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호

애매한 정(情) 때문에, 봉투와 사과박스 때문에…

  • 타릭 후세인 경제칼럼니스트 tariq@diamond-dilemma.com

    입력2007-05-03 17: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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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투명하게 일을 처리하자’는 말처럼 많이 들어본 말도 없다. 지겹게 들었지만 정작 현실에선 불투명한 것이 대접받는다. 그렇지 않다면 왜 재벌그룹이 관료들을 고위임원으로 스카우트하는 사례가 늘겠는가. 왜 음성적인 거래가 판을 치겠는가. 왜 숱한 술자리가 회사 근처에서 벌어지고 있겠는가. 관계 중심의 한국 사회는 영영 투명한 사회가 될 수 없는가.
    애매한  정(情)  때문에, 봉투와 사과박스  때문에…
    투명성에 대한 요구는 환경 문제와 함께 1970년대부터 끊임없이 제기된 이슈다.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자주 논의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건강한 기업과 국가 경제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투명성 제고의 필요성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세계가 더욱 글로벌화함에 따라 글로벌 스탠더드는 어느 때보다 높은 수준의 투명성을 요구한다. 이와 함께 국민의 시선도 예전과 비교해 훨씬 더 날카롭다.

    한국 사회에서 투명성은 중요한 이슈다. 인터넷의 발달과 개방 경제의 도래는 지난 십수년 동안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바꾸어놓았다. 하지만 한국은 세계적인 인터넷 강국의 이미지에도 지배구조의 투명성 관점에서는 여전히 후진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독일 대표기업 지멘스까지!

    초기 환경론자들처럼, 1970~80년대 투명성 제고를 부르짖던 사람들은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투명성 이슈를 제기하면 조직에서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세계은행의 임원이던 피터 아이겐은 부정부패가 얼마나 심각한 폐단을 발생시킬 수 있는지 절절히 경험하면서 이를 바로잡으려 노력했다.

    그는 1993년 많은 사람의 냉소와 반대에도 부정부패를 방지하고 범세계적인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한 공익단체 ‘세계투명성기구’를 설립했다. 그가 개발한 글로벌 부패지수(Global corruption index)는 오늘날 163개국에서 널리 활용된다. 또 세계은행은 이런 노력 덕분에 부패 척결을 위해 ‘투명성 강화를 위한 범세계적 협약’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기업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분식(粉飾)회계와 부정부패 문제는 미국 엔론 사태를 계기로 2001년부터 꾸준히 제기됐다. 유럽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팔마라트(Parmalat)가 그중 심각한 사례라고 할 수 있으며, 독일의 존경받는 기업 지멘스도 최근 뇌물수수 사건으로 도덕성이 크게 훼손된 바 있다.

    독일의 유력 일간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기업 경영진의 도덕성에 대한 이슈를 심각하게 제기했는데, 신랄한 논평은 이렇게 시작된다.

    “기업의 최고 경영진은 정치인보다 국민에게 더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부패한 그들은 숨을 곳이 없으며, 잘못에 대해 명백하게 설명할 의무가 있다.

    그들은 스스로 도덕성과 투명성을 견지할 때만이 종업원들이 따를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투명성이야말로 기업의 이윤 극대화를 달성하기 위한 핵심 중의 핵심이다.”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법규나 제도를 강화하기도 해야 하지만 경영진이 기업, 나아가 사회 전체의 발전을 위해 수준 높은 도덕적 기준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은 최근 몇 년간 투명성을 높이는 노력을 기울였다. 외환위기 이후 회계 기준과 관행이 엄격하게 재정립됐고, 새로운 법규와 제도가 도입됐다. 내년부터는 집단소송제도 도입한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기업이사회 구성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1997년만 해도 삼성전자에는 59명의 이사가 있었지만 독립적 지위를 확보한 이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비록 이사진은 13명으로 줄었지만 대부분 사외이사들로 구성돼 있다. 경영 공시는 더욱 투명해졌으며, 주주총회에서 사회단체의 참여가 활발해졌다.

    애매한  정(情)  때문에, 봉투와 사과박스  때문에…

    미국 엔론사의 회계부정 사건에서 최고경영자는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투명성 이슈가 크게 부각됐다.

    기업의 부회장과 CEO를 포함한 기업 경영진이 지배구조 개선을 외치는 사회단체 대표들과 3시간이 넘도록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심지어 장하성 고려대 경영대학장과 윤종용 대표를 포함한 삼성전자 경영진이 13시간이 넘는 논쟁을 벌인 적도 있다.

    “우리가 남이가?”

