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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에세이

불면, 그 외로움의 깊이

  • 유안진│ 시인, 서울대 명예교수│

불면, 그 외로움의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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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 그 외로움의 깊이
눈이 붉은 한 사람과 마주 보면 무섭거나 불쾌해진다. 괜히 그렇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미안하고 가엾어진다. 틀림없이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것도 그저 며칠을 못 자서가 아니라 오랜 세월 밤이면 밤마다 잠을 제대로 못 자고 못 잔 나머지 쌓이고 덧쌓인 피곤으로 그런 눈이 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외로움이란 못 입고 못 먹어서, 혹은 가족이나 친구가 없어서 생겨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원인은 불면(不眠) 때문이 아닐까 한다. 여러 날을 안 먹고 살 수 있지만, 여러 날 계속해서 잠을 못 자면 생활은 말할 것도 없고 생존 자체도 불가능할 것 같아서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40일을 금식하고서도 마귀의 유혹을 물리쳤지만, 40일 불면했다고는 쓰여 있지 않다. 나 같은 약골은 4일 연속 잠을 못 잔다면 미쳐버리거나 죽고 말 것이다. 그래서일까? 단식이나 금식하는 이들도 잠만은 충분히 잔다고 한다.

아잇적부터 잠버릇이 나쁜 나는 잠들기도 힘들었지만 잠 깨기도 힘들었다. 아잇적의 그 버릇이 내처 지금까지 그렇기 때문에, 잠자는 것은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수면의 충분 정도는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고, 같은 사람이라도 그때그때의 건강상태에 따라, 더 또는 덜 자도 괜찮을 것이다.

올빼미 삼신을 타고났다는 지청구를 들으며 자라던 나는 가을밤과 겨울밤에 특히 잠들기가 힘들었다. 문풍지 우는 소리, 울타리가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말할 것도 없고, 댓돌 밑을 구르는 나뭇잎 소리에서, 뒷벽에 걸린 마른 시래기 타래를 스치는 바람소리에도 들던 잠이 깨버리곤 했다. 심지어는 무서리가 내리는 소리인지 된서리가 내리는 소리인지도 분간할 것 같았고, 눈 오는 소리도 싸락눈 소리인지 함박눈 소리인지 짐작하기도 했으니까.

11월은 밤이 좋은 계절이다. 낮에는 눈이, 밤에는 귀가 더 민감해진다. 더구나 가을과 겨울에는 밤이 길어지면서 깊고 긴 어둠 속에서 귀가 더 길어진다. 청력은 천상의 소리까지 염탐할 듯하고, 땅속으로 잦아드는 물소리까지 들릴 듯하다. 고막은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져서 온갖 소리를 상상으로 듣다가 첫새벽에야 파김치가 돼 잠들 수 있었지만, 벌써 밖에서는 웅성거리곤 했다. 이런 잠꾸러기가 어떻게 학교 다니면서 아침 시험을 칠 수 있었는지 가끔은 스스로 대견할 때도 있다.

잠 없는 밤 날이 샐 무렵이면, 십리 밖 예배당에서 치는 종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또한 먼 산속 절간에서는 쇠북소리가 들릴 듯 말 듯 들려오곤 했다. 교회나 절은 마찬가지로 십리 밖 멀리 있는데도, 절간의 쇠북소리는 지표면을 타고 산을 기어오르고 더듬어 내려와, 냇물을 건너고 들길을 천천히 걸어서 오는 것 같았다. 특히 에밀레종에 대한 얘기를 들은 다음부터는, 쇠북이 운다는 범종소리가 그냥 그대로 에밀레종소리라고 여겨졌다. 어린 시절 체험으로 모든 절간의 종소리는 에밀레종소리였는데, 마침 한국시인협회에서 국보를 시로 쓰라고 했을 때 선뜻 ‘선덕대왕신종’ 즉 에밀레종을 골라 썼다.

너무 깊고 너무 아픈 사연들 모아 / 부처님께 빌었어라

한 번 치면 서라벌이 평안했고 / 두 번 치면 천리까지 평안했고

세 번 타종하면 삼천리까지라 / 거기까지가 新羅땅 되었어라

금수강산으로 繡 놓였어라 / 어지신 임금님의 玉音이 되었어라

만백성들이 어버이로 섬겼어라 / 끝없이 태어날 아기들을 위하여

끝없이 낳아 키울 어미들을 위하여 / 한 어미가 제 아기를 공양 바쳐 빌었어라

껴안고 부둥켜안고 몸부림쳐 빌었어라



에밀레~ 에밀레레~ 종소리 울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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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 시인,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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