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호

새로운 헌법 필요한가

지식인들의 개헌 논의 4년의 기록

  • 이국운 한동대 교수·헌법학 lkwoon66@naver.com

    입력2008-08-31 01: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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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헌법 필요한가

    ‘새로운 헌법 필요한가’: 양건 외 지음, 대화문화아카데미, 454쪽, 1만5000원

    ‘대화모임’에 초대를 받아 서울 평창동 대화문화아카데미에 갈 때마다 나는 늘 마음이 설렌다. 시중(市中)을 벗어나 지식인들의 산중문답(山中問答)에 참여하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한번은 아카데미에서 제공하는 차량을 놓쳐 그 높은 곳까지 걸어 올라간 적이 있는데, 마음이 흡족하기로는 그때가 제일이었던 것 같다.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지만, 속세의 때를 다 벗은 것 같아 가슴이 후련했다.

    강원룡 목사의 사진이 걸린 큰 방에서는 북악산 능선 너머 멀리 한강 줄기가 내려다보인다. 그곳에서 보면 2008년 여름 대한민국에서 펼쳐지고 있는 세 종류의 개헌 논의가 시야에 들어온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여의도 국회 주변에서 벌어지기 시작한 ‘정치인들의 논의’다. 과반수 이상의 국회의원들이 참여한 미래한국헌법연구회(공동대표·이주영, 이낙연, 이상민 국회의원)는 이미 여러 차례 개헌토론회를 개최한 바 있다. 김형오 국회의장의 공언대로 18대 국회에 개헌특위와 헌법연구자문기구가 구성되면, 이 논의는 곧바로 ‘제도적인 의미’까지 가지게 될 전망이다. 심지어 청와대의 입장정리 여부와 상관없이 국회가 중심이 되어 개헌 논의가 본격화하리라는 예상마저 있을 정도다.

    그 다음으로는 국회 주변을 바라보면서 한국사회의 제 정파가 진행하고 있는 각개약진식의 논의다. 개헌의 범위, 시기, 추진방식, 정치적 파장 등을 두고 정당, 언론, 시민사회단체들은 정치적 득실 계산에 돌입한 지 오래다. 2007년 초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제기했던 이른바 ‘원포인트 개헌론’이 외면 당한 것은 각 정파들로부터 내부 논쟁의 기회를 빼앗은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개헌의 구도와 전선이 어떻게 형성될 것인지를 초미의 관심으로 지켜보면서 제 정파는 명분과 논리를 가다듬고 있다.

    ‘제3의 개헌 논의 대표선수’



    마지막으로는 이 두 종류의 개헌 논의와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면서 헌법에 대한 시민적 숙고를 시도하는 또 다른 개헌담론이다. 바람직하기로는 헌법학회나 정치학회 같은 학술단체들이 이 역할을 맡는 것이 제일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 학계는 헌법을 두고 시민들과의 진지한 소통을 시도하는 데 익숙하지 못하다. 이 세 번째 개헌 논의는 시중을 내려다보는 눈길을 거두고 지식인들의 산중문답으로 돌아올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지난 4년 동안 진행됐던 대화문화아카데미의 대화모임 ‘새로운 헌법 필요한가?’는 한국사회가 보유한 제3의 개헌 논의의 대표선수다.

    최근 대화문화아카데미에서 같은 이름으로 펴낸 이 책은 그동안의 산중문답에서 지식인들 사이에 오간 발제와 토론 내용을 꼼꼼히 채록한 일종의 현장기록이다. 아마도 기자나 정치평론가들은 맨 처음 이 책에서 현실적으로 개헌 논의의 최대 쟁점인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의 선호 및 지지도’를 찾아보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이 책이나 대화모임의 기획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앞의 두 가지 개헌 논의 중 어느 하나와 성급하게 연결시키는 것일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의 목적은 그와는 정반대일 수 있다. 앞의 두 가지 개헌 논의와 같은 ‘정치적/정략적 담론투쟁’에서 한 발 물러나는 것이 더욱 필요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이 책은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식인들의 산중문답은 이 물러남의 미학을 담아내는 독특한 대화 형식인 셈이다. 이를 위해서는 일단 시중에서 벗어나야 하며, 말하기보다 듣기에 익숙해져야 하고, 또 듣고 생각한 내용을 곰삭일 숙성기간을 가져야 한다.

    이와 같은 기획 의도가 대화모임을 이끌었다는 사실은 책의 곳곳에 나타나 있다. 무엇보다 (헌)법학자들과 비(非)법학자(정치학자, 철학자, 정치인 등)로 대별될 수 있는 발제자들의 구성이 그러하다. 이 구성은 그 자체로서 개헌 논의에 전문적인 테크니션으로 참여할 가능성이 높은 전자와 정치적/정략적 판단의 논리와 근거를 제공할 가능성이 높은 후자에게 공히 경계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으로 읽힌다. 적어도 개헌 논의에 관한 한, 이 두 부류의 정치적 지식인들은 자기 지식을 믿고 고집을 피우기 전에 우선 서로에게서 많이 듣고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일차적으로 현실 정치인들이 주도하는 ‘정치적/정략적’ 개헌 논의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중으로부터 물러나는 대신 문제의 핵심에 놓인 지식인들을 불러내어 산중문답식으로 서로 대화하게 하는 것. 이 독특한 접근방식으로 인해 이 책은 통상의 개헌 논의에서 찾아볼 수 없는 한 가지 은폐된 문제를 대화의 전면에 끌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정치체제(politeia)에 정치공동체(polis)를 부합시키려는 ‘폴리테이아니스트(politeianist)’와 정치공동체에 부합하는 최선의 정치체제(polity)를 찾아내려는 ‘폴리티아니스트(politianist)’의 대립이 그것이다.

