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호

만국공통어 에스페란토, 올해 노벨평화상 받을까

  • 고승철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cheer@donga.com

    입력2008-10-06 11: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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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어 권력 배제한 평등의 언어…세계평화와 인류애 강조
    • 1906년 고종황제도 에스페란토 초급 단계 배워
    • 금융계 큰손 조지 소로스, 에스페란토 덕분에 인생 바뀌어
    • 인터넷 시대에 보급 활성화…전문 사이트 1000개 넘어
    • 한국에서 무료 보급 강좌 17년째… 200기 수강생 배출


    한일간신문에 ‘국제어 에스페란토 200기 강습 수강생 모집’이란 조그만 광고가 눈에 띄었다. 매주 화요일 오후 6~9시 또는 토요일 오후 3~6시, 한 달에 총 4회 진행된다는 것이다. 장소는 서울 명동 세종호텔 뒤편 에스페란토문화원. 강사는 이중기 에스페란토문화원 원장, 수강료는 교재대 포함해 7만원.

    호기심이 생겨 에스페란토문화원 사이트(www.esperanto.co.kr)에 들어가봤다. 거기엔 놀랍게도 수많은 에스페란티스토(에스페란토 사용자)의 족적이 있었다. 이를 배워 활용하는 구체적인 사례가 수두룩했다. 그들은 ‘세계평화’와 ‘인류애’라는 거창한 이념을 몸으로 실천하는 듯했다. 전세계 ‘에스페란티스토’들이 활기차게 교류하는 모습이 어른댔다.

    영어가 국제어로 판을 치는 요즘 세상에 누가, 왜 에스페란토를 배우는가. 배워서 어떻게 사용하나. 창안자 자멘호프는 어떤 인물인가. 과학적으로 잘 만들어진 인공 언어여서 배우기가 쉽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일제 강점기에 항일투사들이 에스페란토 보급운동을 벌였고 김억 시인이 에스페란토로 시를 썼다고 고교 때 배웠는데 실상은 어땠을까. 궁금증이 꼬리를 물었다. 에스페란토를 습득하면서 해답을 찾기로 했다.

    개강일인 8월5일, 지하철 명동역에서 내려 에스페란토문화원을 찾아갔다. 어느 6층 건물의 옥상. 엘리베이터가 없어 계단으로 올라갔더니 무더위 탓에 비지땀이 쏟아진다. 널찍한 공간과 푹신한 소파를 갖춘 여느 문화원과는 달리 자그마한 방 하나가 전부였다. 방 가운데 테이블이 놓였고 한쪽 벽엔 칠판과 자멘호프 박사의 사진이 걸렸고 나머지 벽들엔 책이 빽빽하게 꽂힌 서가가 있었다.



    200기 수강생은 모두 10명. 1개 기수 정원이 10명이라고 한다. 연령층이 다양하다. 60대로 보이는 여성에서부터 어린 중학생까지…. 가정주부 자매, 대학생 남매, 중학생 남매 등이 포함됐다.

    강사인 이중기 원장은 “연세 많은 분이 에스페란토를 배우면 두뇌가 활발하게 움직여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면서 “국내외 에스페란티스토 친구들과 교류할 기회가 많아 무료하지 않은 점도 좋다”고 말문을 열었다. 영국 작가 윌리엄 올드는 “나의 인생에서 모국어를 통해 얻은 친구보다 몇 배 많은 진실한 친구를 에스페란토를 통해 얻었다”고 밝혔다고 이 원장이 소개했다. 수강생에게 배포된 교재는 이 원장이 지은 ‘에스페란토 입문’이라는 책이다. 저자 프로필을 보니 한국외대, 원광대 등에서 에스페란토를 강의하고 아시아 에스페란토위원회 사무국장으로 활동 중이다. 해외 에스페란토 행사에 참여한 횟수도 50차례가 넘는다. 다른 저서도 여러 권이다.

