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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시네마 테라피 ⑫

특별할 것 없는 크리스마스, 그래도 기다리는 이유

  • 강유정│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특별할 것 없는 크리스마스, 그래도 기다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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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몇 월에 있습니까?

박민규의 소설 ‘근처’에는 마흔 살이 갓 넘은 젊은 남자가 갑자기 말기 암을 선고받는 장면이 나온다. 결혼도 하지 않고, 그저 쳇바퀴 돌 듯 재미없는 회사생활을 반복하던 남자는 자신의 삶이 6개월여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접한다. 그는 매일 지나치는 껌 파는 할머니를 떠올리며 되뇐다, 단 한 번도 그 할머니보다 먼저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노라고. 어느새 그의 인생 달력의 마지막 장, 12월15일쯤에 가 있었던 것이다.

1년 달력이 12장으로 눈에 보이는 순서를 가지고 있다면, 내 인생의 12월은 언제쯤 올까? 모를 일이다. ‘근처’의 인물처럼 6월쯤을 살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어느 새 11월쯤에 가 닿아 있을지도 모르고 아직 4월 정도밖에 살지 않은것일 지도 모른다.

내가 살고 있는 인생의 시점이 10월이라고 생각한다면 과연 삶의 풍경은 어떻게 달라질까? ‘올드 랭 사인’의 늙은 게이들은 자신의 달력이 11월쯤에 와 있음을 안다. 그들은 정열도, 강렬한 욕망도 아닌 소중한 인연으로 자리 잡는다. 서로 격렬하게 탐하지도 그렇다고 추억을 전리품처럼 늘어놓지도 않는다. 그들에게 사랑은 지루한 장마가 지나간 6월의 햇빛처럼 찰나적이면서도 소중한 것일 테다. 11월쯤 서 있기에, 그들에게 사랑의 6월은 소중하게 환기된다.

‘봄날은 간다’지만 언제 어떻게 12월이 오는지 알 수가 없다. 과연 우리는 몇 월 정도에 살고 있는 것일까?



최인훈의 ‘크리스마스 캐롤’에는 한국인들이 12월24일 기를 쓰고 밤을 새우려는 풍조에 대한 비판이 실려 있다. ‘통금’이 있던 시절 유일하게 일탈이 허용되던 날, 그날이 바로 12월24일이었다. 엄혹했던 시절의 해방구 이미지를 떠나더라도, 미국에서 개봉하는 영화를 동시간대에 즐길 수 있는 지금 이곳에서 크리스마스는 단지 외국의 풍습이 아니라 전 지구적 명절이라 할 만하다.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느냐를 막론하고 말이다.

우리에게 크리스마스가 ‘유흥’ 성격이 강한 데 반해 서구문화권에서는 가족을 되돌아보고 의미를 새롭게 하는 ‘명절’ 느낌이 강하다. 가령 가장 유명한 크리스마스 서사 중 하나인 ‘크리스마스 선물’만 해도 그렇다. 아내는 긴 머리카락을 잘라 남편의 시곗 줄을 사고, 남편은 시계를 팔아 아내의 머리 장신구를 산다는 이 유명한 이야기는 결국, 크리스마스란 나눔을 통해 가족의 가치를 되새기는 날임을 강조한다. 나눔의 의미를 계몽하기 위해 만들어진 듯한 스크루지 영감의 일화도 마찬가지다. 크리스마스는 누군가와 무엇인가를 나눠야만 하는 날임을 시사한다.

‘러브 액츄얼리’-나와 당신의 크리스마스

특별할 것 없는 크리스마스, 그래도 기다리는 이유

‘러브 액츄얼리’

크리스마스 영화의 고전을 고른다면 영국 워킹타이틀사의 대표작 ‘러브 액츄얼리’를 들 수 있다. 7개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작품은 옴니버스 영화의 재해석 및 재유행을 불러와 일종의 신드롬을 일으켰다. 앞 이야기와 뒷 이야기가 맞물리는 구성은 사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일상이나 관계에서 뚝 떨어져 있는 인공적 존재가 아니라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관계 속 사람들임을 인식하게 한다. ‘러브 액츄얼리’에 묘사된 크리스마스 풍경도 그렇다. 다양한 계층과 성별, 상황의 주인공들이 각기 다른 시각에서 크리스마스와 ‘나’를 이야기한다.

가장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바로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남자와 마침내 데이트를 하게 된 ‘사라’의 이야기다. 같은 회사 동료를 짝사랑하는 사라(로라 리니 분)는 직장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그와 춤출 기회를 잡는다. 남자 역시 그녀에게 매력을 느끼고, 그녀의 집까지 바래다준다. 마치 예열되어 있던 오븐처럼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강렬한 눈빛과 숨소리를 나누기 시작한다. 그런데 바로 그때, 사라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요양소에 머물고 있는 남동생이다.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동생은 누나를 놔주지 않는다. 결국 사라는 남자에게서 등을 돌려 찬찬히 대화를 나눈다. 매우 소중한 순간이었지만 사라는 언제나 그래왔듯 욕망이 아니라 의무를 택한다.

사라의 이야기는 크리스마스가 선사하는 기적 같은 예외성이라는 기대를 무너뜨린다. 우리가 기대하는 이야기에서는, 사라가 짝사랑하던 남자와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족쇄 같았던 남동생은 하루쯤 곤히 깊은 잠을 자줘야 하니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사라의 이야기는 우리가 기대하는 크리스마스 이야기와 거리가 멀다. 그녀의 특별한 크리스마스는, 그녀의 별난 일상에 빠져 허우적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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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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