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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틀비, 인류의 또 다른 얼굴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바틀비, 인류의 또 다른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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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틀비, 인류의 또 다른 얼굴

필경사 바틀비
허먼 멜빌 지음, 정진호 옮김, 문학동네, 106쪽, 1만1000원

소설을 읽는 것은 새로운 인간을 만난다는 설렘과 황홀을 전제로 한다. 구스타프 플로베르가 창조한 ‘마담 보바리’(1857)의 엠마 보바리, 프란츠 카프카가 창조한 ‘변신’(1916)의 그레고르 잠자, 그리고 알베르 카뮈가 창조한 ‘이방인’(1942)의 뫼르소는 그때까지 독자가 만나본 적 없는 새로운 인간 유형으로 인류사에 기록되었다. 인간은 어디까지 ‘욕망’할 수 있는가(보바리). 인간은 어디까지 다른 종(種)으로 변형(Die Verwandlung)될 수 있는가(잠자). 인간은 어디까지 어미의 죽음에 무심할 수 있는가(뫼르소). 이들 소설의 주인공들을 만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러한 질문에 맞닥뜨리게 되고,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독자는 자신이 처한 삶의 조건, 나아가 인간 조건에 대해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소설이 사회학인 동시에 인류학, 엄밀하게는 인간학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보바리 부인과 잠자와 뫼르소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가려 이제야 한국 독자앞에 나타난 또 한 명의 현대인이 여기 있으니, 미국의 허먼 멜빌이 창조한 필경사(筆耕士) 바틀비다. ‘필경사(scrivener)’란 필사(筆寫)를 하고 글자 수대로 돈을 받던 직업인이다. 이 작품이 쓰인 시기는 미국 경제의 심장부인 월 스트리트가 형성되던 1853년. 맨해튼에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고, 주식 거래가 미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부동산 양도 취급인, 소유권 증서 검증인 그리고 온갖 종류의 난해한 서류 작성자로서의 서기의 직임’을 맡은 변호사의 업무가 대폭 늘어났고, 그에 따라 필경사의 수요가 급증했다. 우리의 주인공 바틀비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 월 스트리트 00번지 2층에 있는 한 변호사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여기에서 그의 첫 등장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의 이방인 중 누구와도 닮지 않은 새로운 유형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침, 한 젊은이가 내가 낸 광고를 보고 찾아와 사무실 문턱에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여름이라 사무실 문이 열려 있었다.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창백하리만치 말쑥하고, 가련하리만치 점잖고, 구제불능으로 쓸쓸한 그 모습이! 그가 바틀비였다.

평소 소설 제목을 관심 있게 본 독자라면, 바틀비라는 인물의 이름을 내세운 이 소설의 1차적 특징을 간파했을 것이다. 나의 주관적인 시선으로 한 인간의 면모를 밀착해서 들려주는 경우를 1인칭 시점, 작가가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듯이 주인공의 의식과 삶을 일관성 있게 그려주는 경우를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고 할 때,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이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후자의 경우에 해당되고,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는 전자의 경우에 해당된다. 바틀비의 등장과 이후 성격(캐릭터) 창조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 화자(話者)인 나인데, 허먼 멜빌은 첫 문장에 단도직입적으로 나를 소개하면서, 앞으로 내가 이끌어갈 ‘바틀비’라는 인물에 대한 ‘관찰과 증언’을 정당화한다.

나는 초로에 접어들었다. 지난 삼십 년간 종사해온 소소한 일의 특성으로 인해 나는 흥미롭고 별스러운 사람들을 남달리 자주 접해왔다. … 내가 보거나 들어 알던 필경사들 중 가장 이상했던 바틀비의 인생에 일어난 몇몇 사건을 위해 다른 필경사들의 전기는 모두 접어둔다.

도대체 바틀비가 얼마나 이상했기에 화자는 30년간 접해온 별스러운 사람들의 목록을 일거에 접어버릴 수 있는가. 처음 ‘나’는 필경사로 고용한 바틀비에게 매우 만족했다. 이미 고용한 필사원 두 명 과 사환 한 명의 업무 능력과 태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근면함과 성실성을 보여주었다.

바틀비는 처음에는 놀라운 분량을 필사했다. 마치 오랫동안 필사에 굶주린 것처럼 문서로 실컷 배를 채우는 듯했다. 소화하기 위해 잠시 멈추는 법도 없었다. 낮에는 햇빛 아래, 밤에는 촛불을 밝히고 계속 필사했다. 그가 쾌활한 모습으로 열심히 일했다면 나는 그의 근면함에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필사했다.

필경사 바틀비는 기대 이상이었던 것. 그런데 만족감 한 편으로 바틀비의 이질적인 태도가 내 마음에 걸리고, 그것을 계기로 바틀비를 세밀하게 관찰하게 되는데, 출근 사흘째 되던 날 바틀비의 독특한 언행과 존재 방식을 접하고 아연 충격을 받는다.

그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사흘째 되던 날인가에 있었던 일이다. … 나는 처리해야 할 작은 일을 마무리하려 급히 서두르다가 불쑥 바틀비를 불렀다. … 나는 그를 부르며 용건이 무엇인지 빠르게 말해주었다. 나와 함께 적은 양의 문서를 검증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틀비가 그의 은둔처에서 나오지 않고 매우 상냥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을지, 아니 당황했을지를 한번 상상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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