    모든 명사 스펠링은 ‘o’로 끝나

    먼저 에스페란토 글자를 배웠다. 알파벳 문자로 모두 28자인데 자음 23자, 모음 5자다. 발음기호를 따로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영어처럼 ‘철자 따로, 발음 따로’인 불규칙성을 없앴다. ‘bona’는 ‘보나’(좋은)로, ‘floro’는 ‘플로로’(꽃)로 읽으면 된다. 이 원장의 선창에 따라 수강생들은 큰 소리로 여러 단어를 몇 번 따라 읽었다. 일단 발음하기 어려운 글자가 없어서 좋다. 특히 모음은 ‘아, 에, 이, 오, 우’ 5개 기본음뿐이어서 발음하기에도, 듣기에도 편하다. 오페라나 뮤지컬에 사용하면 가사 전달력이 뛰어날 듯하다. 단어의 악센트는 끝에서 둘째 모음에 있다. 이는 스페인어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에스페란토를 언뜻 들으면 스페인어 같다.

    ‘amiko’(아미코, 남자 친구)라는 단어 하나로 몇 가지 문법 설명이 가능하다. 에스페란토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든 명사의 스펠링은 ‘o’로 끝난다는 점이다. 형용사는 ‘a’로, 부사는 ‘e’로 끝난다. 그래서 ‘amiko’란 명사를 알면 ‘amika’(아미카, 다정한)라는 형용사와 ‘amike’(아미케, 다정하게)라는 부사를 자동적으로 알 수 있다. 여자 친구는 어떻게 표기하나. ‘amikino’(아미키노)라고 마지막 스펠링 앞에 ‘in’만 넣으면 된다. 소년은 ‘knabo’(크나보)인데 소녀라는 단어는 따로 외울 필요 없이 ‘in’을 넣어 ‘knabino’(크나비노)라고 하면 된다. 영어를 배울 때처럼 ‘boy’와 ‘girl’을 각각 외우는 수고가 없다.

    형용사 앞에 ‘mal’이라는 접두사만 붙이면 반대어가 된다. 즉, ‘malbona’(말보나)라고 하면 ‘다정한’의 반대말인 ‘적대적인’이 되는 것이다. 에스페란토 단어를 하나 외우면 자동적으로 만들 수 있는 파생 단어가 많아 어휘력이 금방 풍부해진다.

    대부분의 단어도 낯설지 않다. 여러 유럽 언어에서 공통적인 단어를 가능한 한 많이 차용한 덕분이다. 특히 라틴 계열(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의 단어와 비슷한 게 많다. 그럼 ‘libro’(리브로)와 ‘arbo’(아르보)는 무슨 뜻일까. 프랑스어를 배운 사람이라면 금방 짐작할 것이다. 프랑스어의 ‘livre’(책, 리브르)와 ‘arbre’(나무, 아르브르)와 거의 같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프랑스인들은 에스페란토를 쉽게 배운다.

    동사 변화도 간단하다. ‘나는 학생이다’는 ‘Mi estas studento’(미 에스타스 스투덴토)다. ‘estas’가 영어로 치면 ‘be’ 동사다. 과거형과 미래형은 ‘estis’(에스티스), ‘estos’(에스토스)이다. 모든 동사가 마찬가지 원칙에 의해 현재, 과거, 미래형으로 바뀐다.

    세계 금융계를 주무르는 헝가리 출신의 투자가 조지 소로스(Soros)도 에스페란티스토라고 한다. 그의 이름 끝부분인 ‘os’는 미래를 상징하는 접미사. 에스페란티스토였던 소로스의 아버지가 아들 이름을 에스페란토식으로 지었다. 소로스가 청년일 때 헝가리는 공산체제여서 해외여행 허가를 얻기가 어려웠다. 헝가리 정부는 세계에스페란토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에겐 여행허가를 비교적 쉽게 내주었다. 소로스는 1946년 스위스에서 열린 대회에 참가했다가 영국으로 망명해 대학에 다녔다. 에스페란토가 그의 인생을 바꾼 셈이다.

