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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사기열전(史記列傳)’④

백이열전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 아름답다 할 수 있나

  • 원재훈│시인 whonjh@empal.com│

백이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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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이열전
일본의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자유인 사마천과 사기의 세계’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유는 사회적 환경의 문제이지만 그 이상으로 개인이 지닌 신념의 문제다. 자유가 주어졌기에 자유롭다는 것은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주어진 것은 반드시 유한하기 때문이다. 자유 중에서도 말하는 자유가 가장 우선한다. 현재 공산권 여러 나라에 자유가 있는지 없는지 문제가 되는데, 말하는 자유가 없다는 것은 가장 큰 결함이다. 이를 변호하는 사람들이 공산권에서는 말하는 자유 대신에 빈곤으로부터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속임수다. 감옥에서도 밥은 먹을 수 있지만 그것을 자유라고 부를 수 있을까? 또한 그것은 주어진 자유다. 비록 언론의 탄압이 심한 정치체제 아래서도 개인이 진정으로 자기의 자유를 지킬 마음이 있다면 거기에는 자유가 존재하는 것이다. 전제정치 체제라든지 황제정치라고 불리는 중국 역대의 중압을 견디며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은 사례는 많지만 그 최초의 사례로 사마천은 백이와 숙제를 거론했던 것이다.”

이런 문장도 있다. “제나라의 경공은 4000필의 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죽던 날 인민들은 그이가 칭찬할 만한 귀감인지 아닌지 몰랐다. 이와 달리 백이와 그의 동생 숙제는 수양산 자락에서 굶어 죽었다. 인민들은 오늘에 이르러서도 두 사람을 칭송해 마지않는다. 그들의 행동에 부끄러움이 없어 사람들은 그들의 절개를 높이 산다. 모두들 부끄럽게 살기 때문에 백이와 숙제 같은 인물이 부각된다.”

“그중에 자신의 포부를 굽히지 않고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않은 이는 백이와 숙제일 게다! ” 공자는 ‘논어’에서 모두 4번에 걸쳐 백이와 숙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공자의 중심사상인 ‘인을 추구해서 인을 얻었다’고 한 대목이다. 공자가 인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군자요 성인의 반열에 오른 것을 의미한다. 인을 공동체의 통합으로 번역하건, 자유로 번역하건 간에 공자는 백이와 숙제가 아무런 원망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사마천은 ‘과연 그런 것이냐?’ 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하늘을 원망하는 시 채미가를 발굴해 제시하면서 독자에게 묻는다. ‘이 노래로 미루어볼 때 백이와 숙제가 원망한 것인가, 원망하지 않은 것인가?’ 독자 중 한 사람인 나는 대답한다. ‘원망했군요.’ 이것이 범부들의 생각이다. 자신의 소신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상을 떠나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다면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도, 호랑이를 타고 산중을 돌아다니는 산신이 되어 세상을 떠난 것과는 다르다.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 만물이 조화롭게 움직이던 전설 속의 신농(神農) 시절을 그리워했다. 이 땅의 사람으로서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운명의 길을 걸어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세상을 버렸지만, 그것은 더 좋은 세상이 없음에 대한 한탄이기도 하다. 즉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으니 선비의 절개와 지조를 지키고, 부끄러움보다는 굶어 죽기를 택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중요한 덕목이다.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은 부끄러움이 있기에 옷을 입고, 예의를 갖추고, 때로 거짓말도 하고, 정직하기도 하다. 부끄러움이야말로 인간의 조건인 것이다.



더불어 사마천은 한탄한다. ‘하늘의 이치는 사사로움이 없어 항상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고 했지만, 백이와 숙제같이 착한 사람이 굶어 죽는 것이 하늘의 이치란 말인가? 불의에 대해 불의하고, 공명정대하게 사는 사람들이 왜 형을 당하고 굶어 죽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사마천의 한탄이 바로 자기 자신의 처지를 빗댄 것임을 알아챌 수 있다. 그 자신 선비로서 절개 있게 행동했건만(사마천은 이릉의 사건에서 소신에 따라 천자에게 직언했다. ‘신동아’ 2월호 참고)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받았다. 사마천은 동병상련 이심전심으로 백이와 숙제를 바라본다. 열전의 맨 앞자리에 이들을 소개한 것은 앞으로 열전을 기술하는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착한 사람이 잘사는 세상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인간 유형을 보여줄 테니 독자 스스로 방향을 잘 살피고 가라, 소신을 굽히지 말라.’

인간에겐 이름이 전부

그는 공자의 70 제자 중 학문을 제일 좋아했다는 안연 이야기를 한다. 안연은 가난에 지쳐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사는 동안에도 거지나 다름없이 생활했다. 학문을 좋아하고 이치에 맞게 착하게 살다간 사람이다. 반면에 춘추시대 말기의 도척은 천하의 도둑놈에다 살인을 밥 먹듯 하고 심지어 사람의 간을 회쳐 먹었다는 인간 말종인데 천수를 누리고 침상에서 죽었다고 한다. 도척에게 어떤 덕행이 있고 안연에게 어떤 과오가 있었던 말인가? 도대체 세상은 어찌 생겨 먹은 것인가, 인간의 존재가치는 무엇인가?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사기열전’을 이렇게 읽었다.

“도대체 우리의 삶은 무엇을 위해서일까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인간의 불멸을 믿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을 규정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육체에 무게를 둔다면 그것은 생물적 인간이다. 가진 물건에 무게를 둔다면 그것은 세속적 인간이다. 이것들은 그 사람이 죽으면 모두 소멸하고 만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인간은 역사적 인간이다. 죽어도 죽지 않는 인간이 거기에 있다. 이 불멸의 인간을 사후까지 살려두는 것은 바로 그 이름에 의해서다. 중국인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이름은 몸에 붙인 명찰이 아니다. 바로 인간 그 자체다. 적어도 인간 그 자체와 분리할 수 없고 이름과 본질을 나눌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람을 아는 것은 그 육체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름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적 인간에게는 이름이 전부다. 사람은 그 이름에 의해 불멸할 수 있다. 사마천은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불멸을 굳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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