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호

인류와 독감바이러스의 ‘100년 전쟁’

  • 이한음│과학평론가 lmgx@naver.com│

    입력2009-06-05 11: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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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이러스는 숙주가 죽는 것을 원치 않는다. 숙주가 죽으면 자신도 죽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이와 재편성을 일으킨 바이러스는 압도적인 치사율을 보이며 전세계적인 유행병으로 번져나간다. 인류가 새로운 바이러스에 대항할 무기를 꺼내들면, 다음 순간 바이러스는 새로운 변이를 준비한다. 1918년의 스페인 독감에서 2009년의 신종 플루에 이르기까지 새와 인간, 돼지와 인간을 오가며 벌어진 인류와 바이러스의 전쟁사(史).
    인류와 독감바이러스의 ‘100년 전쟁’

    4월26일 신종 인플루엔자의 진원지인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들이 당초 예정된 미사가 취소된 과달루페 성당 앞에서 수호성인인 과달루페 성모를 쳐다보며 경의를 표하고 있다.

    1917년 4월6일, 미국은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고 선언했다. 자국 상선들이 독일군의 잠수함에 계속 공격당하는 꼴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서였다. 미국의 참전을 계기로 지루하던 전세는 서서히 역전되기 시작했고, 연합국은 독일과 헝가리를 비롯한 동맹국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미국의 이 적극적인 참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전쟁’을 인류 전체에게 선사하며 엄청난 비극으로 이어졌다. 1918년 미국은 프랑스를 비롯한 각지의 전선으로 군인을 실어 날랐다. 이 대규모 인구이동이 시작된 지 약 한 달 뒤, 세계 각지에서 독감이 급속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활발하게 이뤄지는 철도와 해상 운송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구실도 했다. 좀 과장하자면 지구 전체에서 이 독감이 발생하지 않은 곳은 고립된 섬뿐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훗날 스페인 독감이라고 불리게 되는 이 독감에 전세계에서 약 5억명이 걸렸고, 그중 5000만~1억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 1918년 9월부터 12월까지 약 16주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독감이 처음 출현한 곳은 1918년 1월 미국 캔자스주의 해스켈이었다. 5만여 명의 군대가 훈련받던 장소였다. 그 뒤로 몇 달에 걸쳐 유럽 각지의 전선에서 병사들이 드문드문 앓기 시작했다. 이때만 해도 감염자 수는 적은 편이었다. 비록 감염되면 심하게 앓았지만 사망률은 비교적 낮았다.

    그 와중에 미국에서는 전쟁 준비가 착착 진행되었고, 철도 등을 통한 물자와 인구의 이동이 활발해졌다. 그에 따라 독감도 각지의 병영과 도시로 급속히 퍼졌다. 이어서 4~8월에 걸쳐 바이러스에 감염된 미국 병사들이 배를 타고 유럽으로 향했다. 그들이 프랑스에 상륙하면서 바이러스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8월 말, 바이러스에 돌연변이가 일어났다. 유례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병원성과 전염성을 띤 이 돌연변이 바이러스는 프랑스와 미국의 항구도시에서 거의 동시에 출현했다. 새 바이러스는 곧 배편으로 다른 항구들로 퍼졌고,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로도 향했다. 전시라서 보안을 이유로 검열이 심했기 때문에 독감이 유행한다는 소식은 언론에 거의 실리지 않았다. 다만 당시 중립국이던 스페인은 언론 통제가 덜했기에, 독감 발생 소식은 스페인을 통해 세계 각지로 퍼졌다. 이 독감이 뜬금없이 스페인 독감이라고 불리게 된 것도 아마 그 때문일지 모른다.