    개헌불가피론 대세

    이 책에서 가장 관조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비판적인 김홍우의 글(‘한국 헌법론 소고’)은 유진오를 비롯한 대한민국의 역대 (헌)법학자들을 전자로 규정하면서, 이런 관성을 벗고 하루바삐 후자의 입장을 관철시킬 경우에만 의미 있는 헌법 개정이 가능하다는 점을 되풀이해 강조하고 있다. ‘폴리티아니스트’의 입장에서 개헌은 ‘살아 있는 헌법에 고비마다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 책에 글을 실은 모든 발제자가 ‘폴리티아니스트’로서의 모범을 보여 주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다른 지식인들과 소통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헌)법학자들의 글은 대부분 전문적인 논의를 자제한 흔적이 역력하고, 일부 비(非)법학자들의 글은 추상적 이론과 구체적 현실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다. 양자 사이의 소통 역시 생각만큼 원활했던 것 같지는 않다.

    크게 보아 1987년 개정헌법의 틀을 지키는 기조 위에서 권력구조를 손보는 ‘작은 개헌론’과 탈냉전, 세계화, 분권화, 정보화를 담아낼 ‘큰 개헌론’이 맞선 것은 분명하지만, 구체적인 각론으로 들어가면 컨센서스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보다는 주장과 반박에 그친 부분이 훨씬 많다. 계속적인 논의를 기대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독자의 입장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것은 이 책에 담긴 4년 동안의 대화가 같은 기간 시중에서 벌어진 정치적 의식 변화를 상당부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제4부에 정리된 아홉 번의 토론 기록은 이 책의 정수(精髓)라고 할 수 있다. 이 토론 기록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초반에는 ‘개헌신중론’을 ‘개헌불가피론’이 설득하고, 중반 이후에는 ‘작은 개헌론’을 ‘큰 개헌론’이 설득하는 것이 대화모임의 전체적인 흐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헌법재판제도, 경제헌법, 지방자치 등의 영역으로 논의의 범위가 확대되면서 개헌불가피론은 대세로까지 여겨졌던 것이다.

    대화모임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이 ‘개헌불가피론’은 사실 같은 기간 대한민국의 지식인들이 함께 경험한 내용이기도 하다. 특히 연이은 대통령 정치의 실패와 현실 정치권의 무능력은 권력구조나 정치엘리트들을 바라보는 지식인들의 시각을 바꾸고 있다.

    토론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꾸준히 대화에 참여한 지식인들 중 일부는 5·16 군사쿠데타 이후 오랜 기간 무원칙한 타협논리로 폄하되어온 의원내각제의 제도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복권시키고 있다. 대통령직선제를 민주화와 동일한 것으로 전제했던 1987년 헌법의 맥락을 상기할 때, 이것은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낄만한 변화임에 틀림없다. 지난 5월, 4년간의 산중문답의 결과를 시중에 드러냈던 제1회 여해 포럼 ‘사이·너머’는 이런 변화를 확인시켜준 바 있다. 당시 포럼에서는 ‘의원내각제 개헌론’이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론’과 호각을 이루며 치열하게 토론됐던 것이다.

    백화제방의 개헌 논의 대두

    그렇다면 개헌불필요론→개헌불가피론→작은 개헌론→큰 개헌론으로 이어졌던 대화모임의 흐름은 이제 공식적으로 전개될 ‘정치적/정략적 개헌 논의’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이 책에 담긴 권력구조 변경논쟁이나 헌법재판소제도, 경제헌법 조항에 관한 개헌 논의를 넘어서서 시중에는 이미 다양한 개헌 논의가 촉발될 조짐이 드러나고 있다. 그 목록은 국적조항의 구체화, 영토 조항과 평화통일 조항의 관계정립, 국제법과 국내법의 효력체계화, 사회적 기본권의 확대, 정보민주주의의 도입, 직접민주주의의 강화, 배심재판을 받을 권리 및 사법민주화의 제도화를 포함한다. 여기에 연방주의를 포함한 지방자치제도의 혁신, 수도 및 국기의 명기, 성적 자기결정권의 문제 등이 더해지면 대한민국은 가히 백화제방의 개헌 논의에 휩싸일지도 모르겠다.

    이래저래 국회를 중심으로 본격화될 공식적인 개헌 논의는 백화제방의 논쟁을 주도적으로 벌이기보다는 기왕의 토론에 기초하여 의제의 범위와 순위를 정하는 방식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20년 만의 공식적인 개헌 논의가 이처럼 제한적 방식으로 진행될 때, 이미 명분과 논리를 가다듬고 있는 한국사회의 제 정파와 세력은 어떻게 반응할까? 그리고 그때 시중을 떠나 다시 산중에 모일 대화문화아카데미의 지식인들은 헌법을 위해 또 어떤 새로운 대화를 시작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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