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호

추억이라는 관성의 힘

  •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입력2010-12-22 16: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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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한 해 두 개의 뜻 깊은 행사에 참가했다. 두 행사를 통해 오래되지 않은 나의 과거를 만났다.

    #. 미장센 1

    1989년 겨울. 난 코카서스 산자락 아르메니아공화국의 전파연구소에서 근무했다. 아직 소비에트 연방의 틀 속에 있던 시절이었다. 한술 더 떠 당시 아르메니아공화국은 이웃나라 아제르바이잔공화국과 국경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연구소에서 호텔을 잡아주었지만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동료의 집에서 머물렀다. 국경의 전투 상황이 불안해짐에 따라 식료품 공급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담배를 배급하더니 다음엔 주식인 빵을 배급하기 시작했다. 춥디추운 코카서스의 겨울. 매일 밤마다 눈이 쌓여갔다. 가정집 난방은 기대할 수 없었고, 물 또한 시간을 정해 공급했다.

    전쟁의 공포 속에서도, 연말 분위기는 평화스러운 나라의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나라도 더 장만해 풍요로운 마음으로 해를 보내고, 희망의 새날을 맞고 싶어했다. 하지만 현실 상황은 악화일로였다. 국경의 난민들이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더 어려워졌다.

    친구와 나는 신년을 맞이하기 위해 도장이 찍힌 배급표를 들고 빵을 배급 받기 위해 줄을 섰다. 검은색 외투와 털모자로 무장한 사람들 사이에 빵을 담기 위한 비닐봉지를 들고 줄을 섰다. 당시 나는 빨간색 파카를 입고 있었다. 흑백의 풍경 속에서 빨간색 옷을 입은 내 모습이 이방인인 나의 처지를 더욱 돋보이게만 했다. 당시 빵집 앞에서 빵을 실은 트럭을 기다리던 사람들의 군상은 마치 흑백 판화처럼 현실감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풍경은 현실이었다.



    상황은 더욱 어두워졌고, 빈 트럭만이 도착해 사람들은 흩어져야 했다. 몇몇 사람이 빈 트럭 주위에 몰려 알 수 없는 언어로 항의를 하고 웅성거렸지만, 다들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나보다 더 난감해 하고 낙담한 친구와 눈길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느 관공서 식당 주방의 불빛이 보였다. 그곳에서 둘이 신년을 맞이할 만큼의 빵을 간신히 구할 수 있었다. 우리는 행복한 마음으로 신년을 보드카로 자축했다.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최고의 만찬을 즐기던 기억이 새롭다. 가끔 혼자 그때의 상황을 떠올려보면 ‘따뜻했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

    물리적으로 시간은 흐르고 상황은 바뀌었다. 우리 연구실에 지금 3명의 외국 유학생이 와 있다. 유학생이 많으면 6명이 있을 때도 있었다. 지금은 아르메니아에서 온 알센과 하룻 2명의 연구원과 프랑스에서 온 학생 제롬이 있다. 그들의 가족을 더하면 수가 더 많아진다. 아르메니아에서 온 2명의 연구원은 20년 전 그 친구의 제자들이다. 2명의 젊은 연구원은 내가 아르메니아에서 빵을 배급받기 위해 줄을 섰던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친구들이다. 가끔 이들에게 그 시절 이야기를 하면 “우리 부모님이 가끔 말씀하셨다”라고 간단히 말하곤 한다. 내가 경험했던 과거와 그들의 과거는 일치할 수 없다. 그런 불일치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소통의 한 채널을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추억이라는 관성의 힘


    올해 그 연구소 50주년 기념행사에 초청을 받아 다녀왔다. 당시 함께 고생했던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나에게 마이크로파를 가르쳐주었던 은사님들은 은퇴했다. 당시 연구소 소장이었던 분은 은퇴하셨지만 지팡이를 짚고 행사에 나오셨다. 반갑게 악수를 하자 20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서로 바라보는 눈빛 속에 진정성이 묻어났다.

    파티가 시작되고 한 사람 한 사람씩 자리에서 일어나 보드카 잔을 들고 예전 추억을 하나씩 풀어냈다.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한 시대를 공유했던 사람들이 갖는 공통적인 정서의 관성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구나’ 싶을 만큼 사람들은 변하질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유머가 넘치던 사람은 지금도 재기발랄한 위트로 파티를 빛냈고, 수줍음이 많던 사람은 여전히 수줍게 미소만 지으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 역시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변하지 않은 이방인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 미장센 2

    1980년 나는 격동의 시간 속에 있었다. 얼마 전 대학 입학 30년을 기념한 홈커밍데이 행사가 있다고 연락이 왔다. 홈커밍데이 행사는 30년 전 입학했던 동기들이 모이는 행사였다. 처음에는 갈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가지 않으려고 했을 때는 ‘몇 명이나 온다고, 어색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간다고 생각을 굳히자 기대감으로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대학에 입학한 지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구나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행사장에 일찍 도착해, 한 명씩 늠름하게 걸어 들어오는 친구들을 맞으며 악수를 하자 얼굴이 새롭게 떠올랐다. 가물가물했던 이름도 신기할 만큼 선명하게 기억났다. 함께했던 사람들의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는가보다. 기억이라는 관성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식이 시작되고 원로 은사님의 말씀이 끝나고, 내 친구 기영이가 마이크를 처음으로 잡았다.

    80학번. 광주민주화 항쟁이 시작되고, 그해 5월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학교를 다닐 수 없었던 상황을 비롯해 학창시절 에피소드를 하나씩 들려주자 여기저기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기영이가 2.01의 학점으로 겨우 졸업했음을 이실직고하자 순식간에 모임은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행사를 도와주러 나온 대학원생들 역시 개그 같은 30년 전의 추억담을 들으며 연신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기영이 이야기에 질세라 다른 친구들이 마이크를 잡고 더욱 더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연이어 쏟아냈다. 우리의 모임은 유쾌한 ‘치유의 밤’이 되어버렸다. 어디 한 곳 웃음이 섞일 수 없는 암울했던 상황이 30년 동안 이렇게 달콤하게 변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떫은 감이 가을 햇살과 바람에 달디단 곶감으로 변하는 것처럼.

    #. 에필로그

    한 학기가 끝나간다. 12월의 대학은 학기말 시험을 끝으로 일순 적막강산으로 변한다. 종이 울리면 무리를 지어 움직이던 학생들은 사라지고 몇 명만이 학교를 지킨다. 10층 연구실에서 바라본 학교 정경은 마치 한 해 년 농사가 끝난 들판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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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이라는 관성의 힘
    李基鎭

    1960년 서울 출생

    서강대 물리학과, 동 대학원 석·박사

    現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前 아르메니아과학원 전파공학연구소 연구원, 前 서강대 기초과학연구소 연구원, 前 일본 쓰쿠바대 물리학 문무교관, 前 도쿄공업대 응용물리학과 문무교관

    저서 : ‘맛있는 물리’ ‘제대로 노는 물리법칙’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