    이러한 변화와 발전에도 아직 한국의 재벌그룹은 여전히 눈앞에 닥친 변화의 물결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도 재벌들이 고수하는 현재의 지배구조가 필요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투명성 제고가 오히려 기업의 경쟁력과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기업이 투명성을 높이면 어떤 혜택을 보는지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계속된다. 분명한 사실은 기업의 투명성이 기업가치 제고에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점이다. 이는 장하성 교수의 연구에서도 밝혀진 바 있다. 그는 한국의 상장기업 지배구조를 분석한 결과, 지배구조를 10% 개선할 경우 22%의 주가 상승을 가져올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 같은 혜택을 보자면 법규나 제도의 준수를 넘어 경영진은 투명성이 실제로 기업 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기존의 사고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이 요구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이란 어떤 것을 말할까. 재벌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된 문제를 살펴보자. 일각에서는 재벌 2세가 경영권을 승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만일 재벌 2세의 역량이 출중하며, 투명하고 공정한 CEO 선임 절차로 검증됐다면 오히려 그것이 올바른 선택이 될 수 있다. 이를 통해 현재의 왜곡된 재벌의 지배구조를 개선할 수 있다.

    아직 대부분의 재벌기업에선 이러한 검증 절차를 제대로 마련하지 않고 있다. 전통적인 한국적 정서에서 장남이 경영권을 물려받는 것이 관례처럼 굳어져 있지만, 글로벌 관점에선 그렇게 보지 않는다. 만일 예전의 관습을 고수한다면 재벌그룹은 물론 한국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이 적지 않다.

    투명성 이야기를 꺼내면 상당수 한국인은 한국의 문화적 특성에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투명성이란 씨앗을 한국에 심는 것 자체가 적합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들은 이른바 ‘정(情)’이라는 개념을 내세우는데, 이것이 전형적인 한국인의 미(美)이자 특성이라고 말한다.

    정을 영어로 정확하게 번역하기란 쉽지 않다. 번역하고 나서도 미묘한 의미 차이가 느껴진다. 한영사전에선 ‘정’을 ‘감정’ 또는 ‘느낌’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정이 많다’는 표현을 이런 식으로 번역하면 ‘감정이 많다’는 뜻이 돼버린다. 제대로 된 번역이 아니다.

    흰 봉투에 거액의 돈이…

    나의 한국인 동료 한 사람은 정이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렇듯 애매한 개념이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다수 한국인은 기업 경영 자체가 ‘관계’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며, 이러한 ‘관계’라는 것이 결국 ‘정’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내 생각에 정은 한국 사회에 두 가지 관점에서 중대한 이슈를 제기한다. 첫째, 정의 중요성을 믿는 사람은 투명성을 제고하는 것이 상호간의 관계 형성을 가로막는 요인이라고 간주한다. 예컨대 한국인은 비즈니스를 하면서 계약을 문서로 작성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문서를 주고받는 것은 서로 믿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것쯤으로 인식한다. 물론 이 같은 주장을 공감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모든 사안을 문서로 정리하는 것은 추후 발생할 잡음을 사전에 차단하는 길이다. 이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더욱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대충 대충’ 하고 ‘알아서 하겠지’ 하는 지레짐작은 나중에 커다란 문제를 일으킨다. 단순히 실망하는 것뿐 아니라 서로간의 관계를 악화시키기도 한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시대가 변했다. 사업은 더욱 복잡해지고, 상호작용이 빈번해졌다. 과거의 파트너와 함께 일하면서 학연이나 지연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면 지금은 전혀 끈이 닿지 않는 사람과도 신뢰를 쌓고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일해야 한다.

    사업상 맺은 인맥으로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도덕성도 있어야 한다. 사업 파트너와 사적인 친분은 가지더라도 일할 때는 정직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이 두 가지를 혼동하고 구별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애매한  정(情)  때문에, 봉투와 사과박스  때문에…

    한국의 투명성이 향상됐다고 하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아직도 후미로 처져 있다.