    첫날 수업에 일본인 에스페란티스토가 참관하러 왔다. 50대 남자인데 에스페란토를 사용한 지 30년이 됐다고 한다. 이중기 원장과 오랜 친구인 모양이다. 이 원장의 통역으로 그 일본인과 에스페란토의 인연을 설명했다. 그의 직업은 영어교사. 여름방학 때마다 해외여행을 다니는데 에스페란토가 큰 도움을 준단다. 각지에 있는 에스페란티스토들이 안내 자원봉사를 해주는데다 집에서 재워주기도 해 현지인들의 생활상을 파악하는 데 더없이 좋다는 것.

    첫날 수업에 중국인과 대화

    알고 보니 에스페란티스토를 위한 세계 민박제도가 체계적으로 운용되고 있다. 민박을 제공하겠다는 사람이 자기 연락처를 협회에 알려 이들의 명단이 책자로 발간된다. 세계 각국의 도시가 거의 망라돼 있다. 이 책자에는 연락처와 함께 몇 가지 조건과 요망 사항이 적혀 있다. 이틀만 숙박이 가능하다든지, 방문하기 전에 반드시 연락해달라든지, 금연주의자만 받겠다든지 등이다. 한국인 에스페란티스토 가운데서도 이 제도를 활용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한국에 오는 외국인도 한국인 에스페란티스토 집에서 묵거나 안내를 받는다.

    만국공통어 에스페란토, 올해 노벨평화상 받을까

    에스페란토문화원에서 에스페란토를 배우고 있는 사람들.

    이 원장의 노련한 설명 덕분에 처음 배우는 언어인데도 그리 낯설지 않았다. 2시간가량 배우고 나서 외국의 에스페란티스토와 대화를 나누는 기회가 왔다. 인터넷 통화로 중국 상하이의 어느 에스페란티스토를 불러냈다. 수강생들은 차례로 돌아가며 그 중국인과 에스페란토로 대화를 나누었다. 모두 ‘왕초보’이니 이름을 말하고 간단한 인사말 정도 하는 수준이었다. 외국어를 배울 때 가장 먼저 익히는 단어가 ‘안녕하세요?’와 ‘감사합니다’ 아닌가. 에스페란토로는 ‘Saluton’(살루톤), ‘Dankon’(단콘)이다. ‘1번 타자’ 수강생은 쑥스러워하면서 “살루톤”이라는 말을 건넸다. 나중에 마이크를 건네받은 수강생들은 당당한 목소리로 “살루톤”을 외쳤다.

    기자도 더듬거리며 이름을 밝히고 인사말을 했다. 에스페란토 단어로 기자가 무엇인지 배우지는 않았지만 생각나는 대로 “주르날리스토”라고 말했더니 상대방은 알아들었다. 이 원장에게 확인해보니 에스페란토 단어로 맞다고 한다. 수업 시간에 배운 대로 “Mi amas Esperanton(미 아마스 에스페란톤, 나는 에스페란토를 사랑한다)”고 말했더니 상대방도 굵직한 목소리로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신비한 쾌감이 느껴졌다. 에스페란토는 목적어 끝에 ‘n’을 덧붙인다는 점이 신기했다.

    수강생들은 처음 배운 언어로 외국인과 대화까지 한 사실에 대해 모두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는 표정이었다. 이 원장이 간간이 대화 중간에 통역을 했는데 그 중국인은 사회과학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며 에스페란토로 세계 각국의 벗들과 대화하는 게 취미라고 한다. 요즘 상하이 날씨는 무척 덥고 중국 전체엔 베이징올림픽 열기가 달아오른다는 것. 한국인들은 대체로 발음이 좋다고 칭찬했다.