    12월 초까지 미국에서 감염자 수는 약 2000만명으로 늘었고, 사망자는 45만명에 달했다. 미국 정부는 적국과 전쟁을 하는 와중에 바이러스와도 전쟁을 치러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여럿이 모이는 행위가 금지되고, 학교와 극장이 문을 닫았으며, 병원에만 사람이 바글거렸다. 도시는 유령도시처럼 변했다. 더 이상 유럽 전선으로 군대를 보낼 여력도 없었다. 비좁은 선실에서 오밀조밀 부대끼며 지내야 하는 배라는 공간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전파되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적(敵)의 정체를 찾아서

    스페인 독감이 창궐하던 당시, 인류는 독감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라는 ‘적(敵)’의 정체가 파악된 것은 그로부터 15년이 더 흐른 뒤였다. 1933년 가벼운 독감이 유행하고 있을 때, 영국 국립의학연구소의 패트릭 레이들로 연구진은 사람의 점액을 여과지로 잘 걸러낸 뒤에 실험동물인 흰족제비에게 주었다. 그러자 흰족제비는 독감에 걸렸다. 세균 같은 병원체는 여과지를 통과할 수 없다. 따라서 인플루엔자의 원인인 병원체는 세균보다 작은 바이러스임이 분명했다.

    이 연구의 토대를 제공한 사람은 미국의 리처드 쇼프였다. 1918년 9월 미국 정부기관 소속의 한 수의사는 돼지들이 시름시름 앓는 현상을 목격했다. 수많은 돼지가 전염병에 걸려 앓다가 죽어나갔다. 그는 그 전염병이 당시 사람에게 유행하고 있던 병과 같은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돼지가 독감에 걸렸다는 것이었다.

    돼지 인플루엔자는 몇 년 동안 계속 유행했고, 바이러스 학자 리처드 쇼프도 그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돼지의 호흡기에서 채취한 점액을 거른 물질이 다른 돼지를 인플루엔자에 감염시킬 수 있음을 알았다. 즉 돼지 인플루엔자의 원인인 바이러스였다. 그는 1918년의 범(汎)유행병(팬데믹)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몸에서 추출한 항체로 돼지 인플루엔자를 막을 수 있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그는 1918년에 유행한 사람 인플루엔자가 돼지의 인수(人獸)공통전염병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했지만, 두 인플루엔자를 연관지을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다.

    그가 찾지 못한 단서가 발견된 것은 다시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1997년 제프리 토벤버거 연구진은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의 기원을 추적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들은 1918년 독감으로 죽은 사람을 부검할 때 만든 폐 조직 슬라이드를 발견했다. 거기에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잔해가 들어 있었다. 그들은 1918년 알래스카에서 죽어 영구동토층에 묻혀 있던 시신의 폐에서도 같은 바이러스의 잔해를 찾아냈고, 이를 분석해 바이러스의 유전자 서열을 일부 알아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 돼지, 조류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서열들과 비교했다. 그 서열은 돼지의 초기 독감바이러스 서열과 비슷했다.

    인류와 독감바이러스의 ‘100년 전쟁’
    2001년 호주의 마크 깁스 연구진은 1918년 인플루엔자 유전자 중 하나가 다른 두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유전자들이 재조합되어 생긴 잡종 형태임을 발견했다. 그것은 1918년에 그 병이 대발생하기 직전에 어떤 두 조상 유전자의 짜깁기가 이루어져서 새 유전자가 생겼고, 두 조상 유전자 중 하나가 돼지를 감염시킨 균주임을 시사했다. 바로 이 재조합이 팬데믹을 일으킨 방아쇠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재조합 유전자는 바이러스의 껍데기를 만드는 단백질인 헤마글루티닌(H)의 암호를 담고 있었다.

    독감바이러스는 RNA로 된 유전물질을 단백질 껍데기가 감싼 형태다. 껍데기는 헤마글루티닌과 뉴라미니다아제(N)라는 두 단백질로 이루어진다. H는 바이러스가 숙주세포로 들어가도록 하는 일을 하고, N은 새로 생긴 바이러스를 세포 밖으로 내보내는 일을 한다. 바이러스의 병원성은 주로 두 단백질의 변이에 따라 달라진다. H는 바이러스 껍데기에 가장 풍부한 단백질로서 숙주의 면역계가 방어할 때 공략하는 1차 표적이기도 하다. 스페인 독감바이러스에서 이 단백질은 구조가 조류의 것과 비슷했다. 그것이 팬데믹을 일으킨 이유일 수 있었다. 당시 인류는 그런 균주에 면역이 돼있지 않았다.

