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호

페루, 소설의 다른 이름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입력2010-12-06 16: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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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루, 소설의 다른 이름

    ‘새엄마 찬양’<br>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문학동네, 246쪽, 1만1000원

    독자에게, 아니 여행자에게 ‘페루’라는 이름은 특별한 여운을 준다. 특별함이란 ‘페루’가 남반구, 라틴아메리카의 남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국가의 이름으로 다가오기 이전, 프랑스 작가가 쓴 한 편의 단편 소설에 의해 형성되고 전파되는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세계가 그것이다. 이때의 ‘페루’는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은, 아니 가고야 말 ‘미지’의 영역이고, 그곳에는 레니에라는 실패한 혁명가가 쓸쓸한 바닷가 해벽(海壁)에 카페를 차리고 ‘고독’의 아홉 번째 ‘물결’과 마주하고 있다.

    1년 강수량 50㎜ 이하의, 안개도 아니고 스모그도 아닌, 건기(乾期)의 뿌연 기류 속에 세상 끝에 도달한 레니에라는 사내를 세워놓은 작가 로맹 가리는 ‘자기 앞의 생(生)’을 쓴 ‘에밀 아자르’와 동일인이다.

    ‘죽는다’와 ‘죽다’의 차이

    전직 외교관 출신의, 두 개의 이름으로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공쿠르 상을 두 번이나 탄 작가, 로맹 가리(하늘의 뿌리, 1945) 또는 에밀 아자르(자기 앞의 生·1975).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원제(Les oiseaux vont mourir au Perou)는 번역자에 따라 전하는 뉘앙스가 다르다. 널리 읽혔던 김화영의 번역으로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현대문학사)이고, 새롭게 재출간된 김남주 번역으로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문학동네)이다. ‘죽는다’와 ‘죽다’의 차이란 무엇일까. 직역을 하자면, ‘새들은 페루에 죽으러 간다’. 새들이 죽을 목적으로 간다, 페루에? 제목이 주는 묘한 호기심으로 소설을 읽게 되는 경우라고 할까? 아무튼 나는 로맹 가리, 그러니까 에밀 아자르의 두 번째 공쿠르 상 수상작 ‘자기 앞의 생’이 매혹적인 제목으로 나를 그의 소설 세계로 끌어들인 것처럼, 새와 페루 그리고 죽음이 일으키는 공명(共鳴)으로 오랫동안 손 가까이, 눈 닿는 곳에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놓아두었다.

    로맹 가리라는 프랑스 작가는 어떻게 페루라는 공간을 소설 속에 끌어왔을까. 그가 이 작품을 쓴 것은 프랑스의 총영사이자 유럽대사로 전세계를 돌았던 그가 외교관직을 그만둔 1961년 이후다. 늘 눈 닿는 곳에 소설이, 정확히는 소설의 제목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가 있었지만, 정작 이 작품의 분위기와 항상 서랍 속에 권총을 넣고 사는, 세상의 끝에 서 있는 실패한 혁명가 레니에라는 사내의 허무의 심연을 어렴풋이나마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은 3년 전 여름 페루라는 나라를 열흘 가까이 돌아본 뒤였다. 지상화 유적지 나스카 라인의 나라 페루, 잉카인들의 수도 쿠스코와 사라진 공중 도시 마추픽추의 나라 페루, 영토의 일부가 아마존 정글인 나라 페루… 새들이 죽으러 간다는 페루… 그리고 ‘리고베르트 씨의 비밀 노트’의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페루….



    리마에 대한 야릇한 흥미

    사실, 페루로 떠나기 전 나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 두 권을 만나면서, 로맹 가리의 레니에가 은둔해 사는 페루, 리마가 아닌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리고베르토씨가 낮에는 보험업자로, 밤에는 성도착자로 사는 페루, 리마에 대해 야릇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페루 아르키파 출생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 세계란 같은 남미 출신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콜롬비아)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아르헨티나)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19세기 브라질의 어느 광적인 종교 집단과 정부 측 공화주의자들 사이의 전쟁을 다루고 있는 ‘세상 종말 전쟁’의 스케일과 오스트리아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 에곤 실레의 그림을 배면으로 아버지(리고베르토)와 아버지의 새 아내(루크레시아)와 아버지의 아들(폰치토) 간에 기묘한 삼각관계를 펼쳐 보이는 ‘리고베르토 씨의 비밀 노트’의 불온한 현란함은 일찍이 세계 소설사상 ‘매직 리얼리즘’(마르케스)과 ‘환상’(보르헤스)의 ‘새로운 장’을 구축한 남미의 작가들과는 또 다른 독보적인 경지를 보여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루크레시아 부인은 문을 열러 갔다. 문틈으로 보이는 루크레시아 부인은 산 이시도르 올리바르 공원의 허옇게 말라비틀어진 나무들을 배경으로 서 있는 초상화 속 인물 같았다. 폰치토의 노란색 고수머리와 푸른 눈이 보였다.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깜짝 놀랐지 새엄마.” 너무나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날 아직도 못마땅하게 생각해? 용서를 구하러 왔어. 용서해주겠지?”

    “너냐, 너?” 루크레시아 부인은 문손잡이를 붙잡고 벽에 몸을 기대었다. “감히, 이곳에 나타나다니, 부끄러운 줄도 모르니?”

