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호

바틀비, 인류의 또 다른 얼굴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입력2011-06-21 14: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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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틀비, 인류의 또 다른 얼굴

    필경사 바틀비<br>허먼 멜빌 지음, 정진호 옮김, 문학동네, 106쪽, 1만1000원

    소설을 읽는 것은 새로운 인간을 만난다는 설렘과 황홀을 전제로 한다. 구스타프 플로베르가 창조한 ‘마담 보바리’(1857)의 엠마 보바리, 프란츠 카프카가 창조한 ‘변신’(1916)의 그레고르 잠자, 그리고 알베르 카뮈가 창조한 ‘이방인’(1942)의 뫼르소는 그때까지 독자가 만나본 적 없는 새로운 인간 유형으로 인류사에 기록되었다. 인간은 어디까지 ‘욕망’할 수 있는가(보바리). 인간은 어디까지 다른 종(種)으로 변형(Die Verwandlung)될 수 있는가(잠자). 인간은 어디까지 어미의 죽음에 무심할 수 있는가(뫼르소). 이들 소설의 주인공들을 만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러한 질문에 맞닥뜨리게 되고,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독자는 자신이 처한 삶의 조건, 나아가 인간 조건에 대해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소설이 사회학인 동시에 인류학, 엄밀하게는 인간학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보바리 부인과 잠자와 뫼르소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가려 이제야 한국 독자앞에 나타난 또 한 명의 현대인이 여기 있으니, 미국의 허먼 멜빌이 창조한 필경사(筆耕士) 바틀비다. ‘필경사(scrivener)’란 필사(筆寫)를 하고 글자 수대로 돈을 받던 직업인이다. 이 작품이 쓰인 시기는 미국 경제의 심장부인 월 스트리트가 형성되던 1853년. 맨해튼에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고, 주식 거래가 미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부동산 양도 취급인, 소유권 증서 검증인 그리고 온갖 종류의 난해한 서류 작성자로서의 서기의 직임’을 맡은 변호사의 업무가 대폭 늘어났고, 그에 따라 필경사의 수요가 급증했다. 우리의 주인공 바틀비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 월 스트리트 00번지 2층에 있는 한 변호사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여기에서 그의 첫 등장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의 이방인 중 누구와도 닮지 않은 새로운 유형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침, 한 젊은이가 내가 낸 광고를 보고 찾아와 사무실 문턱에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여름이라 사무실 문이 열려 있었다.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창백하리만치 말쑥하고, 가련하리만치 점잖고, 구제불능으로 쓸쓸한 그 모습이! 그가 바틀비였다.

    평소 소설 제목을 관심 있게 본 독자라면, 바틀비라는 인물의 이름을 내세운 이 소설의 1차적 특징을 간파했을 것이다. 나의 주관적인 시선으로 한 인간의 면모를 밀착해서 들려주는 경우를 1인칭 시점, 작가가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듯이 주인공의 의식과 삶을 일관성 있게 그려주는 경우를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고 할 때,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이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후자의 경우에 해당되고,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는 전자의 경우에 해당된다. 바틀비의 등장과 이후 성격(캐릭터) 창조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 화자(話者)인 나인데, 허먼 멜빌은 첫 문장에 단도직입적으로 나를 소개하면서, 앞으로 내가 이끌어갈 ‘바틀비’라는 인물에 대한 ‘관찰과 증언’을 정당화한다.

    나는 초로에 접어들었다. 지난 삼십 년간 종사해온 소소한 일의 특성으로 인해 나는 흥미롭고 별스러운 사람들을 남달리 자주 접해왔다. … 내가 보거나 들어 알던 필경사들 중 가장 이상했던 바틀비의 인생에 일어난 몇몇 사건을 위해 다른 필경사들의 전기는 모두 접어둔다.



    도대체 바틀비가 얼마나 이상했기에 화자는 30년간 접해온 별스러운 사람들의 목록을 일거에 접어버릴 수 있는가. 처음 ‘나’는 필경사로 고용한 바틀비에게 매우 만족했다. 이미 고용한 필사원 두 명 과 사환 한 명의 업무 능력과 태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근면함과 성실성을 보여주었다.

    바틀비는 처음에는 놀라운 분량을 필사했다. 마치 오랫동안 필사에 굶주린 것처럼 문서로 실컷 배를 채우는 듯했다. 소화하기 위해 잠시 멈추는 법도 없었다. 낮에는 햇빛 아래, 밤에는 촛불을 밝히고 계속 필사했다. 그가 쾌활한 모습으로 열심히 일했다면 나는 그의 근면함에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필사했다.

    필경사 바틀비는 기대 이상이었던 것. 그런데 만족감 한 편으로 바틀비의 이질적인 태도가 내 마음에 걸리고, 그것을 계기로 바틀비를 세밀하게 관찰하게 되는데, 출근 사흘째 되던 날 바틀비의 독특한 언행과 존재 방식을 접하고 아연 충격을 받는다.

