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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 별곡─한국의 碑銘문학 5

동화처럼 떠나간 식민지 아이들의 산타 소파 방정환

“검은 마차가 날 태우러 왔네, 가방을 주게”

  • 김영식 수필가, 번역가 japanliter@naver.com

동화처럼 떠나간 식민지 아이들의 산타 소파 방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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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1899~1931)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가 ‘어린이’라는 말과 ‘어린이날’을 만들었다는 사실 또한 누구나 기억한다. 그러나 너무 유명한 나머지 오히려 알려지지 않은 일화가 더 많다. 열매를 맺기까지 그가 얼마나 힘든 길을 걸어왔는지,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제대로 아는 이는 드물다. 청소년의 달 5월, 망우리공원을 찾아 암울한 시대를 희망과 익살로 살다간 그의 삶을 만나보자.
동화처럼 떠나간 식민지 아이들의 산타 소파 방정환

망우리 공원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다는 소파 방정환의 무덤.

망우리공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 그리고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무덤을 꼽으라면 단연 소파 방정환의 묘일 것이다. 자연석(쑥돌)으로 에워싸인 그의 무덤 상석에는 유리상자가 놓여 있고, 그 안에는 조화 하나가 들어 있다. 언젠가는 상석 위에 어린이가 얹어놓은 동전 몇 닢과 초코파이가 놓여 있었다. 또 어느 시대에는 또 어느 어린이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무언가를 얹어놓을 터. 상석 위의 비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선여심동(仙如心童), 무동의이린어, 묘지환정방파소’

그리고 비석 뒷면에는 ‘이들무동’이라 새겨져 있다. 도대체 무슨 말일까. 묘를 처음 찾은 어린이와 젊은이들은 열이면 열 모두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고선 금세 알아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이 비는 서울 홍제동 화장터에 봉안돼 있던 유골을 소파 타계 5주년인 1936년 망우리로 이장하면서 세운 비석으로, 글씨는 당대의 명필이며 독립운동가인 위창 오세창 선생이 썼다. 위창은 손병희 선생의 참모 격으로 3·1운동 33인 중 한 사람이고, 소파는 손병희의 셋째사위였다. 오세창의 묘도 이곳 망우리에 있다.

소파의 아들 방운용이 서른 살쯤 됐을 때(1948)의 일이다. 추석 전후에 부친의 묘소를 찾아간 운용은 묘 앞에 양장 여인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참배하는 것을 목격했다. 여인은 한참 만에 고개를 들고 옆에 서 있는 운용을 보더니 “유족이신가요?”라고 짧게 묻곤 휑하니 사라졌다.

얼마 후 운용이 소파의 오랜 친구 유광렬(언론인·1906~1981)을 만나 여인의 인상착의를 설명했더니 그 여인은 신준려(신줄리아)라고 했다(‘사랑의 선물’, 이상금, 2005). 그는 소파가 1920년 봄 김일엽, 백인덕이 기획한 잡지 ‘신여자’의 편집고문으로 위촉돼 일을 도와주면서 잠시 교제한 여인이다. 신줄리아도 이 잡지의 기획자 중 한 사람. 그는 소파의 글에서 ‘S’라는 이니셜로 나타난다. 다음은 ‘개벽’ 4호(1920.9.25)에 나온 ‘추창수필(秋窓隨筆)’의 일부분이다.

“밤 10시 20분, 등불을 가까이하고 독보(구니기타 돗포)의 병상록을 읽다가 언뜻 S를 생각하고 한참이나 멀거니 앉아 있었다.… 독보가 말한 ‘밭 있는 곳에 반드시 사람이 살고 사람이 사는 곳에 반드시 연애가 있다’라고 한 그 구절 끝에 왜 이런 구절이 없는가 한다. ‘연애가 있는 곳에 반드시 실연이 동거한다’고. 아아, 인정의 무상함을 지금 새로 느끼는 바 아니지만 S의 사랑을 노래하는 그 입으로서 어느 때일지 실연의 애가가 나오지 아니할까… 아아, 사람 그리운 가을 만유가 잠든 야반에 창 밖에는 불어가는 가을 소리가 처연히 들리는데 부질없는 벌레가 잠자던 나를 또 울리는구나….”

소파의 연인 ‘줄리아’

동화처럼 떠나간 식민지 아이들의 산타 소파 방정환

소파의 무덤(뒤쪽 갓머리 쓴 비석). 아래는 최신복 가족의 무덤. 맨 아래 단비가 있는 무덤이 최신복의 묘다.

소파 22세, 줄리아 23세로 둘 다 뜨거운 가슴을 가진 청춘이었지만 소파는 이미 손병희의 3녀와 결혼하고 아들까지 둔 처지. 불꽃같이 짧았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결국 소파의 도쿄 유학과 줄리아의 미국 유학으로 추억의 한 장면이 돼버렸다. 줄리아는 후에 미국 보스턴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그곳에서 만난 류형기(감리교회의 지도자)와 1927년 결혼해 귀국했으나 사회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아 그 이름이 생소하다. 전쟁 중이던 1951년 도미해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아동문학가 이원수는 훗날 두 사람의 ‘플라토닉’한 사랑이 어린이를 위한 사랑으로 승화됐다고 증언했는데, 그 때문인지 짧은 인생을 살다 간 소파의 활동은 다방면으로 눈부시게 전개됐다. 너무나 유명해 그 이름을 모르는 한국인이 없을 정도인 소파. 그래서일까? 그에 대한 사람들의 지식은 대부분 단견과 피상에 그친다.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고 ‘어린이날’을 만든 사람, 그리고 아동문학가라고만 알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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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수필가, 번역가 japanli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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