    “학교는 땡땡이 쳤어.” 소년은 스케치북과 색연필통을 보여주며 떼를 썼다. “많이 보고 싶었어, 정말이야…”

    -‘리고베르토 씨의 비밀 노트’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김현철 옮김, 새물결

    이것은 요사의 장편 ‘리고베르토 씨의 비밀 노트’의 첫 장면, 새엄마를 찾아간 양아들의 대화 장면이다. 사관학교 출신으로 대통령선거 출마 경력이 있고, 소설뿐만이 아니라 시와 비평, 희곡, 방송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는 소설가답게 요사의 소설은 하나 아닌 층위를 거느리고 있다.

    거대 서사의 ‘총체성’과 ‘환상’

    그의 소설적 주제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데, 하나는 정치·사회사적 거대 서사의 ‘총체성’과 개인의 성적 욕망이라는 미소(微少)서사의 금기와 그것을 파괴하는 ‘환상’이 그것이다. 개인의 성적 환상을 주제로 한 ‘리고베르토 씨의 비밀 노트’를 예로 들어 줄거리를 살펴보면, 아내를 잃은 아버지가 아름다운 루크레시아를 만나 아들과 함께 새 가정을 꾸리지만, 새 아내인 루크레시아와 아들 폰치토 간의 ‘기묘한’ 육체적인 관계로 인해 새 아내와 헤어진다. 그런데 양아들 폰치토는 새엄마가 보고 싶다고 아버지와 별거 중인 그녀를 찾아가 갖가지 에피소드를 엮어내는데, 서사의 기본 골격은 크게 두 방향으로 진행된다. 매 회 에곤 실레의 그림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을 새엄마와 그녀를 시중드는 하녀의 표정과 자세에 얹어 놓고 슬쩍 열린 문의 틈새나 약간 떨어져 비쳐 보이는 거울로 엿보는 관음증적 서사와 아들과의 부적절한 관계로 인해 헤어졌지만 어쩔 수 없이 여전히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루크레시아에 대한 성적 환상을 비밀 노트에 부려놓는 망상적 서사가 중층적인 흐름으로 병치된다.

    한국 소설계와는 매우 다른 새로운 양상인 요사의 소설을 독자 대중이 흥미를 가지고 따라가기에는 다소 벅찬 감이 없지 않은데, 요사 소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총체적이고 중층적인 구조가 때로 분신처럼 떨어져 나와 단선적인 서사의 흐름을 제시하는데, 최근에 출간된 ‘새엄마 찬양’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전체 중 일부가 한 편의 독립적인 작품의 기능을 하는 형국인데, 사실 작가의 집필 순서로는 ‘새엄마 찬양’이 있고, 그리고 ‘리고베르토 씨의 비밀 노트’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새엄마 찬양’은 ‘리고베르토 씨의 비밀 노트’의 밑그림인 것이다. 위의 ‘리고베르토 씨의 비밀 노트’의 첫 대목에 ‘새엄마 찬양’의 첫 대목을 놓아보자.

    마흔 번째 생일날, 루크레시아 부인은 어린아이가 손으로 쓴 편지 한 장이 베개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조심스럽게 쓰인 글자 하나하나에서 사랑이 듬뿍 느껴졌다.

    생일 축하해요, 새엄마!

    돈이 없어서 선물은 준비 못했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꼭 일등을 할게요. 그게 내 선물이 될 거예요. 새엄마는 이 세상에서 최고예요. 가장 예쁜 사람이고요. 나는 매일 밤 새엄마 꿈을 꿔요.

    다시 한번 생일 축하해요, 엄마!

    알폰소

    -‘새엄마 찬양’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새엄마와의 육체적 관계라니! 금기를 넘어서는 요사의 현란한 소설적 에로티시즘을 접한 한국의 독자들은 새엄마와 양아들, 또 아주머니와의 결혼(‘나는 훌리 아주머니와 결혼했다’)을 제목으로, 그것을 소설의 주 내용으로 삼은 요사의 허구 세계 앞에서 정서적으로 큰 당혹감을 느낀다. 이것은 라틴아메리카의 특수한 사회, 역사, 문화적인 성격을 전제하지 않았을 때 도출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이질혼종의 난투장

    실패한 혁명가의 은둔지로서의 페루(‘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총을 든 수백 명의 유럽 제국주의자(특히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 수많은 원주민이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내주어야 했던 라틴아메리카의 비참한 현실(페루,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등의 20여 개 국가), 이질적인 세계(가톨릭)를 강제로 몸과 영혼 속 깊이 받아들이며 살아남은 사람들의 비현실적 사고 체계와 삶의 양상…. 한마디로 라틴아메리카적인 특성은 외압에 무너진 슬픈 역사가 빚어낸 ‘이질혼종’의 난투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질혼종이 소설과 만나 마르케스의 마술적 리얼리즘이 탄생하고, 요사의 총체적 환상이 펼쳐지며, 코엘뇨의 빛나는 연금술이 생성된 것이다. 21세기의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전방위적인 혼종성(hybrism, 또는 convergence)이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고 있음은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문학의, 나아가 인류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2010년 그 중심에 요사가 있고, 소설의 다른 이름으로 ‘페루’가 새롭게 호명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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