    막걸리도 에스페란토 사전에 등재

    어린 수강생인 전류정(13·서울 성산중) 양은 “실제로 배워보니 최소한 막힘없이 읽을 수 있어 좋다”면서 “초급을 떼고 나면 엄마에게 더 배울 작정”이라 말했다. 전 양은 남동생 여민 군과 함께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이번 강좌에 참가했다. 이들의 어머니는 이 강좌의 수료생으로 에스페란토 성경을 읽는 게 주요 일과라고 한다.

    호기심으로 첫 강의를 듣고 나서 에스페란토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관련 자료를 검색했더니 서적만도 수십 종이 나와 있다. 그 가운데 한국외대 출판부에서 낸 ‘에스페란토 사전’이 눈에 띈다. 사전은 1646쪽이어서 제법 두툼하고 장정도 멋있다. 사전의 절반은 에스페란토-한국어, 나머지는 한국어-에스페란토로 구성됐다. 표제어가 6만이니 웬만한 어휘는 거의 포함된 셈이다. 사전 편찬자는 마영태 중국 난징대 초빙교수. 마 교수는 한국에서 수십년간 에스페란토 보급 활동을 펼치다 요즘엔 중국으로 반경을 넓혔다. 사전 편찬이라는 지난(至難)한 작업을 마친 그는 머리말을 이렇게 시작했다.

    “우리 인체의 세포는 끊임없이 죽어가고 또 생겨난다. 언어도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새로운 단어가 생겨나고 또 한쪽에서는 끊임없이 도태되어 사라지기도 한다. 우리 에스페란토계도 예외는 아니다. 2002년에 새로 나온 PIV(에스페란토-에스페란토 대사전)에 보면, 11년 전에 내가 ‘에스페란토-한국어 대사전’을 출간할 때만 해도 없었던 단어들이 표제어로 등록된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그중 일부를 소개하면 에어로빅(aerobiko), 에이즈(aidoso), 유에프오(nifo), 피자(pico), 취미(hobio), 데이터(dateno), 한국어 단어인 막걸리(makolio), 곰탕(komtango) 등이 그것이다.

    특히 ‘한국인’을 뜻하는 koreo가 표제어로 채택되어 ‘대한민국’을 공식적으로 Koreio 또는 Koreujo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우리 한국 에스페란티스토들에게는 일대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십수년 전 우리가 적지 않은 돈을 모금하여 국제적인 투쟁을 벌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국호(國號)를 되찾은 것 같아 한국의 모든 에스페란티스토 동지들과 함께 자축(自祝)하는 바이다.”

    에스페란토를 창안한 자멘호프는 어떤 인물인가. 그의 생애와 에스페란토 기원을 알기 위해 ‘바벨탑에 도전한 사나이’ 등 여러 자료를 살폈다. 직업이 안과의사인 그는 “지구상 인간은 민족의 벽을 넘어 서로 평등하게 이해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다”고 믿는 이상주의자였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중립적인 세계 공통어로 의사소통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국공통어 에스페란토, 올해 노벨평화상 받을까

    이중기 에스페란토문화원 원장이 에스페란토를 가르치고 있다.

    ‘언어가 다르면 갈등이 생긴다’

    그는 1859년 12월15일 폴란드의 옛 도시인 비얄리스톡에서 태어났다.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 작은 도시에서 폴란드인, 독일인, 러시아인, 유대인 등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티격태격 다투었다. 유대인 가계(家系)에서 자란 소년 자멘호프는 언어가 달라 민족 간의 갈등이 생긴다고 보고 “어른이 되면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쓰는 만국 공통어를 만들어 싸움을 그치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외국어 교사여서 어린 시절부터 집안 분위기상 다양한 언어를 익힐 수 있었다.

    1873년 자멘호프 가족은 바르샤바로 이사를 갔다. 아버지는 독일어 교사로 일했고 자멘호프는 ‘제2 언어학 고교’를 다녔다. 고교에서 외국어 실력을 더욱 키웠다. 10여 개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공책에다 조금씩 국제어 시안을 적어갔다. 고교 졸업반 때인 1878년 12월 그는 ‘링그베 우니베르살라’라는 원고를 완성했다. 그는 친구들과 교실에서 ‘세계어 탄생의 날’이라 부르며 축하 파티를 열었다. 그러나 자멘호프의 아버지는 아들이 그런 몽상에 빠지면 생업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의과대학 진학을 종용했다. 자멘호프는 1879년 고교를 졸업하고 모스크바로 가서 의대생이 된다. 아버지는 그 원고 뭉치를 불태웠다.

