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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 황홀한 도서관 환상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한여름 밤, 황홀한 도서관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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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 황홀한 도서관 환상

‘도둑맞은 편지’
에드거 앨런 포 지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해제, 김상훈 옮김, 바다출판사, 142쪽, 8000원

한여름 밤, 늦도록 바닷가 모래밭을 배회하다 서재로 돌아와 책상앞에 앉는다. 걸음걸음 밀려왔다 밀려가던 파도의 철썩이는 소리, 둘씩 셋씩, 그 이상 무리지어 뛰고, 걷고, 앉아 있던 이방인들의 말소리가 여전히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소라처럼 두 손을 모아 귀에 대고 눈을 감는다. 이방인들 속에 끼어 있다 보면 ‘먼 곳’의 냄새가 불러일으키는 야릇한 감정으로 숨 쉬기가 곤란해진다. 그들 중 누군가 내 귀에 대고, 당신도 떠나라, 여기가 아닌 그 어디라도 떠나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책상 스탠드를 켜고, 보들레르의 시집 ‘파리의 우울’을 펼쳐 든다.

군중 속으로 들어가는 재능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다. 군중을 즐기는 것은 일종의 예술이다. … 군중과 고독, 이 둘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적극적인 시인에게는 서로 교환 가능한 어휘들이다. 자신의 고독을 채울 줄 모르는 자는 또한 군중 속에서도 홀로 존재할 줄 모른다.

-샤를 보들레르 詩 ‘군중’의 일부

낯선 거리, 낯선 사람들 사이를 배회하고 난 뒤에 보들레르의 시를 찾듯이, 보들레르의 시를 읽다보면 필연적으로 생각나는 작가가 있다. 어휘면 어휘, 제목이면 제목, 무드면 무드(mood·작품에 흐르는 전체적인 분위기), 둘은 마치 영혼의 쌍생아처럼, 아니 쌍벽처럼, 서로가 서로를 가리키며 의미를 심화시키고 여운을 증폭시킨다. 이처럼 보들레르 시로부터 두 겹의 독서 체험을 안겨주는 작가가 바로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다. 보들레르의 시 ‘군중’을 읽을 때면, 포의 단편 ‘군중 속의 사람’이 필요하고, 그 역(逆) 역시 완벽하게 일치한다.

땅거미가 지나 혼잡은 한층 더 심해졌고, 등불이 켜질 무렵에는 밀집된 군중이 끊임없이 두 흐름을 이루어 가게 앞을 서둘러 지나갔다. 이 특정한 시각에 이런 상황은 난생처음 경험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머리통이 소란스러운 해류처럼 출렁이는 신기한 광경에 가슴이 뛰었다.

-에드거 앨런 포 ‘군중 속의 사람’ 중에서

보들레르의 ‘군중’으로 글을 열었으나, ‘현대’라는 속성과 ‘현대 예술’ 개념의 출발점인 보들레르의 미학은 모두 에드거 앨런 포로부터 왔다고 해도 지나친 것은 아니다. 포의 열렬한 숭배자로, 그의 작품들을 프랑스에 번역 소개한 이가 보들레르다. 포라는 거울을 통해 보들레르는 ‘군중’을 봤고, 군중의 일부이자 군중 속을 지나가는 ‘개인’을 주목했으며, 이 둘 사이에서 발생하는 ‘고독’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현대’를 ‘일시적인 것’인 동시에 ‘지나가는 것’으로 명명하기에 이르렀다.

통행인 대다수가 만족스러운 듯한 사무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고, 군중 사이를 누비고 빨리 가려는 생각밖에는 없는 것 같았다. 미간을 찡그리고 눈을 자주 흘끔거렸고, 다른 통행인이 밀쳐도 결코 짜증을 내지는 않고, 단지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다음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에드거 앨런 포 ‘군중 속의 사람’ 중에서



보들레르로부터 비롯된 ‘일시적이고’ ‘스쳐 지나가는’ 속성의 ‘현대’ 미학(또는 문학)은 20세기 남미의 보르헤스에 의해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되는데, ‘환상’의 창조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보들레르의 ‘현대’와는 달리 보르헤스의 그것은 그 자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21세기가 그에게 기꺼이 부여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 지금, 우리에게 ‘현대란 무엇인가?’ 보르헤스에게 해답의 요체가 있다. 혼종성(混種性)으로서의 환상. 일찍이 보들레르가 간파한 ‘일시적이고 지나가는 것’에 수수께끼와 같은 ‘신비’와 악몽과도 같은 ‘공포’가 재배열된다. 포의 ‘군중 속의 사람’은 공포보다는 도시인의 고독에 집중하고 있는데, 군중 속 인간의 양상을 스케치하듯 빠르면서도 적확한 묘사로 신비감을 자아낸다. 상상력(신비감)이란 구체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생성될 때 설득력을 얻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군중의 얼굴을 음미하던 중에 갑자기 어떤 얼굴이 눈에 띄었다. 65세에서 70세쯤 되어 보이는 노쇠한 노인이었는데, … 일찍이 내가 목격한 그 어떤 표정과도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 내가 받은 인상을 분석하려고 애쓰던 중에, 마음속에 엄청난 정신력과 경계심, 급박함, 탐욕, 냉담함, 악의, 잔학성, 승리감, 환희, 과도한 공포, 그리고 저항할 수 없는 절망감 등의 감정이 복잡하고 역설적으로 솟구침을 자각했다. 나는 강렬한 흥분을 느꼈고, 경탄했고, 매료되었다. “도대체 얼마나 처절한 역사가 저 사내의 가슴속에 쓰여 있는 것일까!”

-에드거 앨런 포 ‘군중 속의 사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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