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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회 신동아 논픽션 공모 우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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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향실: 3호.

고인 명: 폴 유빈 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수골 중인 유가족은 분향실로 오십시오.

화면의 글을 확인하는 순간 내 심장에 면도날이 지나간다. 미국에서 자란 우리 폴이 왜 이곳 수원의 화장터에 와 있단 말인가? 나는 갑자기 넋 나간 사람처럼 멍청해졌다. 올케가 오른팔을 잡고 부축한다.

우리 일행은 분향실 3호로 간다. 윤5월이 아니라 다소 조용하다고 하는데, 분향실 1호부터 8호까지 꽉 찼다. 분향실마다 눈물바다였다. 통곡의 강이었다. 울음소리가 없는 곳은 우리 3호실뿐이다. 개장유골의 화장이라, 막 임종한 시체를 화장하는 것과는 경우가 달랐다. 순간순간 울컥 올라오는 감정의 고비를 잘 넘기면, 슬픔을 잠재울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오랜 세월 끝에 생겨난 면역력이다.



분향실에서 예배의식이 진행된다. 권 목사님이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읽고 나를 위로해주신다. 권 목사님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따뜻한 분이시다.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우리는 고인의 영혼이 평강을 누리도록 기도한다. 고인의 영혼은 이미 18년 전에 안식하게 되었다고 믿는다. 물론 형식상의 절차에 불과했지만, 형식을 통해 내 마음이 순간순간 위무가 된다. 목사님의 말씀 중에 나는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란? 죽은 사람의 영혼이 다른 사람의 몸을 입고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일까? 우리 폴의 혼도 다른 사람의 태에 옮아 출생이 가능한 것일까? 그럼 누군가의 태를 빌려 이 땅에 다시 태어났을까? 지금쯤 어느 외계에서 살고 있을까?

나는 정박아같이 생각이 분주했다. 올케가 나를 흔들자 정신이 돌아온다. 함께 슬픔을 나눌 골육과 지인이 있음은 보화처럼 귀한 것이었다. 특히 남편의 누나를 위해 지극 정성을 다하는 올케가 고마웠다. 시누이의 일이 정말 저렇게 가슴이 아플까? 고맙다가도 문득문득 밀려오는 의문이 고개를 들어 올케의 표정을 살핀다. 시누이의 상처를 통해 자기의 아픔에 위안이 된다면 다행일 것이다. 사실 올케는 내게 친여동생같이 아껴야 할 소중한 사람이다. 시어머니는 일찍 저세상으로 가시고 안 계신다. 호랑이 훈장이라 불린 까다롭기로 소문난 서당 훈장이셨던 시아버지를 오랫동안 잘 섬겨준 보화 같은 존재가 올케이다. 그런데 내 예민하고 의심 많은 성격은 시도 때도 없이 변덕이 죽처럼 내 가슴을 끓게 한다. 올케와 동생을 미워하면 결국 내 가슴이 더 아픈 것을 알면서도 난 바보처럼 미움이란 단어를 버릴 줄 몰랐다. 사랑으로 품어야 할 형제들이 미운 것은 내 깊은 상처 때문일까? 아니면 우울증 같은 질병일까?

말의 돌출

망해(亡骸)를 가슴에 안고 2주간 빌린 도곡동 아파트로 돌아온다. 18년 전 장례식 때처럼 기절하지 않아서 감사한다. 내가 정신을 잃으면 나를 아끼는 사람들이 얼마나 더 고생할까. 생각할수록 내가 쓰러지지 않았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했다.

나는 아들을 옷장 속에 넣는다. 답답하겠지. 그러나 땅속보다는 덜하겠지. 입속말을 씹으며 동생부부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곳을 택했다. 흰 보자기에 싸인 유해를 보고 가슴아파할 동생부부를 배려해서였다. 나름대로 신경을 썼지만 올케와 동생의 얼굴이 불편해 보인다. 동생부부는 나의 무너진 가슴을 생각하며 무거운 표정들이다. 하긴 아픈 사람보다 지켜보는 사람이 더 고통스러울 때가 있지 않는가. 날카로운 내 심경을 건드리지 않으려 애쓰는 눈치다. 우리는 서로 눈치만 살피며 별말이 없었다.

그때였다. 올케의 휴대전화와 동생의 휴대전화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울린다.

서울에 사는 동생의 두 딸에게서 온 전화였다.

“그래 일 잘 마쳤다. 저녁에 고모에게 인사하러 온다고? 형님, 첫째가 인사하러 온다는데요. 어떻게 할까요?”

“으응, 오라 그래.”

“둘째도 오겠다는데.”

이번에는 동생이 묻는다.

“룸도 복잡한데 한 번에 한 명씩 오라고 하지.”

오랜만에 만나는 조카들이건만 반갑지 않다는 투의 말이 튀어나온다. 솔직히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심중을 감추지 못하는 미숙한 내 자신이 싫을 때가 많다. 오래 떨어져 있던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 오겠지. 고모한테 인사는 무슨, 모두가 귀찮았다. 동생부부는 딸들과 손자가 보고 싶겠지. 생때같은 내 새끼는 죽어 한 줌의 재가 되어 옷장 안에 갇혀 있는데 조카들이 온다고 뭐가 그리 반가울까. 아무도 내 무너져버린 가슴을 이해하지 못하리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맞아주지 못해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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