    1886년 바르샤바에서 안과병원을 개업한 그는 틈이 나는 대로 국제어 창안에 열정을 쏟았다. 이듬해에 그는 부자 상인의 딸 클라라 질베르니크와 결혼했다. 신부가 갖고 온 지참금으로 에스페란토 서적을 출판했다. 러시아어판, 폴란드어판, 프랑스어판, 영어판, 독일어판을 차례로 펴냈다. 저자 본명은 밝히지 않았다. 그가 유대인이므로 반(反)유대주의 분위기가 형성된 당시 상황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킬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더욱이 ‘에스페란토가 인류를 하나로 만들 것’이라는 창안 취지가 곡해되면 엉뚱한 파장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훗날 스탈린은 에스페란티스토 수천명을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보냈고, 히틀러는 자멘호프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에스페란티스토를 탄압했다.

    자멘호프는 에스페란토를 널리 보급하려면 학습서와 잡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이를 출판했다. 안과의사 수입으로는 자금을 댈 수 없었다. 처가의 후원으로 책을 냈다. 생활은 늘 궁핍했다. 학습서는 잇달아 덴마크어, 스웨덴어, 체코어 등 17개 언어로 출간됐다. 각국의 번역자가 자기 돈으로 책을 냈다. 자멘호프의 뜻에 찬동해서다.

    1905년 8월 프랑스의 불로뉴 쉬르메르에서 제1회 세계에스페란토대회가 열렸다. 여기서 ‘불로뉴 선언’이라고도 불리는 ‘에스페란토주의에 관한 선언’이 발표된다. ‘에스페란토주의’란 1민족 2언어주의다. 자국 민족끼리는 자국어를, 국제 사회에서는 에스페란토를 사용하자고 주장하는 ‘언어 평등권 운동’이다. 이런 형태의 세계 대회는 그 후 매년 개최된다.

    1908년 5월엔 스위스 제네바에 세계에스페란토협회(UEA)가 창설된다. 협회보 ‘에스페란토’를 발간하기 시작한다. 에스페란토는 유럽 대륙을 출발점으로 해서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오늘날 UEA엔 117개국 회원이 가입해 있다. 현재 본부 사무실은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있다.

    자멘호프는 자신의 이상이 일부 실현되는 것에 보람을 느끼면서 1917년 4월14일 향년 57세로 숨을 거둔다.

    예외 없는 문법 16개 법칙

    둘째 수업일인 8월12일, 문화원에 도착하니 어느 서양인 부부가 와 있었다. 도수 높은 안경을 쓴 외모로 보아 지식산업에 종사하는 사람 같았다. 한국에 여행을 온 에스페란티스토였다. 이 원장의 통역으로 그들 부부의 사연을 들었다. 리투아니아의 빌니우스에 사는 의사인 남편 알프레도 마루슈코스씨는 20년 전에 처음 에스페란토를 배웠다. 당시의 리투아니아는 소련의 연방국이었으므로 해외여행이 쉽지 않았다.

    신경외과를 전공한 마루슈코스씨는 평소 동양의 침술 치료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던 중 중국에서 에스페란토로 침술 특강을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기회가 왔다”고 탄성이 절로 나왔다. 에스토니아어로 출판된 에스페란토 교재를 갖고 2주일간 집중적으로 배웠다. 당국에 여행신청서를 냈더니 다행히 허가가 나왔다. 그는 중국에 가서 1개월간 침술을 전수받았다. 귀국 후 서양 의학과 동양 의술을 접목하니 치료효과가 좋았다. 그는 일본인 에스페란티스토 여행객에게서 일본식 마사지를 배웠다. 요즘은 동양의 대체의학을 보급하는 게 직업이 되다시피 했다. 에스페란토가 그의 인생 영역을 크게 넓혔다.

