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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의 가을

  • 일러스트·박진영

여의도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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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의 가을
지구온난화 때문인가. 입추는 물론 처서가 지나도록 후텁지근한 날씨가 미혼의 밤을 약탈하곤 하더니 이젠 아침저녁으로 제법 싸늘한 기운이 찾아든다. 하지만 열대야로 늦은 시각까지 몸이 숨막혀 할 때도 우리 머릿속에는 가을이 이미 성큼 다가와 있었다. 머릿속 가을이 몸속 가을보다 앞선다는 사실. 이 ‘가을 딜레마’ 때문에 우리는 가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증권회사를 비롯한 금융기관들이 밀집해 있는 ‘금융의 메카’ 여의도. 여의도에도 가을은 어김없이 그 자리를 틀고 있다. 여의도의 가을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속삭임으로 우리에게 다가서고 있는 걸까.

오래전 여의도에 터를 잡은 이들은 여의도공원을 경계로 여의도를 동여의도와 서여의도로 나눈다. 증권사가 들어찬 동여의도와 국회가 있는 서여의도의 묘한 대칭, ‘정치와 금융’은 여의도를 대변하는 키워드다. 누군가는 밤늦은 술자리에서 여의도를 이렇게 풀어냈다.

“국회가 있는 서여의도와 돈 냄새 물씬 풍기는 동여의도. 정치와 금융이 아우러진 여의도를 관통하는 진실은 ‘공(空)’이다. 정치도 돈도 영원불멸할 수 없고 덧없이 사라짐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 더 치열할 수 있다.”

그분 넋두리를 뒤로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등 인생무상 타령에 취기가 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치열할 것 같은 여의도에서 ‘덧없음’을 얘기하는 것이 언뜻 어쭙잖아 보이지만, ‘덧없음’을 깨달을 때 더욱 치열할 수 있다는 역설.

2007년의 여의도도 이 ‘덧없음’을 깨달았는지, 동서 양쪽 모두 치열한 한 해를 보내고 있다. 서쪽 여의도는 국가의 수장(首長)을 뽑기 위한 이슈로, 동쪽 여의도는 사상 최고로 잘나가고 있는 증권시장 이슈로 뜨겁다.

서여의도 대오 가운데 한쪽은 이미 전열을 가다듬고 대운하에 배를 띄운 상황이며, 다른 한쪽은 여전히 ‘열린’ 채 우두머리 뽑기에 분주하다. 동쪽 일에 바빠 서쪽 사정엔 어두운지라 시시콜콜 서쪽 일을 써내려갈 순 없지만 ‘여의도인’으로서 서쪽에 대한 바람을 담아보자.

여의도의 가을, 서쪽은 약속을 하느라 분주하다. 대한민국 영토에 세로로 골을 내겠다는 약속에서부터 공수부대를 동원해 멧돼지를 잡겠다는 약속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 퍼포먼스형 약속이 난무한다. 하지만 ‘하겠다’는 약속을 과연 ‘했는가’를 추궁하는 것도 이젠 식상하다. 불필요하고 실익 없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하나의 퍼포먼스가 될 수 있다는 사고의 전환이 아쉽다. 노자 도덕경에서는 ‘위무위(爲無爲), 즉무불치(則無不治)’란 말로 이를 강조하지 않았던가. 하지 않으면 다스리지 못할 게 없는 것이다.

잠깐 샛길로 빠져보면, ‘하지 않음’의 미덕이 필요한 곳은 비단 여의도 서쪽 동네뿐만이 아니다. 특정 조직의 경쟁구도 속에서 개별 경쟁자는 ‘하겠다’는 공약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실적을 토대로 객관적 평가가 가능한 민간기업보다 수치화할 수 없는 행적으로 평가받는 정부기관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행적 경쟁구도에서 벌이는, ‘하지 않음’보다 ‘하겠다’는 퍼포먼스가 쓸데없는 제도와 규제를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여의도 얘기로 넘어오자. 서여의도가 약속하는 데 골몰해 있는 동안 동여의도에서는 종합주가지수(KOSPI) 2000포인트 돌파라는 경사가 있었다. 수십년간 횡보하던 지수대를 지난 여름 뻥 뚫어버림으로써 대한민국 증시의 새 역사를 쓴 것이다. 하지만 뒤늦게 스톡 러시(Stock Rush)에 동참한 이들이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사태로 예기치 않은 소나기에 흠뻑 젖어야 했던 것도 2007년 여름날의 기억이다.

가을로 접어들어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과 부시 대통령이 증시 받치기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덕분에 현재로선 지수가 반등해 증시가 안정세를 보이고 있지만, 이 글이 실린 ‘신동아’가 발간되는 시점에는 또 어떤 변화를 겪게 될지 누구도 모를 일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최근의 지수 상승이 금융시장 패러다임의 전환 과정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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