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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죽는다, 고로 위대하다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인간은 죽는다, 고로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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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죽는다, 고로 위대하다

‘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문학동네/192쪽/9500원

12월, 밤마다 소리 내어 소설을 읽는다. 한 문장 한 문장, 한 단락 한 단락, 입술 사이로 소설 문장이 흘러나오고, 하루하루, 시간은 흘러간다. 12월 다음은 13월이 아니고, 당연히 1월이다. 새해다. 12월과 1월 사이에는 벼랑이 존재한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아니 모든 사람은 이 벼랑을 건너야 한다. 벼랑은 폭과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깜깜하고, 고래의 쩍 벌린 입속처럼 사납기도 하다. 어떻게 건널 것인가. 벼랑 끝에 선 인간은 예외 없이 치열해지는가 하면 고독해진다. 그것을 나는 벼랑의식이라고 부른다. 작가들의 작품은 바로 이러한 벼랑의식의 산물이다.

12월에서 1월 사이 벼랑을 앞에 두고 매일 밤 한 장 한 장 소설을 소리 내어 읽는다. 입김이, 소리가, 시간이, 허공에서 소멸된다. 나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과 함께 잠이 들고, 나의 잠든 눈꺼풀을 살며시 누르며 새날은 밝아온다. 침대 맡에는 12월 밤마다 동행해준 소설이 정갈하게 놓여 있다. 한 사내의 옆얼굴을 뾰족한 펜촉으로 스케치한 검은 표지의 사륙배판 블랙 하드커버의 ‘에브리맨 Everyman’. 막 떠오른 새해의 눈부신 햇살 아래 소설의 첫 페이지를 다시 펼친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황폐한 공동묘지에 있는 무덤 주위에는 전에 뉴욕에서 함께 광고일을 하던 동료 몇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그의 활력과 독창성을 회고하며, 딸 낸시에게 그와 함께 일했던 것은 크나큰 즐거움이었다고 말해주었다. 그가 2001년 추수감사절 이후 살았던 저지쇼의 은퇴자 마을 스타피시비치에서 차를 몰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 얼마 전까지 그림교실에서 그에게 배운 노인들이었다. 그의 두 아들 랜디와 로니도 있었다. (중략) 그의 형 하위와 형수도 있었는데, 이들은 전날 밤에 캘리포니아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다. 그의 세 명의 전 부인 가운데 두 번째이자 낸시의 어머니인 피비도 있었다. 그리고 물론 낸시도 있었다. 낸시는 아버지의 장례식을 준비한 사람이며, 여기 나타난 사람들에게 연락을 한 사람이었다. (중략) 초대받지 않고 온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중략) 오래전 고인이 심장 수술을 받았을 때 돌봐주던 개인 간호사 모린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필립 로스, 정영목 옮김, ‘에브리맨’, 문학동네)

처연한 노년이야기

연말연초, 모두들 마지막 일몰을 보려고 서해로 달려가거나, 첫 일출을 목격하기 위해 동해로 달려가는 마당에 한 남자가 늙어 죽은 이야기라니! 나로 말하자면, 노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만, 노년의 삶을 들여다볼 나이는 아직 아니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 나를 사로잡은 것은 애틋하고 처절한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고독하게 삶을 마무리하는 처연한 노년이야기였다. 44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 그랜트와 피오나에게 어느 날 갑자기 닥쳐온 불행과 그 불행에 대처하는 노부부의 가슴 아픈 삶을 그린 ‘어웨이 프롬 허 Away from her’(2006)는 요 몇 년 사이 가장 인상 깊게 본 영화 중의 하나다. 아름다웠던 아내 피오나는 어느 날 알츠하이머병에 걸리고, 남편 그랜트는 모습은 똑같으나 전혀 다른 행동을 하는 낯선 아내에 충격을 받는다. 그랜트는 아내의 돌발 행동을 담담하게 견디며 끝까지 함께하려고 하지만 잠시 정상의 의식으로 돌아온 피오나는 자신의 변화에 괴로워하며 요양원에 입원할 결심을 하고 이별을 단행한다. 사랑하지만, 떠남으로써 남편에게 짐이 되지 않고, 아내로서의 품위를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아내를 존중하여 요양원에 그녀를 입원시키고, 요양원의 규칙에 따라 한 달에 한 번 정장을 하고 꽃을 들고 아내를 찾아가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을 사랑하는 아내가 아니라, 다른 남자에게 온갖 정성을 기울이는 노년의 낯선 여인일 뿐이다. 피오나는 전생에 대한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요양원에서 만난 남자(노인)에게 연민을 느끼고 사랑의 감정에 빠진 것. 그랜트는 두 번 아내를 잃은 심정으로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오고, 어김없이 한 달이 되면 한 가닥의 희망을 가지고 요양원으로 향한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내에게 찾아온 새로운 사랑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의 고뇌는 비단 아내라는 한 여자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 전체(everyman)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된다. 캐나다의 광활한 자연과 설원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이 이야기는 삶의 끝에 도달한 노부부의 애틋한 영화로 볼 수도 있고, 죽을 때까지 찾아올 수 있는 사랑의 숭고한 감정에 대한 러브스토리로 볼 수도 있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 우리는 그동안 한 번 사는 인생 어떻게 사느냐에만 너무 골몰해왔다. 영화 ‘어웨이 프롬 허’와 소설 ‘에브리맨’은 바로 이 지점을 박차고 나가 한 번 죽는 인생 어떻게 죽느냐, 그러니까 삶의 끝에서는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에브리맨’은 필립 로스가 2006년 73세의 나이에 발표한 그의 27번째 장편소설로 한국에서는 정식으로 처음 번역 소개되는 작품이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라 대학살’이라고 명명하며 철저하게 한 남자의 죽음을 둘러싼 노년의 삶을 노작가 특유의 통찰이 묻어 있는 문장으로 그려 보인다. 중편 소설 정도 길이의 경장편이지만 아포리즘에 가까운 간결하고도 명징한 문장이 던져주는 울림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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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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