    에스페란토는 문법 16개 법칙이 있다. 이 법칙을 벗어나는 예외는 없다. 예외를 허용하면 복잡해지고 배우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만큼 간단하다. 에스페란토로 숫자는 한국어와 비슷한 점이 있다. ‘du’(두, 2)와 ‘dek’(덱, 10)을 연결하면 ‘dudek’(두덱, 20)이 된다. 영어처럼 ‘twenty’(20)라는 수사가 따로 없다. 가정법, 의문문, 분사(分詞) 등도 다른 유럽 언어보다 간단명료해서 배우기 쉽다.

    한국에도 에스페란토가 초창기에 전해졌다. 1906년 어느 궁중 의사가 고종 황제에게 에스페란토의 장점을 보고했다. 외세가 밀려와 국가의 존망이 흔들릴 당시에 고종은 에스페란토의 인류애 정신에 감명을 받았고 또 여러 언어를 배우느라 골치를 앓느니 국제공통어가 유용하다는 점에도 공감했다. 고종은 틈을 내 초급 에스페란토를 익혔다.

    본격적으로 에스페란토를 보급한 개척자는 시인 김억(1896~?)이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에 습득해 1917년 귀국 후 제1회 에스페란토 강습회를 열었다. 그는 ‘Mia koro’(미아 코로, 나의 마음)이라는 에스페란토 시를 짓기도 했다. 소규모 강습회를 열다가 1920년부터 서울 YMCA 강당에서 공개 강습회를 진행했다. 수강생 신봉조(1900~1993)는 에스페란토 교재를 만들었고 ‘나비 박사’로 유명한 석주명(1908~1950)은 한국 나비를 세계 학계에 소개할 때 에스페란토로 논문을 작성했다. 일제 강점기에 에스페란토 보급 운동은 선각자들에 의해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됐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는 에스페란토 강좌 코너가 연재됐다.

    6·25전쟁 이후 사회학자인 홍형의(1911~1968) 교수가 대구 지방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에스페란토 원작 소설 ‘마을의 개척자’를 발표했다. 1960년대에는 시인 이은상과 대학교수 김태경이 에스페란토 보급에 앞장섰다. 1975년에는 여러 에스페란티스토 단체들이 통합, 한국에스페란토협회가 탄생했다. 현재 회장은 박화종 포항 에스페로 내과의원 원장이 맡고 있다. 1980년대에는 단국대 장충식 총장의 공로가 컸다. 단국대에 강좌와 에스페란토연구소를 개설했다. 이후 단국대에서만 20여 년간 1만여 명이 에스페란토를 정식 과목으로 수강했다.

    이중기 에스페란토문화원 원장 인터뷰

    “사명감에서 시작한 일입니다”


    만국공통어 에스페란토, 올해 노벨평화상 받을까
    “이렇게 에스페란토 입문 강의를 진행한 것이 이제 17년이 됩니다. 매월 1개 기수씩 배출해 200기를 마쳤으니 감개무량합니다.”

    자발적으로 에스페란토 보급 운동을 펼치는 이중기(55) 에스페란토문화원 원장은 “앞으로 200기를 더 진행해 400기 수강생을 배출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그때가 되면 나이가 71세가 돼 은퇴 연령이라는 것. 수강생을 배출할 때마다 “새 아이를 탄생시키는 희열을 맛본다”면서 “이 중요한 국제 통용어를 누군가가 가르쳐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시작한 일”이라고 말했다.

