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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시네마 테라피 ⑫

특별할 것 없는 크리스마스, 그래도 기다리는 이유

  • 강유정│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특별할 것 없는 크리스마스, 그래도 기다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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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이 들어감에 따라, 처한 현실에 따라 시간의 흐름이 달리 느껴진다. 시속 20㎞, 30㎞, 40㎞로 빨라지는가 하면, 하루가 1년같이 길고 힘들 때도 있다. 체감 속도가 어떠하든 세밑은 오게 마련이고 최후의 만찬 같은 크리스마스가 그에 앞선다. 사랑과 행복이 넘칠 것만 같은 그날, 당신의 크리스마스는 어떠한가?
특별할 것 없는 크리스마스, 그래도 기다리는 이유

11월3일 서울 송파구 잠실 롯데월드 공연단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미당 서정주는 풀리는 강가에서, ‘무어라 강물은 다시 풀리어, 이 햇빛 이 물결을 내게 주는가’라고 물었다. 강은 얼고, 녹고, 또 얼고, 녹는다. 한 해의 흐름도 이와 같다. 한 장 한 장 뜯어내는 일력을 보기 힘든 요즘이지만, 벽과 가깝게 붙어 두께가 얇아진 달력을 떠올리면 새삼 한 해가 거의 지나갔음을 실감한다. 시간의 흐름이 시각으로 그리고 촉각으로 구체화되는 것이다.

한 해가 지나가고 나이가 한 살 한 살 먹어간다는 것은 새로운 감상을 전해준다. 기억할 일이 많아지기도 하고, 되돌아볼 일이 많아지기도 하고, 설렘에 빠져들기도 한다. 사는 것 자체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워낙 드라마틱하니, 시간의 흐름을 일별할 수 있는 12월은 그래서 요령부득의 시간이기도 하다.

하루를 24시간 단위로 나눈다고 해서 365일을 꼭 열두 달로 매듭지을 수는 없다. 어느 해는 마치 한 달처럼 바쁘게 지나가는가 하면, 바쁘다고 말할 틈조차 없이 바쁜 와중에 10년처럼 지루한 날도 있다. 지독히 고단해서 기억에 남는 해가 있는가 하면, 안 풀리던 일들이 한꺼번에 해결되어 기적처럼 느껴지는 해가 있기도 하다.

사람들은 한 해가 저물 무렵, 어떤 생각들을 할까? 크리스마스, 연말, 송년회, 동창회, 모임도 행사도 많은 12월. 춥기도 춥지만 행사가 많아 더 외로워지기도 하는 12월, 어쩌면 12월이야말로 가장 위안이 필요한 달이 아닐까?

‘올드 랭 사인’- 사랑도 나이를 먹는다

두 노인이 탑골공원에서 마주친다. 비교적 말끔하게 차려입은 노신사가 먼저 남루한 옷차림의 작달막한 남자에게 알은체를 한다. 자네, 혹시 창식이 아닌가, 라고. 관객들은 짐작한다. 아마도 두 사람은 먼 옛날 아는 사이였거나 혹은 은혜를 베풀고 입은 사이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뜻밖에도 근처 모텔로 들어간다. 관객들은 의아하다. 잠이 부족한 것일까 하고 상식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말이다.

사실 두 사람은 젊은 시절 한때 동성애 커플이었다. 성태는 결혼을 하고 일상의 궤도로 돌아갔고 아마도 창식은 제도와 법, 상식이 허락하지 않는 이반의 세계에 머물렀던 모양이다. 영화는 두 사람의 과거를 그저 짐작에 묻고, 나이가 들어 이제 인생의 마지막길에 들어선 노인이 된 두 사람의 현재를 담담히 들여다본다.

성태는 배가 곯아 보이는 창식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그가 잠든 틈에 꼬질꼬질한 속옷과 양말을 빨아준다. 성태의 것과 나란히 널려있는 창식의 양말은 그들의 어색한 공간 사이로 따뜻한 기운을 심어준다. 늙은 게이 성태는, 창식에게 깨끗한 새 내복을 선물한다. 두 사람은 침대에 누워 등을 돌린 채 그간의 소식을 묻는다.

형수는 어떤 사람이었느냐는 창식의 질문에 성태는 좋은 사람이었다고 대답한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노년 버전 같은 느낌을 주는 이 단편 영화는 한 가지 간과했던 사실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동성애자도 늙는다는 점이다. 대부분 사랑 영화는 젊은이들을 그린다. 화인처럼 남은 실연, 추억 속에 간직된 첫사랑, 첫 섹스의 추억, 불륜 등 대개의 사랑이 다 생물학적으로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이러한 법칙이 이성애를 그린 사랑에만 적용되는 건 아니다. 동성애를 소재로 한 영화 역시 대부분 젊어서 그 사랑이 더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그린다.

연애, 사랑은 마치 젊은이들의 전유물처럼 다뤄진다. 영화 속에서 노인의 사랑을 본 적이 있던가? 보았다 한들, 그 사랑은 회고록 속의 한 장면 혹은 플래시백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 정도다. 늙어 쪼글쪼글한 눈가를 클로즈업하다가 어느새 젊은 배우들이 기억을 재현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사랑은 젊은이들에게 독점된다.

나이가 들어서도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한다는 걸 연상하는 게 어색하기는 게이 커플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게이도 늙는다. 그리고 노인이 된 게이가 젊은 시절의 연인을 그리워할 수 있다는 단순한 상상이 허용되지 않는다.

소준문 감독은 이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섰다. 뒤집힌 상상력을 채우는 것은 결국 함께 올드 랭 사인을 불러야만 하는 시간의 야속함이다. 이 시간의 야속함 안에서 그들이 동성이라는 사실 그리고 너무나 벌어진 사회 계층적 차이도 사라진다. 늙어가는 두 사람은 그저 서로에 대한 사랑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살아야만 하는 처연한 존재에 불과하다.

성태는 창식의 손을 잡으며 지금이라도 함께하는 게 어떠냐고 묻지만, 창식은 묵묵히 고개를 흔든다. 이 아쉬운 이별 속에 두 사람의 사랑은 어떤 묵직한 정서적 울림으로 가라앉는다. 사회가 허락하지 않은 사랑을 가슴에 묻었던 그들의 이야기는 거울 속에 비친 젊은 시절의 이미지로 잠시 지나간다.

하긴, 어쩌면 젊음이란 그렇게 거울 속 이미지처럼 찰나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 ‘올드 랭 사인’에는 정작 음악 올드 랭 사인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대신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신파조의 엔카가 귀를 자극한다. ‘색, 계’의 두 연인이 일본군 장교들이 드나드는 클럽에서 신파조의 중국 대중가요를 부르며 서로를 위무하듯, 엔카도 그렇게 직설적 신파로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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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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