    서구에서 투명성이란 개념은 진화를 거듭했다. 최근엔 기업 환경 및 지배구조를 투명하게 하려는 시스템이 도입되고 있다. 사람들은 투명성이야말로 인류가 추구해야 할 가치이며 장기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슈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긍정적 변화가 한국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한국적 정서를 핑계로 만들어진 관습과 사고방식은 바뀌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오랜 시간을 들여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몇 년 전 기업 컨설턴트로 일할 때 한국 기업들을 대상으로 우수 기업을 선정하기 위한 경영평가 작업을 수행한 적이 있다. 우리는 평가 기준과 프로세스를 구축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보냈고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벌어져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신뢰와 경제발전의 상관관계

    일례로 우리가 인터뷰한 모 기업의 임원이 당시 프로젝트 리더에게 봉투를 하나 건넸는데, 놀랍게도 그 안에는 꽤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그 봉투를 바로 돌려보냈지만 평가 작업 첫해에 겪은 그 일은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이듬해엔 몇몇 기업이 우리에게 값비싼 도자기를 선물로 보내줬는데, 이 또한 돌려보냈다. 적어도 돈봉투는 아니었다는 게 변화라면 변화였다. 그 다음해엔 우리에게 주는 선물의 숫자가 현격히 줄었지만 여전히 몇몇 기업은 시시때때로 선물을 보냈다. 그중 한 기업은 제법 비싼 지갑과 벨트를 주면서 “모든 방문객에게 주는 선물이니 사양하지 말라”고 했지만 우리는 거절했다.

    4년째 되던 해에 우리는 어떠한 선물도 받지 않겠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밝혔지만 일부 기업인은 비싼 저녁을 사주기도 했다. 까짓 저녁쯤이야 사소한 대접으로 간주할 수 있겠지만 우린 이것조차 불편했다. 그 의도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 덕분에 우린 5년째부터 어떤 선물이나 식사 대접도 받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는 매우 투명하고 공정하게 작업을 진행했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고착된 관습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달았다.

    한국 사회에선 아직도 자식을 잘 부탁한다면서 건네는 학부모의 ‘촌지’를 포함해 대형 로비사건에 이르기까지 돈봉투 혹은 ‘사과 박스’가 비일비재하게 오간다. 이를 뿌리째 뽑기 위한 가장 효과적이고 유일한 방법은 ‘예외 없는 처벌’이다. 확고하고 예외 없는 기준이 수립되면 결국 사람들이 바뀐다. 음성적인 거래를 차단하면 사람들은 본연의 작업과 임무에만 정신을 집중할 수 있다.

    또 하나 얻을 수 있는 중요한 효과는 모든 사람이 반칙이 없는 공정하고 투명한 프로세스를 기대한다는 점이다. 프로세스 자체의 신뢰성을 높일 수 있고, 평가 결과에 대해서도 사회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공정한 과정 자체가 사회를 바꾸는 힘이 되는 것이다.

    공정하고 투명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외환위기 이후 10년간 끊임없이 제기된 구태의연하고 한물간 이슈로 치부할지 모르나, 아직까지 주목할 만한 변화와 발전이 없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투명성을 높이는 것은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한 출발점이며 지배구조의 도덕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원동력이다. 또 투명성은 신뢰의 밑거름이 되며 이를 바탕으로 경제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미국의 경제학자인 폴 작과 스티븐 넥은 신뢰와 경제 발전 사이의 정(+)적인 상관관계를 규명하고 증명한 바 있다. 이들에 따르면 전반적인 신뢰 수준을 15% 향상시킴으로써 약 1%의 경제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신뢰 수준이 가장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경제 발전을 달성한 나라들이다.

    지금, 당장!

    하지만 한국은 대부분의 연구 결과에서 여전히 후진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았던 경제 발전 기간과 강한 혈연, 지연으로 묶인 사회, 문화적 특성에 그 책임을 돌릴 수 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한국에 투명성 문제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는 것이다. 신뢰 수준을 높이기 위해 투명성을 제고하는 것은 한국의 인터넷 발전 속도만큼이나 빠르고 신속하게 사람들의 생활 속에 침투해야 한다.

    애매한  정(情)  때문에, 봉투와 사과박스  때문에…
    타릭 후세인

    독일 출생

    영국 런던정경대 경영학과 졸업, 케임브리지대 경제학 석사

    부즈앨런해밀턴 한국사무소 이사

    現 Maxmakers 한국대표

    저서 : ‘다이아몬드 딜레마’

    수상 : 2006 Global Korea Award


    한국의 투명성 지수는 2001년 4.2에서 2006년 5.1로 크게 향상됐다. 하지만 ‘글로벌 맵’(그림 참조)을 살펴보면, 세계적으로 투명성이 가장 높은 국가들(심지어는 아프리카의 보츠와나와 같은 개발도상국가도 있다)과 비교해 크게 뒤처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투명성을 글로벌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만이 한국인 사이의 신뢰를 회복시키고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 길이다. 이뿐만 아니라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고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 경제 발전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이기도 하다.

    한국은 지금, 바로, 당장 투명성을 위한 근본적인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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