    영남대 법대와 영남대 행정대학원(계획학 석사)을 졸업했지만 학교 전공과는 관계없이 에스페란토 활동에 뛰어들었다. 단국대, 원광대, 한국외대에서 강의하며 에스페란토 관련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외국의 에스페란티스토는 대체로 여유 있는 지식인 계층이므로 그들을 통해 민간외교 활동을 하면 효과적이라고 한다. 일본만 해도 한국보다 에스페란토가 훨씬 널리 보급돼 국제적으로 일본의 위상을 높이는 데 일조한다는 것.

    “내년은 자멘호프 박사의 탄신 1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폴란드에서 열리는데 아마 5000~6000명이 모일 것입니다. 세계 대회가 앞으로 2010년에 쿠바, 2011년엔 러시아 모스크바, 2012년엔 베트남에서 개최됩니다. 한국의 에스페란티스토들이 적극 참여하기를 기대합니다.”


    1994년에는 서울에서 제79차 세계에스페란토대회가 열렸다. 이듬해 핀란드 대회에서는 한국인 이종영 교수가 회장으로 선출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경북 청도에 있는 남강서원에 ‘남강에스페란토학교’가 세워져 봄, 가을 정기 강좌가 개설됐다. 2000년대 들어서는 원광대와 한국외대가 에스페란토를 정식 교과목으로 채택했다.

    세계 각국인과 형제애 느끼며 대화

    이중기 원장은 수강생들에게 수시로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복습하라고 독려하기 위해서다. ‘에스페란토로 말하기’라는 책을 샀더니 부록으로 회화 내용을 녹음한 CD가 있었다. 출퇴근 시간에 CD를 들었더니 처음엔 무척 생소했다. 그러나 반복 청취하니 조금씩 귀에 들어왔다.

    세 번째 수업일인 8월19일, 어느 수강생이 바나나를 사왔다. 개강일부터 먹을거리가 풍성했다. 함께 먹을 음료수, 빵, 우유 등을 사오는 수강생이 줄을 이었다. 에스페란토의 취지인 ‘형제애’가 느껴졌다.

    수업 후반부에 또 인터넷을 통해 외국인 에스페란티스토와 실전 회화를 나누었다. 이번엔 일본인 쓰구루씨. 수강생은 돌아가며 서툰 에스페란토로 대화를 시도했다. 몇몇 수강생은 사전을 들추어 단어를 확인하고 질문 내용을 정리했다. 구마모토에 사는 쓰구루씨는 며칠 전에 브라질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고 한다. 브라질에서는 평소 인터넷으로 자주 대화를 나누던 에스페란티스토 친구가 숙식을 제공하고 안내를 자청했다고 한다. 미혼 남성인 그는 컴퓨터 앞에 앉아 세계인을 대상으로 에스페란토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취미다. 덕분에 각국의 친구들이 초청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고구려 역사전문가인 서길수 서경대 교수는 에스페란토 덕분에 고구려사에 몰입하게 됐다고 한다. 한·중 수교 이전에 에스페란토 행사 관련 초청으로 중국에 있는 옛 고구려 영토를 방문했을 때 문화재 사진을 다수 촬영해왔다. 이 사진을 국내 사학자들에게 보여주었더니 고구려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감탄하더라는 것이다. 경제학자인 서 교수 자신도 자료 분석에 열정을 쏟다가 고구려사 연구에 매달리게 됐다고 한다. 서 교수와 함께 문화 유적지 답사여행을 다녀온 조경애 씨는 “에스페란토가 매우 쓸모 있는 언어라고 들어 이번 200기에 수강했다”고 밝혔다.

    대학생 때 에스페란토에 입문한 언론인 출신 박강문 대진대 교수는 일선 기자 시절인 1980년 스웨덴에 출장 갔다가 스웨덴에스페란토연맹 린드블륨 회장을 인터뷰해 서울신문에 크게 보도했다. 인터뷰 장면을 목격한 다른 한국 기자들이 “박 기자가 언제 스웨덴어를 배워 저렇게 유창하게 말하느냐”고 물으며 놀랐다고 한다. 린드블륨 회장은 훗날 한국인 여성 에스페란티스토와 결혼했다. 박 교수는 자멘호프 전기인 ‘바벨탑에 도전한 사나이’의 한국어판을 공동 번역하는 데 동참하기도 했다.