    이런 연구 결과들은, 1918년의 독감바이러스가 어쨌든 원래 인간의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서 유래한 것이 확실하지만 지금까지 연구된 그 어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와도 유전적으로 다르다. 그것이 대발생 직전에 어떻게 유래했는지는 아직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어렵게 찾은 균형이 깨지면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는 말이 있듯,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라는 적과 맞서 싸우려면 당연히 적을 더 잘 알수록 유리할 것이다. 1918년의 인류는 아예 적의 정체조차 모른 채 당했지만, 지금은 적어도 정체는 안다. 최근의 신종 플루 사례에서 보듯 적이 어디에서 어떤 경로로 출현했는지를 놓고 설왕설래가 벌어지기도 하지만, 이는 대책을 수립하는 데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 1997년 조류에서 인간에게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 감염이 일어나기 전까지, 인류는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거의 생각도 못했다. 조류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H5N1)는 진화적으로 정체 상태에 있고, 대부분 별다른 감염 증상이 없이 지나가는 종류라고 여겼다. 인간에게 심한 증세를 일으키는 것은 으레 인간을 감염시키곤 하는 H1N3형뿐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1997년 홍콩에서 H5N1이 발생하여 가금류와 사람 18명을 감염시키자 상황이 달라졌다. 새로운 팬데믹이 출현할 수도 있겠다 싶어 각국은 가금류를 살처분하는 등 부랴부랴 조치를 취했다. 거기에다가 최근에 등장한 신종 플루는 또 어떤가? 몇 개월이 채 지나기도 전에 수천 명이 감염되었고, 인간끼리 전파되는 것이 확실하다. 이제 인플루엔자는 더 이상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강력한 적이 되었다.

    흔히 말하는 감기와 독감은 다르다. 감기는 다양한 바이러스로 콧물, 열, 호흡기 장애 등이 생기는 가벼운 형태의 병을 뜻한다. 반면에 독감, 즉 인플루엔자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병을 말한다. 독감은 일반 감기에 비해 전염성이 높고 호흡기에 일으키는 증상도 더 심하다. 주로 계절적으로 국지적으로 나타나지만, 때로 예기치 않게 대규모로 발생하여 세계적으로 유행하곤 한다. 이 같은 세계적인 유행은 주기성을 띤다고 알려져 있다. 그중 가장 심했던 것이 바로 서두에서 살펴본 1918년의 팬데믹이었다.

    바이러스는 본래 생물의 세포를 강탈하여 자신의 사본을 만드는 공장으로 삼는 존재다. 불필요한 유전자는 다 버리고 자신을 번식시키는 데 필요한 유전자만 남긴 고도로 효율적인 존재다. 하지만 바이러스도 살아남아 번식하려면 숙주가 있어야 한다. 숙주를 몰살시킨 바이러스는 자신도 살아남지 못한다. 그래서 지나치게 높은 병원성은 바이러스 자신에게도 해롭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미래를 내다보며 계획하는 존재가 아니다. 때로는 뜻하지 않게 강력한 바이러스가 출현하여 숙주에 큰 피해를 줄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팬데믹이다. 그러다가 숙주가 대처 능력을 키우거나 바이러스가 더 약한 형태로 변하면 다시 적당한 균형상태가 회복된다. 1918년의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는 그런 상태로 돌아갔지만, 그렇지 못한 사례도 있다. 20세기 후반부에 등장한 에이즈 바이러스다.

