 유일한 생물체라 할 수 있는, 양쪽 가장자리의 소나무는 무엇을 의미할까. 이 소나무들은 그림 전체와 균형을 이루지 못할 뿐 아니라 양쪽에서 대칭을 이루고 있어 전통 회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나무들이 아니다. 그림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서, 또는 십장생(十長生) 중의 하나로 그려진 것은 아님을 짐작케 한다. 이 소나무들은 석탑군이 소나무숲 속에 있었음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얘기가 있다. 마이산의 석탑들이 있는 자리는 1900년대까지만 해도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는 증언이다. 지금은 고인이 됐거나, 현재도 생존해 있는 진안의 고로(古老)들은 자신들이 어릴 때만 해도 석탑군 자리에는 대낮에도 캄캄할 정도로 숲이 우거져 사람들이 접근하기를 꺼렸다고 한다. 현재도 마이산 지역의 우점종(優占種)을 이루는 식물군은 소나무다.

    진안의 마이산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자취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마이산이 조선의 건국과 상당한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계는 자신의 아호를 ‘송헌(松軒)’이라 했다. 송헌이란 소나무 집을 의미하는데, 새로운 왕조를 창업까지 한 임금의 호로서는 매우 평범해서 혹시 석탑군이 있던 소나무숲에서 비롯된 호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금척의 상징화

    이 같은 해석에 따르면 일월오봉도는 마이산과 석탑군을 나타내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금척을 상징하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이산 석탑군이 금척의 조형물로 여겨지므로 그 석탑을 소재로 한 그림은 바로 금척의 상징화인 것이다.

    전해지는 얘기에 의하면 이성계는 꿈속에서 받았던 대로 금척의 모형을 만들어 거기에 ‘천사금척 수명지상(天賜金尺受命之祥)’이라 새겼다고 한다. 그러나 금척 관련 사물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이 그림은 금척의 또 다른 상징물이며, 임금이 거리상 마이산의 석탑군을 가까이 할 수 없기에 그림으로 형상화해 늘 곁에 두지 않았을까.

    새 1만원권에 그려진 ‘일월오봉도’의 비밀
    최 홍

    1953년 전북 남원 출생

    전북대 법대, 서울대 환경대학원 수료

    한국소설가협회, 한국문인협회 회원

    작품 : ‘마이산 석탑군의 비밀’ ‘천년의 비밀 운주사’ ‘베팅 999’


    왕과 왕비, 그리고 만백성을 상징하는 듯한 장중한 그림을 한낱 시골구석의 마이산과 석탑들에 연관시키려는 주장을 엉뚱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가 진안과 마이산에 대해 갖고 있는 중량과 상징성을 생각해본다면 결코 그럴 일이 아니다. 이성계가 자신의 장자를 ‘진안대군(鎭安大君)’으로 명명했던 사실을 봐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그림의 무게와 권위는 상당 부분 그 규모, 그리고 보색을 이루는 선명한 색채에 기인하고 있음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또한 이 그림이 임금의 통치권을 나타낸다는 것도 단지 늘 임금의 곁에 두었다는 사실에 따른 평범한 해석에 불과하다. 그러기에는 그림의 분위기가 너무도 적막하고, 양쪽의 소나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하기가 난감하다.

    일월오봉도는 조선왕조 왕권의 표상이자 임금과 거취를 함께했던 그림이면서도 명칭이라든지, 화가가 누구였는지, 어떤 내용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일절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왕실에서 의도적으로 숨겼기 때문이라는 해석 외에는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을 것 같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림에 왕조의 비밀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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