    이중기 원장은 수강생들에게 자신이 번역한 ‘아름다운 꿈’이란 소설을 선물로 주었다. 저자는 불가리아의 에스페란티스토 작가인 율리안 모데스트. 22개 단편소설을 묶은 책으로 서정적인 색채가 짙은 작품이 대부분이다. 원작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어릴 때 어머니가 한국 동화책을 선물하셨는데 아름다운 삽화를 잊을 수 없다”면서 “어머니는 그 재밌는 동화를 소리 내어 읽어주셨고 몇 편을 외우도록 하셨다”고 한국과의 인연을 밝혔다.

    200기 수강생 전원이 개근

    종강일인 8월26일, 수강생 10명이 모였다. 개강 이후 단 1명도 결석하지 않았다. 이날에도 어느 수강생이 포도를 갖고 와 나누어 먹으며 공부를 했다. 강사의 선창에 따라 읽는 에스페란토 발음이 이제 조금 유창해졌다.

    200기 수료를 기념해 8월30일 오후에 서울 청소년 유스호스텔에서 국제 심포지엄이 열린단다. 주제는 ‘아시아 에스페란토 운동 발전방안’인데 한·중·일 3개국 발제자의 발표와 토론이 진행된다. 그 자리에서 200기 수료생이 짤막하게나마 에스페란토로 인사를 한다고 한다. 수강생들은 긴장했다. 불과 한 달 배운 실력으로 마이크 앞에서 에스페란토를 말할 수 있을까. 이 원장은 “너무 걱정할 것 없다”며 용기를 북돋운다.

    수료생 대표로 10문장 정도의 답사를 한 정유항(21·숙명여대 국어국문학과 3년)씨는 “에스페란티스토라는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을 느낀다”면서 “전 세계의 다른 에스페란티스토 역시 이 언어가 권력이 지배하지 않는 평등의 언어라는 면을 높이 샀기에 에스페란토를 배우는 수고를 기꺼이 쏟은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민간외교관 되다

    인터넷 시대에 영어의 힘이 더욱 커지긴 하지만 에스페란토도 인터넷 덕분에 확산 붐이 일고 있다. 인터넷의 에스페란토 홈페이지 수는 1998년 320개에서 2003년 788개로 늘었고 2008년 현재 1000개를 넘었다. 미국 하트퍼드대 영어과 교수이며 UEA 회장을 지낸 험프리 통킨 박사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넷 영향으로 중국, 브라질 같은 나라에서 에스페란토 사용인구가 급증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인도의 하이데라바드대 언어학과 교수인 프로발 다스굽타는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교역 언어와 정치 언어가 영어라는 데 대한 불만이 고조되면서 그 반작용으로 에스페란토가 성행하는 측면이 있다”면서 “세계화 때문에 세계인들이 에스페란토를 사회적 아이디어로서도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유럽연합(EU)에서는 EU 사무국의 예산 가운데 상당 액수가 통·번역 비용이어서 EU 공용어로 에스페란토를 도입하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대학생인 200기 수강생 김태우 씨는 이번 여름 방학 때 한국을 찾은 외국인 에스페란티스토들을 안내한 경험을 쌓았다. 그는 ‘에스페란토와 청년 문화’란 자료를 복사해서 주위에 나누어준다. 이 자료엔 에스페란토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과 함께 인터넷으로 배우는 에스페란토 사이트가 소개돼 있다. 가장 인기 있는 사이트로는 http://ko.lernu.net 을 추천했다.

    강의를 마치고 이 원장은 수강생에게 수료증과 에스페란토 관련 책자 5권을 주었다. 종강하고 보니 등록할 때 낸 수강료는 사실상 책값이므로 무료 강좌인 셈이다. 수강생들은 저마다 에스페란토를 더 연마해서 민간외교관으로 한국을 알리는 데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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