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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지식소매상이 아닌 정치인 유시민의 책

  • 이승협│한국노동행정연구원 교수 solnamu@gmail.com│

지식소매상이 아닌 정치인 유시민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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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소매상이 아닌 정치인 유시민의 책

‘후불제 민주주의’유시민 지음/ 돌베개/ 380쪽/ 1만4000원

독일에서 가장 명망 있는 문학평론가인 마르셀 라이히 라니츠키는 독일 공영방송인 ZDF에서 문학비평 프로그램 ‘문학 4중주’를 1988년부터 2002년까지 무려 14년 동안 진행해왔다. 특유의 입담과 촌철살인의 독설로 수많은 문학가를 쥐락펴락하던 라니츠키는 마지막 방송에서 오로지 방송을 위해 볼 만하지 않은 책을 억지로 읽어야 하는 괴로움을 내비쳤다.

유시민의 ‘후불제 민주주의’를 보면서 라니츠키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정치활동을 해온 정치인 유시민이 쓴 책이기에 그나마 보통 정치인들의 책과는 무언가 다를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결코 정치인의 책에 손이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선 기대에 부응하는 측면을 살펴보자. ‘후불제 민주주의’는 스스로 지식소매상을 표방하는 저자가 갖고 있는 개인적 재능인 대중적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준다. 지식소매상이란 말 그대로 자신이 축적한 전문적 논의를 대중이 알기 쉽고 다가서기 쉽게 풀어주는 역할을 하는 전문가를 말한다. 따라서 당연히 대중적 글쓰기가 가능해야 한다. 저자는 ‘후불제 민주주의’에서 헌법이라는 딱딱한 법제도적인 규정을 소재로 삼았지만 에세이라는 형식으로 풀어내면서 다양한 소재와 주장을 결합시키는 대중 접근 전략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있다. 저자가 ‘항소이유서’‘거꾸로 읽는 세계사’‘부자의 경제학 빈자의 경제학’ 등에서 유감없이 보여준 깔끔한 글솜씨와 논리 정연한 전개를 이 책에서도 그대로 볼 수 있다.

뛰어난 지식소매상

내용에서도 대한민국 헌법이 갖는 절대적 권위를 자기 주장의 정당성으로 활용하는 전술적 치밀성이 돋보인다. 한국사회에서 누가 감히 헌법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단 말인가? 특히 저자가 타깃으로 삼는 보수세력에게 헌법이란 어쨌든 형식적으로는 마치 성경과 같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더욱 효율적이다. 이러한 전략과 전술을 극대화하기 위해 ‘후불제 민주주의’는 크게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헌법의 당위’는 자기 주장의 권위와 정당성을 획득하고 동시에 자신을 자유주의자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으며, ‘2부 권력의 실재’에서는 이에 기초해 본격적으로 자기 경험과 주장을 전개한다.

헌법의 조항을 하나씩 소개하고 풀어내면서 자기 주장의 근거가 헌법에 있음을 천명하는 전략은 전통이나 권위를 쉽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속성, 즉 베이컨의 ‘극장의 우상’을 활용한 것이다. 절대적 권위를 갖는 헌법적 규정의 규범적 당위성을 먼저 얘기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저자의 주장이 마치 헌법과 유사한 논리적 연장선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실제로 이러한 전략은 성공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런 방식이 아니었다면 일부 사람들에게 전형적인 모사꾼 내지는 궤변가로 인식되는 정치인 유시민의 발언과 주장에 대해 훨씬 더 감정적인 반응이 나타났을 것이다.

저자는 1부에서 자유와 대한민국의 주권을 받아들이고,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는 관용과 다양성을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경쟁을 받아들이면서 복지를 이야기하고, 애국과 법치주의를 언급하고 재산권의 정당성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책을 유심히 읽어보면 이러한 개념들의 사용에는 대부분 전제가 달려 있다.

예를 들어 저자가 말하는 애국은 보수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애국과는 다른 의미다. 보수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애국과 애국주의는 국가에 대한 복종이라는 국가주의에 기초를 둔다. 이러한 형태의 보수주의적 애국과 애국주의는 실제 역사과정에서 타 인종과 타 민족에 공격적인 배타적 인종주의로 발현되었다. 서구 유럽의 지성계가 민족주의, 국가주의, 애국, 애국주의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일본의 군국주의나 독일의 파시즘이 모두 보수주의적 애국주의 또는 배타적 민족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의 애국 개념과 달리, 저자가 주장하는 애국은 헌법애국주의(Verfassungspatriotismus)에 기초를 두고 있다. 저자는 독일 사회학자인 위르겐 하베르마스가 우파의 배타적 민족주의에 근거한 공격적 애국주의를 대체하기 위해 헌법애국주의 개념을 고안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헌법애국주의란 원래 독일 정치학자인 돌프 슈테른베르거가 1982년 책 제목으로 사용했던 용어다. 슈테른베르거는 이주노동자의 국적 문제와 관련해 독일이 폐쇄적 민족주의가 아닌 다문화적 열린사회의 새로운 공동체적 가치를 가져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 헌법애국주의 개념을 사용했다. 단순화해서 말하면, 다문화주의를 수용하면서, 헌법을 다문화주의를 유지시키는 공통의 규범으로 삼자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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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협│한국노동행정연구원 교수 solnamu@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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