    1997년에 발생한 조류인플루엔자와 처음에 돼지에서 유래했다고 추정한 최근의 신종 플루는, 독감이 사실은 인간만의 질병이 아니라 사람과 동물에게 함께 나타나는 인수공통전염병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것은 1만년 전 인간이 가축을 기르기 시작하면서 동물로부터 얻은 병일지도 모른다. 한곳에 정착해 농경생활을 하면서 가축과 늘 접촉하다보니 얻은 병들이다. 우리가 동물로부터 얻은 병은 100가지가 넘는다. 그런 병은 인간이 동물로부터 단백질을 얻기 위해 치르는 대가라 할 수 있다. 독감과 그에 따른 폐렴이 미국에서 일곱 번째로 많은 사망 원인이라고 하니, 대가치고는 꽤 큰 셈이다.

    독감바이러스는 오르토믹소바이러스과에 속하며, A형, B형, C형이 있다. B형은 거의 인간만 걸리며, C형은 인간과 돼지가 걸린다. C형은 증상이 약하며 넓은 지역에서 유행하는 일이 거의 없다. B형은 A형보다는 약하지만 때로 유행병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래서 독감 예방 백신을 접종할 때 A형과 B형 균주를 섞어 쓰기도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A형이다. A형은 숙주의 범위가 아주 넓다. 인간뿐 아니라 여러 조류와 포유류에 감염된다. 하지만 본래 이 바이러스의 숙주는 야생 조류다. 특히 물새들은 이 바이러스의 천연 저장고라고 할 수 있다. 셋 중에서 A형 바이러스가 병원성, 즉 병을 일으키는 능력이 가장 뛰어나다.

    인류와 독감바이러스의 ‘100년 전쟁’

    5월5일 중국 방역원 직원이 멕시코인 승객들을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으로 수송할 앰뷸런스들 옆을 걸어가고 있다. 멕시코 정부는 신종 인플루엔자A 감염 우려로 격리 수용된 멕시코인 70명을 본국으로 송환하기 위해 전세기 1대를 중국으로 보냈다. 이에 대해 펠리페 칼데론 멕시코 대통령은 “중국 정부가 감염 증상이 없는 사람까지 격리하는 것은 멕시코인에 대한 차별”이라고 비난했다.

    대변이와 재편성

    A형은 바이러스의 껍데기를 이루는 두 단백질, 헤마글루티닌(H)과 뉴라미니다아제(N)의 변이에 따라 세분된다. 헤마글루티닌은 16종류, 뉴라미니다아제는 9종류가 있으며, 둘이 조합되어 다양한 형태를 낳는다. 현재 유행하는 것은 H1N1, H1N2, H3N2 세 종류다. 1930년 리처드 쇼프가 처음으로 돼지에게서 분리한 독감바이러스와 1933년 영국 연구진이 최초로 분리한 인간의 독감바이러스는 둘 다 A형이었다.

    70여 년에 걸쳐 집중적으로 연구가 이루어진 덕분에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A형은 그 어느 바이러스보다 잘 알려져 있다. 이 바이러스는 여덟 조각으로 끊어진 RNA와 그것을 보호하는 단백질들로 이루어진다. RNA 각 조각에는 유전자가 하나씩 있다.

    바이러스에는 RNA를 복제할 때 오류를 바로잡는 장치가 없기에, 복제될 때 생긴 오류는 그대로 확정되어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계속 유전자 조성이 바뀌며, 그에 따라 병원성도 달라진다. 이렇게 유전자 조성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독감에 한번 걸렸다고 다음에 찾아오는 독감에 면역성이 생기지 않는다. 우리는 해마다 독감에 반복해서 걸리고, 올해의 예방 백신은 내년이면 무용지물이 된다.

