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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그림을 사랑해!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소설은 그림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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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그림을 사랑해!
그림을 사랑한 소설, 소설들

“그는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걸 주지 못하고 있다는 두려움으로 내 얼굴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리트.’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은 그게 다였다.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제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래, 움직이지 마라.’ 그는 나를 그리려 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라’고 말하고 그가 그린 그림은 ‘진주 귀고리 소녀’. 그가 화폭에 담은 그림 속 그녀는 푸른 두건을 두른 채 몸을 옆으로 살짝 돌리고 정면(그러니까 우리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누구라도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멎을 듯, 숨이 막힌다.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맑고 촉촉한 큰 눈동자, 그리고 무심한 듯 살짝 벌린 입술. ‘움직이지 마라’고 말하고 그녀를 그린 그의 이름은 베르미르,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다.

캐나다의 트레이시 슈발리에라는 여성은 젊은 시절 유럽으로 여행을 갔다가, 미술관에서 이 화가의 이 그림을 보게 된다. 그녀는 유럽 여행 중에 그 그림뿐 아니라 수많은 걸작을 보았다. 그리고 돌아왔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그녀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한 편의 그림이 있었다. 바로 옆으로 몸을 살짝 돌린 채 무심히, 그러나 간절히 무엇인가를 호소하듯 그녀를 바라보던 맑고 촉촉한 큰 눈의 소녀, ‘진주 귀고리 소녀’. 그녀는 그림 속에 담긴 신비로운 표정의 소녀의 환영에 사로잡혀 자신의 방에 그 그림을 걸어놓고 15년을 동고동락한다.

그 끝에 그녀는 마침내 베르미르의 그림과 똑같은 제목의 또 다른 작품을 창조한다. 바로 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가 그것이다. 그리고 소설은 전세계의 독자에게 ‘진주 귀고리 소녀’의 신비를 전한다. 소설은 다시 영상으로 옮겨져 ‘진주 귀고리 소녀’라는 똑같은 제목으로 스크린에 펼쳐진다. 17세기 북유럽 네덜란드에서 베르미르라는 화가가 그린 한 소녀의 초상은 21세기 북미의 트레이시 슈발리에라는 여성 작가에 의해 소설로 다시 태어나고, 소설은 영국의 감독 피터 웨버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져 소설의 이야기와 그림의 풍경을 정교하고 아름답게 재현한다.

트레이시 슈발리에처럼 일상에서 멀리 떠나 낯선 장소에서 마주친 한 장의 그림으로부터, 또는 주변의 누군가로부터 건네받은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소설이 탄생하는 예는 소설사에서 종종 있는 일이다.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진주 귀고리의 소녀’가 한 편의 그림으로부터 잉태되었다면, 한국의 젊은 작가 김연수의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출발한다.

“처음에 나는 그 사진이 남양군도에서 왔다고 생각했다. 카우치 위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세상을 향해 다리를 벌리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담긴, 가장자리가 불에 그슬린 사진이었다. 불길의 자취는 사진 아래쪽에 반원 모양으로 남아 있었다. 검은 그 반원의 양 옆으로는 ‘Pier…s 1895’라는 글자가 남아 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두 눈의 거리만큼 떨어진 한 쌍의 조리개로 찍은 흑백 누드사진 두 장이었다. 사진을 눈에서 멀찌감치 떼어놓고 두 사진이 서로 겹쳐지도록 만들면 그 가운데 환영처럼 여인의 나체가 입체적으로 드러났다.”

또 우리 시대의 유쾌한 이야기꾼 성석제의 단편 ‘욕탕의 여인들’은 아예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의 아름다운 그림들로 구성된 작품이다. 르누아르의 ‘목욕하는 여인들’로부터 소재를 빌려 쓴 소설로, 돈 많은 과부나 부잣집 여자를 만나 팔자 좋게 살아보려는 보통 남자의 로망을 그린다. 르누아르의 ‘바느질하는 여인’ ‘파라솔을 쓴 소녀’ 그리고 ‘도시에서의 춤’ 등 소설 갈피갈피에 제시되는 그림들은 독자에게 소설을 읽는 재미와 함께 미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소설의 첫 장 ‘바느질하는 여인’의 시작은 이렇다.

“스무 살 무렵 내 꿈은 그 당시 유행하던 농담처럼 ‘돈 많은 과부하고 결혼해서 평생 놀고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과부가 대자연의 순리에 따라 나보다 일찍 죽으면 젊고 예쁜 여자를 새로 만나서 남은 인생을 구가하자는 아름다운 계획이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타고난 난봉꾼이 아니고 그렇다고 구제불능의 게으름뱅이도 아니다. 나이 스무 살에 그따위 생각이나 하는 한심한 인간이라고 여길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데, 내가 먼저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 세상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고 대꾸해주고 싶다.”

그런가 하면, 남미 페루 출신으로 현대 스페인어권의 대표적인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성석제보다 한술 더 떠서 장편 ‘리고베르토 씨의 비밀노트’에 오스트리아 출신의 화가 에곤 실레의 그림을 병치하며 현대사회의 성과 사랑의 풍속도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나간다. 인간 쾌락의 백과사전이라 불릴 정도로 에로티시즘의 정수로 꼽히는 이 소설은 낮에는 평범한 보험업자이지만, 밤에는 도색작가이자 예술 애호가이고, 그림 수집가인 리고베르토씨의 성적 환상이 투영되어 있다. 이야기는 루크레시아라는 여주인과 열네 살짜리 의붓아들 폰치토라는 소년, 그리고 그 아버지 리고베르토의 삼각구도로 진행되는데, 폰치토는 자신을 에곤 실레로 동일시하고, 아름다운 계모 루크레시아로부터 에곤 실레의 그림 속 여인들의 포즈와 분위기, 표정 등등을 포착한다. 남미 특유의 현란함에 천부적인 이야기꾼 요사의 예술적 감각이 유감없이 발휘된 이 소설은 에곤 실레의 그림들과 맞물려 화려하고 퇴폐적이며 도발적인 분위기로 가득하다. 소설의 서두부터 독자의 흥미를 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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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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