    그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사흘째 되던 날인가에 있었던 일이다. … 나는 처리해야 할 작은 일을 마무리하려 급히 서두르다가 불쑥 바틀비를 불렀다. … 나는 그를 부르며 용건이 무엇인지 빠르게 말해주었다. 나와 함께 적은 양의 문서를 검증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틀비가 그의 은둔처에서 나오지 않고 매우 상냥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을지, 아니 당황했을지를 한번 상상해보라.

    ‘필경사 바틀비’는 중편 소설로 작년과 올해 두 출판사에서 두 가지 형태로 출간됐다. 하나는 지난해 1월 창비 세계문학시리즈 중 미국 단편선에 수록돼 표제작으로 쓰였고, 다른 하나는 올해 4월 문학동네에서 하비에르 사발라라는 스페인 출신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과 함께 단행본으로 선보였다. 두 가지 형태가 각각 의미가 있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아니 작가의 관점에서 제일 먼저 찾아본 대목은 바로 위에서 화자인 변호사, 그러니까 고용주가 고용인에게 일을 시키면서 겪은 황당한 일, 그 상황에서 바틀비가 한 대답의 한국어 번역이다. 제목으로 등장한 만큼, 바틀비의 독특한 성격과 존재 방식이 잘 형상화되었는지에 소설의 성패가 달려 있는데, 바로 이 대답,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에 그 초점이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의 철학자들, 곧 자본주의의 분열증을 1000쪽에 걸쳐 묘파한 ‘천 개의 고원’의 저자 들뢰즈나 ‘인간은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호모 사케르의 계시자 조르지오 아감벤, 그리고 이 시대 ‘폭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수동적 저항’의 극단을 제시한 슬라보예 지젝을 사로잡은 요체야말로 바로 바틀비의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문장에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vs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나는 충격받은 감각기관들을 추스르며 잠시 완벽한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곧 내가 뭘 잘못 들었거나, 바틀비가 내 말뜻을 완전히 잘못 알아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어조로 요구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만큼 분명한 어조로 그 전과 같은 대답이 되돌아왔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문학동네판)와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창비판)는 생각의 각도와 인식의 깊이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안고 있다. 허먼 멜빌은 이 문장을 ‘I would prefer not to’로 썼는데, ‘안 하고 싶습니다’로 번역할 경우 영어의 독특한 화법인 ‘부정(否定)의 선택’, 곧 ‘그것을 하도록 되어 있는 현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편을 선택하겠다’는 함의가 지워져버린다. 바틀비가 나, 그러니까 나를 대표로 한 세상에 응대한 말의 총합은 소설에서 열 손 가락 안에 든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또는 ‘지금은 좀 더 합리적인 사람이 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또는 ‘떠나지 않는 것을 택하겠습니다’ 등등.

    어찌된 일인지, 나는 최근에 딱히 적절하지 않은 온갖 경우에 나도 모르게 ‘택한다’는 말을 사용하는 습관이 들었다. 그 필경사와의 접촉이 이미 내 정신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걱정이 되었다. 그로 인해 더욱 심한 다른 비정상이 나타나지 않으리라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 내 사무실에 있는 이상한 인물에 관해 아연해하는 수군거림이 내가 직업상 아는 사람들 사이에 떠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친구들은 내게 끊임없이 잔인한 소견을 들이댔다. … 나는 모든 능력을 총동원해서 이 견딜 수 없는 악령을 영원히 제거하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의 난처한 변호사는 어떻게 했나? 또한 우리의 걱정스럽기 짝이 없는 바틀비는 어떻게 되었나? 소설을 읽는 일은 새로운 인간을 만나 겪는 갈등과 고통, 슬픔과 아름다움을 전제로 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언제나 문제를 안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인데, 중요한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에 독자는 작가의 시선과 태도를 관찰하며 작가의 진정성에 따라 감동의 깊이와 무게가 달라진다. ‘필경사 바틀비’의 경우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로 일관하다가 거대한 월 스트리트의 벽 아래서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죽어간 바틀비의 독특한 존재 방식이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기는 한편, 이 바틀비라는 인물을 끝까지 외면할 수 없도록 ‘나’를 추동시킨 작가 허먼 멜빌의 인류사적 고뇌와 인간애가 스며 있는 문장들은 ‘수동적 저항으로 죽어간 잊을 수 없는 인간, 바틀비’를 창조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며 궁극적으로 소설이란, 작가란 무엇인지를 새삼 돌아보게 한다.

    몸은 이상하게 벽 밑에 웅크리고 무릎은 끌어안고 모로 누워 차가운 돌에 머리를 대고 있는 쇠약한 바틀비가 보였다. 그러나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나는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몸을 굽혀 보니 그는 멍하니 눈을 뜨고 있었다. 그것 말고는 깊이 잠들어 있는 듯했다. 무언가가 그를 건드리도록 나를 부추겼다. 나는 그의 손을 만졌다. 그 순간 찌릿한 전율이 내 팔을 타고 척추까지 올라왔다 발로 내려갔다. … 절망하며 죽은 자들에게 용서를,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죽은 자들에게 희망을, 구제 없는 재난에 질식해 죽은 자들에게 희소식을 … 아, 바틀비여! 아, 인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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