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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에세이

태풍이 지나간 자리, 사랑이 지나간 자리

  • 황주리│서양화가│

태풍이 지나간 자리, 사랑이 지나간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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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간 자리, 사랑이 지나간 자리

<그녀와 함께 춤을>, 캔버스에 아크릴, 91×73㎝, 2005, 황주리 作

무서운 밤이었다. 유리창이 떨어져 나가고 바람소리가 귀신소리처럼 들리던 잠 못 이루던 밤, 나는 친구와 전화 통화를 했다. 경기도 양평의 호젓한 강가에서 혼자 사는 친구는 바람소리만 들어도 무섭다고 했다. 정전이 되고, 정원의 나무들이 다 쓰러져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초토화된 집에 홀로 남아 친구는 탄식을 했다. 뉴스를 보니 그 태풍 일던 날, 바람에 날아다니는 기왓장에 맞아 즉사한 노인도 있었다. 고층 아파트의 유리창들이 깨져 땅바닥에 유리 조각들이 마구 흩어져 있었다. 다행히 무사한 밤을 보낸 나는 태풍이 지나간 뒤의 한강변에 나가보았다. 큰 나무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고, 작은 꽃나무들은 거의 다 허리가 꺽인 채 쓰러져 있었다. 무사한 것들은 바람에 이리저리 몸을 휘어가며 자신을 지키는 갈대였다.

지진이나 태풍처럼 천재지변에 의해 죽음을 맞는 일은 너무 허망하다. 슬퍼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하긴 허망하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으랴?

얼마 전의 일이다. 화랑을 경영하는, 어머니의 오랜 친구 한 분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갑작스러운 심장발작으로 입원했다가 별 이상이 없어서 곧 퇴원했다고 했다. 다음날 갑자기 나빠져서 다시 입원, 급작스러운 괴사현상이 일어나면서 한 시간도 안 되어 돌아가셨다.

그날 밤 문상을 간 나는 늘 아줌마라고 부르던 그분의 영정을 바라보며 처연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재작년인가 전시차 같이 외국에 나갔을 때 내가 찍은 사진들이 하도 근사하게 나와 e메일로 보내드려야지 생각만 하면서 보내지 못했다.

그뿐인가? 올여름 그리스 터키를 여행하는 동안, 돌아가면 와인을 좋아하는 아줌마에게 와인 한 병 들고 꼭 찾아가야지 했더랬다. 날 때부터 나를 보아온 아줌마와 나의 인연은 사실 깊다면 참 깊었다. 어릴 적 아줌마에 관한 내 최초의 기억은 다섯 살 때쯤인 것 같다.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표정, 옥구슬이 굴러갈 것 같은 목소리, 작고 통통한 몸매와 주름 하나 없는 그녀의 얼굴은 팔십이 다 될 때까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외모만 그런 게 아니라 마음도 감각도 어느 젊은 사람보다 훨씬 젊었다. 인터넷이 이 나라에 처음 상륙했을 때, 적지 않은 나이로 인터넷을 배우기 시작했던 놀라운 분이었다. 그 통통한 몸매에도 옷을 입는 감각이 어찌나 뛰어난지, 외국에 나가서도 멋진 한복을 입고 자태를 뽐내며 걸어갈라치면 온 사람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그 뿐인가? 이 세상의 신기하고 맛있는 음식은 다 아줌마와 처음 먹어본 것들이다. 어릴 적 미8군 안에 들어가 처음 먹어본 피자가 그랬고, 파스타가 그랬다. 그래도 아줌마는 이 세상에서 김치와 고추장과 흰 쌀밥을 제일 좋아했다. 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쌀밥이라도 나오면 가지고 갔던 김치와 고추장을 꺼내 먹으며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화가가 된 나와 화랑을 경영하는 아줌마는 운명적으로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화가로 데뷔한 곳이 바로 그분이 경영하던 통의동에 있는 ‘진 화랑’이다. 전시를 같이 다니면서, 혹은 뉴욕에 있는 내 스튜디오에서 같이 밤을 지새우면서 나는 늘 그분의 연인 이야기를 들었다. 너무나 사랑하면 비극으로 끝난다고 말하던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이제 그분은 이세상 사람이 아니다.

내가 화가로 성장하면서 사실 우리 사이는 많이 소원해졌다. 아마도 아줌마는 나 때문에 섭섭한 일이 많았던가 보다. 다 키워놓으니까 다른 화랑들에서 전시를 하는 게 늘 섭섭하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나이가 들어가는 탓인지 올여름 여행길에 갑자기 와인을 좋아하는 아줌마가 머릿속에 자꾸만 떠올랐던 것이다. 와인 한 병 들고 가 회포 한번 풀지 못하고, 나는 영안실에서 그녀의 영정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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