    또 유전체가 여덟 조각으로 나뉘어 있으므로, 한 생물이 동시에 두 바이러스 균주에 감염된다면 양쪽의 유전체 조각들이 서로 뒤섞여서 조합되어 새 바이러스를 형성할 수 있다. 이를 재편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재편성 과정을 통해 새 종(種)을 감염시킬 수 있는 새로운 바이러스가 출현하기도 한다. 이름하여 대변이다. 대변이는 팬데믹을 일으키는 균주를 형성할 수도 있다. 20세기에 독감바이러스 A형은 세 차례 팬데믹을 일으켰는데(1918년, 1957년, 1968년), 모두 이런 대변이가 관여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바이러스가 숙주에 침입하려면 먼저 숙주세포에 달라붙어야 한다. 바이러스는 세포 표면의 수용체에 달라붙는데, 아주 까다롭다. 아무 수용체에나 달라붙는 것이 아니라 수용체를 아주 까다롭게 고르는 것이다. 이를 특이성이라고 부르는데,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대개 인간에게 전파되지 않은 것은 바로 이 특이성 때문이다. 특이성은 바이러스가 다른 숙주 종으로 건너갈 수 없게 만드는 장벽이다.

    그래서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인간을 감염시키려면 돼지 같은 중간 숙주를 거쳐야 한다는 이론이 나왔다. 여기서 돼지는 일종의 비빔밥 그릇이라고 할 수 있다. 조류의 바이러스와 인간의 바이러스가 함께 돼지에 감염되면, 바이러스들이 증식될 때 서로의 유전체 조각이 뒤섞여서 재편성될 수 있다. 그러면 인간을 감염시킬 수 있는 형태의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중간 숙주 없이 직접 인간을 감염시키는 유형도 있다. 1997년 홍콩에서 발생한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중간 숙주 없이 인간을 감염시켰다.

    1918년의 바이러스가 최근에 유행한 H5N1 조류인플루엔자나 신종 플루와 관련이 있을까. 신종 플루는 아직 잘 모르지만, 1918년의 바이러스는 사람을 죽인 현재의 고병원성 H5N1 조류 바이러스에도 있는 몇 가지 아미노산 변화를 지니고 있다. 현재의 사람독감 바이러스와 비교할 때 1918년의 바이러스는 폐조직에서 바이러스 입자를 거의 4만배 더 만들었다. 그만큼 기관지와 허파꽈리에 심한 피해를 주었다. 인플루엔자 전문가 제프리 토벤버거는 H5N1 바이러스나 1918년의 바이러스나 모두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이며, 1918년의 균주는 인간 사이에 효율적으로 전파할 수 있도록 적응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확전의 가능성

    돼지가 걸리는 독감은 인플루엔자A형이 일으키는 호흡기 질환이다. 주로 늦가을과 겨울에 발병하며, 사망률은 낮은 편이다. 전형적인 돼지독감 바이러스는 1930년 쇼프가 최초로 분리해낸 H1N1이다. 돼지의 H1N1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감염되는 사례는 드물다. 최근 발생한 신종 플루는 돼지인플루엔자 H1N1과 비슷해서 처음에 돼지독감 바이러스라고 불렀지만, 돼지가 이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증거는 없다. 이 바이러스는 인간끼리 전파되는 인간의 바이러스인 셈이다. 하지만 이 균주가 어떻게 기원했는지에 대해 인류는 아직 아는 바가 없다.

    돼지는 H2N3 같은 다른 종류의 독감바이러스도 지니고 있다. 인간에게서는 1968년 이래로 이 형이 발견된 적이 없으므로, 이것이 인간에게로 전파된다면 팬데믹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조류인플루엔자도 여전히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사실 신종 플루가 1997년의 조류인플루엔자보다 약하다고 말한다. 5월11일자 세계보건기구(WHO) 통계에 따르면 신종 플루는 30개국에서 4694명이 감염되어 53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감염자 중 치사율이 1.1%다.

