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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출판계와 ‘승자의 저주’

  • 김현미 동아일보 출판팀장 khmzip@donga.com

2007년 출판계와 ‘승자의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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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출판계와 ‘승자의 저주’

‘승자의 저주: 경제현상의 패러독스와 행동경제학’ 리처드 H. 세일러 지음, 최정규·하승아 옮김, 이음

경제학에 ‘승자의 저주’(승자가 내리는 저주가 아니라 승자에게 내려지는 저주를 가리킴)라는 말이 있다. 케이펜, 클랩, 캠벨 3명의 기술자가 1971년에 발표한 논문에 처음 등장한 개념이라고 한다. 여러 석유회사가 어떤 지역에서 석유 시추권을 따내기 위해 경쟁을 벌인다고 가정하자. 경매에 참여하는 각 기업은 시추권의 가치(원유 매장량)를 추정한 뒤 입찰가격을 제시할 것이다. 이때 시추권의 가치를 가장 높게 평가한 기업이 가장 높은 입찰가격을 제시해 경매에서 이긴다.

그러나 경매의 승자가 실제로 패배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승자는 다음 중 하나의 방식으로 저주를 받는다. 첫째, 경매에서 너무 높은 금액을 부르는 바람에 시추권의 실제 가치보다 많은 돈을 들여 금전적 손실을 입는다. 둘째, 운 좋게 실제 가치보다 낮은 가격으로 시추권을 따냈더라도 이후 실제 얻은 이윤의 크기가 처음 예상한 것에 미치지 못해 실망한다.

입찰자가 많은 경매에선 이기기 위해 공세적인 입찰가격을 제시하게 되는데, 이는 곧 입찰 대상의 가치를 과대평가했다는 의미다. 손실을 줄이려면 수위를 조절해 입찰가격을 제시할 필요가 있는데, 그러면 입찰에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딜레마에서 많은 사람이 ‘승자의 저주’라는 덫에 걸려든다.

이기고도 실패하는 이유

‘승자의 저주’를 쓴 시카고대 리처드 H. 세일러 교수는 심리학과 경제학을 융합한 ‘행동경제학’의 이론적 틀을 마련했다. 그는 경제주체의 합리성과 이기성을 기본으로 한 기존 경제이론에서 ‘승자의 저주’는 이상(異常)현상이라고 했다. 합리적 입찰 이론에 따른다면 경매 참여자의 수가 많을수록 입찰가를 낮춰야 마땅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입찰가를 높이려는 경향을 보이니 말이다.

케이펜과 동료들이 제시한 데이터 가운데 이런 사례도 있다. 1969년 알래스카 노스 슬로프 지역 구매 건의 경우 낙찰가가 9억달러였는데 두 번째로 높은 입찰금액은 겨우 3억7000만달러였다. 전체 입찰 대상 지역 중 26%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최고 입찰금액과 두 번째로 높은 입찰금액간 차이가 4배 이상 났고, 나머지 지역에서도 그 차이가 최소 2배 이상이었다. 두 번째로 높은 입찰금액보다 조금만 더 높게 적어도 낙찰받을 수 있는데 2배 또는 4배 이상 높게 가격을 쓰는 비합리적인 행동을 보인 것이다.

그런데 ‘승자의 저주’는 어쩌다 한 번 일어나는 이상현상이 아니라, 경매와 입찰 같은 상황에서는 오히려 일반적이라 할 만큼 자주 벌어지는 현상이다. 또 한 번 ‘승자의 저주’에 걸려들면 다음에는 이를 교훈 삼아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하는데, 현실에서 경매 입찰자들은 동일한 실수를 반복한다. 케이펜과 동료들은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상품 꾸러미가 가치 있을 것 같아서 입찰에 참가한다면, 언젠가는 빈털터리가 될 것이다.”

‘승자의 저주’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남의 얘기가 아니네” 하고 중얼거렸다. 국내에서 거래되는 해외 저작권료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몇 년 전만 해도 일본 판권은 선(先)인세 400만~500만원이 최고치였는데 이제는 웬만한 작품이 1000만원 안팎에서 입찰이 시작되며, 몇몇 인기 작가는 4000만~5000만원도 모자라 1억원은 ‘질러야’ 한다.

인기 있는 해외 저작물에 대한 수요는 많고 공급은 제한되어 있으니 몸값이 오르는 거야 어쩔 수 없다지만, 거래를 중계하는 에이전시들이 시작부터 1만달러 이상 쓰라고 주문하거나 다른 출판사에서 1만1000달러를 썼으니 조금 더 높이 써보라고 친절하게 귀띔하니 저작권료는 자꾸자꾸 오를 수밖에 없다. 이런 한국시장을 잘 아는 눈치 빠른 해외 메이저 출판사들은 처음부터 ‘입찰가 얼마 이상’이라고 하한가를 못 박기도 한다. 심지어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책을 찾아서 오퍼를 넣겠다고 하면, 재빨리 이 사실을 다른 출판사에 알려 입찰경쟁을 유도하는 에이전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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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미 동아일보 출판팀장 khm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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