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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속 열하일기’

연암의 연행(燕行) 자취 3700리길 되밟다

  • 정규복 고려대 명예교수·국문학

‘속 열하일기’

‘속 열하일기’

‘속 열하일기’ : 허세욱 지음, 동아일보사, 239쪽, 9800원

‘신동아’에 오랫동안 연재된 허세욱 교수의 ‘속 열하일기’가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동학인으로서 매우 반가운 일이다.

연암 박지원(1737~1802)의 ‘열하일기’는 수십 종의 연행록 중 대표적인 것으로, 그의 삼종형 박명원이 청나라 건륭황제의 고희연에 파견될 때, 함께 수행한 경험을 일기체로 쓴 것이다.

연암의 ‘열하일기’ 번역서는 광복 후 1947년 김성칠(金聖七)의 번역으로 나왔고, 이어 이가원의 ‘열하일기’가 1968년에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간행됐다. 연구서로는 최근에 강동엽의 ‘열하일기 연구’ 등 수종이 간행됐다. 하지만 이번 출간된 허세욱 교수의 ‘속 열하일기’는 연구서나 번역서가 아니라 연암이 열하에 이르기까지 밟은 근 40곳의 코스를 허 교수가 세 번이나 되밟으면서 연암의 관점을 검증하고, 그 정신을 자기화한 수상록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런 의도에서 ‘속 열하일기’라고 한 것 같다.

이 책의 저자 허세욱 교수는 일찍이 중국, 대만에서 다년간 체류하며 대만국립사범대학에서 ‘한중시화연원고(韓中詩話淵源考)’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을 뿐 아니라, 중문으로 시와 수필을 써 그곳 문필가들과 일련을 이뤘고, 귀국 후 한국외국어대와 고려대에서 중국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을 강의했다. 퇴임 후 현재는 수필문학계에서 원로들로 이뤄진 수필문우회 회장으로 있는 한편 디지털대학에서 석좌교수로 중국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중국고대문학사’ ‘중국현대문학사’ ‘중국문학총설’ 등 다수의 저서를 펴냈으며 지금도 정력적으로 작품을 쓰고 있는 학자요 시인·수필가다.

그런 허 교수의 안내로 연암의 행적을 따라가보자. 연암은 마부 장복, 창대와 함께 의주(현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넜고, 단동을 거쳐 책문에서 출국신고를 마치고 요동에 이른다. 요동은 당시 끝이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으로 하늘과 땅이 닿는 곳으로 여길 만큼 광활했다. 연암은 이를 개간하지 않고 내버려둔 연유를 파악했다. 즉 이밥을 장복하면 힘줄이 풀리고 뼈가 물러져 유사시 전쟁엔 아무 쓸모가 없기에 일부러 기장밥을 먹여 입맛을 잃을지언정 혈기를 돋게 하는 것이 전쟁에 유리하다는 청나라 황제들의 ‘내기(耐飢·굶주림을 견딤)관’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요동을 지나 심양을 거쳐 산해관(山海關)을 본 연암은 그 웅장함에 경탄하면서도, 산해관과 같은 성을 아무리 굳건하게 쌓아도 정치의 ‘인화(人和)’가 무너지면 그 성곽에 화살 하나를 꽂지 않아도 무너진다는 역설을 떠올렸다.

연암은 산해관을 떠나 의무려산에 이르렀다. 의무려산은 당시 조선 사람들이 연행할 때 오며가며 쉬면서 담소를 나누는 하나의 휴게소였다. 이어 연평을 거칠 때 고려문(高麗門)에 이르렀다. 여기는 병자호란 때 포로로 잡혀온 조선인들의 후예가 사는 마을이었다. 연경을 오가는 사신들이 이곳에 들러 동족의 사랑을 확인하곤 했지만 마부와 하인들의 일부가 술값을 떼어먹거나 토색하고 훔쳐가면서 동포애를 외면하고 음식을 감추는 등 반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어 고죽국(孤竹國)에 이르러 은(殷)나라 때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으로 수양산에 들어가 아사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충성을 기념하는 사당(祠堂)을 참관하고, 북경에 이르렀다.

연암은 북경에서 엿새 동안 머물러 정양문·선무문·유리창 등을 보고 크게 경탄하고 열하를 향해 떠날 때, 인원 제한으로 연암의 마부 중 장복이 떨어지는 생이별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백하에 이르러 이번에는 연암의 마부 창대가 일야구도하(一夜九渡河)의 하나인 백하를 건너다 말굽에 치어 걷지 못하게 됐다. 연암은 또 생이별의 아픔을 겪기 싫어 강압적으로 ‘기어서라도 따라오라’ 하고 백하를 떠나 서울에서 3700km나 되는 목적지 열하에 당도했다.

열하엔 청나라 강희(康熙)·옹정(雍正)·건륭(乾隆) 등 3대에 걸쳐 1세기 동안에 이루어진 피서산장(避暑山莊)이 있다. 그곳은 청나라 황제들의 별궁이었다.

여기에서 엿새 동안 머무른 연암은 태학(太學)에서 동숙자인 중국의 학자들과 정치·문화·풍속 등에 대해 토론했다. 여기서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옛날엔 양가(兩家)가 절친한 경우 여자의 임신 중에도 혼약했다가 남자가 죽으면, 여자가 뒤따라 순절(殉節)해야만 했다는 어느 중국학자의 설명을 듣고 연암은 이를 ‘절음(節淫)’이라 폄하했다.

연암은 용무를 마치고 의주를 떠나 돌아올 때도, 이미 밟은 그 코스를 되밟아 56일 만에 서울에 당도했다. 허 교수도 연암이 밟은 그 코스를 되밟으면서 보고 느낀 것에 대해 하나하나 재검하면서 누구보다도 경탄하고, 때로는 자기의 의견을 덧붙이면서 열하에 이른 소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수필의 강도와 밀도 내지 장력(張力) 등 파격적 리얼리즘, 천의무봉한 체제, 자유자재한 문체를 혼용하면서 하늘 아래 모든 제재를 녹이는 용광로다”라 하고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였다.

“연암은 후대의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천재성을 보였다. 고독했던 사람, 뜨거웠던 사람이 훨훨 털고 일어서서 자유와 풍요에 대한 절절한 염원을 구체화했다. 천재는 신(神)으로 쓰는데 연암은 발로 뛰었다. 미치광이나 집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선비로서 뛰었던 것이다. 연암의 발자취를 따라 일 년 동안 발로 뛴 날들이 즐거웠다.”

그동안 한국학자들이 ‘열하일기’를 주로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중심으로 북학파(北學派)의 처지에서 거론한 것이 대부분인데, 허 교수는 처음으로 입체적이며 문예미학적인 시각에서 바라봤다.

신동아 2008년 6월 호

정규복 고려대 명예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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