    반면에 H5N1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홍콩에서 처음 발견된 지 10년도 안 되는 기간에 동아시아 대부분의 지역으로 퍼졌고, 2005년과 2006년에는 아시아 대부분과 유럽, 근동, 아프리카로 퍼졌다. 2003년에는 한국, 중국, 일본, 대만,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라오스, 베트남에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 H5N1가 출현하여 가금류를 몰살시켰고, 베트남과 대만에서는 인명 희생도 발생했다. 2007년까지 중국, 터키,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이집트, 지부티, 이라크에서도 사망자가 나타났다.

    현재 H5N1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거의 가금류 풍토병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까지 적어도 2억 마리가 넘는 가금류가 살처분되었으며,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입혔다. 이 병은 인간끼리 감염된 사례가 거의 없지만, 2007년 12월1일을 기준으로 65개국으로 퍼졌고, 세계적으로 335명이 감염되어 206명이 사망했다. 치사율이 61%에 달한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H5N1이 팬데믹 위험이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 발생한 H7N7, H7N3 등 다른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도 팬데믹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조류인플루엔자는 야생 새들을 통해 전파되므로 감시와 방제가 쉽지 않다. 균주에 따라 동일한 환경에서도 생존 기간이 차이 날 수 있는데, 물새가 지표수에 배설한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pH, 염도, 수온에 따라 장기간 존속할 수도 있다. 물론 지금까지 인간 감염자는 감염된 조류를 직접 만지거나 다룬 사람이 대부분이며, 지표수가 인간 감염의 원천이라는 증거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WHO는 감염 지역에서 지표수를 그냥 마시거나, 끓이거나 정화하지 않은 물로 닭고기 등을 닦는 일은 피하라고 당부한다.

    인류와 독감바이러스의 ‘100년 전쟁’

    4월29일 스위스 제네바의 세계보건기구(WHO) 본부에서 마거릿 챈 사무총장이 기자회견을 열고 신종 플루 확산 현황을 설명하면서 “모든 인류가 전염병 위협에 놓여 있다”고 경고했다. WHO는 이날 경보수준을 4단계에서 5단계로 상향 조정했다.

    늑대와 양치기 소년

    건강한 사람은 독감에 걸려도 대개 수분을 적절히 섭취하고 잘 쉬면 낫는다. 고열, 두통, 근육통, 기침, 콧물 등에는 으레 쓰이는 처방약이 나와 있다.

    항바이러스 약이 독감 치료에 효과적이지만, 증세를 완화시키는 데 큰 효과가 있으려면 증상이 나타난 지 24~48시간 안에 투여해야 한다. 그러나 초기단계에서는 증상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거나 진단이 잘못될 가능성이 있다. 항바이러스 약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아무 때나 쓰는 것은 낭비이므로 언제 써야 할지 결정하기가 까다로울 수 있는 것이다.

    최근의 조류인플루엔자와 신종 플루에 항바이러스 제제로 으레 처방되는 약품은 오셀타미비르라는 성분이 든 타미플루다. 오셀타미비르는 뉴라미니다아제를 억제하는 작용을 한다. 하루에 150mg씩 5일간 투여하며, 입으로 먹는다. 현재로서는 인플루엔자바이러스와의 전쟁에 나서는 인류의 가장 큰 무기인 셈이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는 일부 지역에서 몇몇 H5N1 균주가 이 약물에 내성을 띠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인도네시아의 균주는 지난 몇 년 동안 캄보디아에서 유행한 균주보다 20~30배 더 내성을 보인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약을 쓸수록 점점 더 강한 내성을 지닌 바이러스가 출현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따라서 대발생에 대비하여 타미플루 비축량을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백신이나 항바이러스 약물을 개발하려는 노력에도 힘을 써야 한다. 하나의 무기가 무력화하면 새로운 무기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또한 바이러스의 유전체를 분석하는 일에도 힘을 쏟아야 한다. 숙주 선택성, 유전자 재편성, 항원 소변이, 바이러스 내성에 일어나는 변화를 추적 감시하거나, 백신 후보물질 개발에 쓰일 바이러스 균주를 확보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바이러스의 자연사나 전파가 이뤄지는 경로를 확인하는 작업도 효율적인 대책을 수립하는 데 중요하다.

    사스(SARS), 조류인플루엔자 등 최근 들어 잇따라 터져 나오는 새로운 질병들은 그래도 적절한 대응 노력 덕분에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전문가들은 균형이 깨져 팬데믹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경고를 계속하고 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보니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는 경고 피로감마저 나타나고 있다. 위험을 알리는 전문가를 늑대가 나타났다고 소리치는 양치기 소년 취급하는 분위기가 이따금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양치기 소년 우화의 교훈은 과연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전부일까. 막상 늑대가 나타난 뒤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을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경각심이 더욱 긴요할 수밖에 없다.

    어떤 한 지역에서 비교적 높은 비율로 흔히 나타나는 병을 풍토병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말라리아는 아프리카의 풍토병이다. 그와 달리 어떤 시기에 갑자기 발생하여 크게 번지는 병이 있다. 이런 병 가운데서 지역이 비교적 한정된 것을 유행병이라고 한다. 이보다 더 넓게 지구 전역으로까지 퍼지는 병은 범유행병 또는 세계적 유행병이라고 하며, 앞서 말했듯 이를 영어로는 팬데믹(pandemic)이라고 한다. 최근의 사스, 조류인플루엔자, 신종 인플루엔자A는 이러한 팬데믹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일 수도 있다. 유행병들은 물론 위협적이지만 거꾸로 대처 방안을 마련하고 기존의 대응수단을 다듬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결전에 임하는 자세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는 두 차례 세계대전의 희생자보다 더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뒤 1919년 갑자기 사라졌다. 한 전문가는, 이 정도 영향력을 지닌 바이러스가 지금 세계로 퍼진다면 20억명이 넘는 인구가 감염되고 1.8억~3.6억명이 사망할 것이라고 추정한다. 물론 1918년 당시는 전시의 영양부족, 군수공장 등으로의 생활공간 집중, 비좁은 참호, 방치된 주변환경 등도 확산에 한몫했을 것이다. 보건 위생수단도 훨씬 열악했다.

    지금은 인구가 대부분 도시로 집중되어 있고 사람들의 이동이 더 활발하게 이루어진다는 게 약점이지만, 그래도 위생과 건강 수준이 그보다 훨씬 향상되어 있다. 게다가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대응체계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이르다. 바이러스의 유전자 재편성이 일어날 가능성은 커지면 커졌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조만간 다시 큰 여파를 미칠 인플루엔자 대발생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하고 있다.

    그러한 대발생의 결전(決戰)에 대비해, 인류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신종 플루의 사례는 각국의 대처방법이 어떻게 다른지 뚜렷이 드러내주었다. WHO는 사람들이 자유로이 국경을 넘나드는 21세기의 상황에 비춰 감염된 사람을 격리하는 조치는 별 효과가 없다고 보지만, 중국은 격리조치를 포기하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를 심화시키는지를 놓고 의견이 갈리기도 한다. 비좁은 공간에서 대규모로 가축이나 가금을 사육하는 다국적기업과 세계화가 팬데믹을 부추긴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중국 남부지역처럼 가금과 가축, 인간이 함께 복작거리며 살아가는 환경이 새로운 균주 발생의 온상이 된다는 견해도 있다.

    분명한 것은, 1918년 이후 한 세기를 거치는 동안 우리는 위험을 끼칠 수 있는 바이러스의 변이양상을 추적 감시해왔고, 상황이 발생했을 때 신속히 경고를 발령하고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되었으며, 유전체를 분석하여 새로운 예방수단과 치료제를 개발할 능력을 갖추었다는 사실이다. 언제 팬데믹이 닥칠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막상 발생했을 때는 조기에 인간끼리의 전파를 억제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그런 조치가 더 효과를 발휘하려면 인간보건 분야보다 소홀히 인식되는 가축보건 분야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한편 세계 각국의 공조체제도 다듬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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