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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의 ‘눈으로 듣는 음악’ ②

유대인 멘델스존과 반유대주의자 바그너

결혼행진곡 두 곡, 그 불편한 만남

  • 황승경| 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음악 감독 lunapiena7@naver.com

유대인 멘델스존과 반유대주의자 바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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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가 우상화한 바그너

유대인 멘델스존과 반유대주의자 바그너

아돌프 히틀러는 바그너의 모습과 사상에 심취해 가장 독일적인, 게르만 신화의 이상으로 정립하려 노력했다.

여기서 잠시 유대인의 삶에 대해 알아보자. 유대인의 삶은 역사상 유례없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이집트로의 이주, 바빌론 유수, 유럽으로의 이주와 게토생활, 그리고 히틀러의 대학살 등 이들이 겪은 수난의 실상과 세월의 길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기독교문화권으로 새롭게 재편성된 유럽 사회는 예수를 박해해서 죽였다는 이유로 유대인을 달가워하지 않았을뿐더러 엄격하게 배척하고 차별했다. 그 결과 유대인은 중세 후기 유럽을 휩쓴 페스트가 유대인의 저주라는 소문으로부터, 성경에 나오는 ‘베들레헴 영아 살해’처럼 어린아이들을 유괴·고문·살해한다는 소문,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소문 등 선동적이고 악의적인 소문에 시달렸다.

이탈리아의 경우를 간략히 살펴보면, 1516년 유럽에서 처음으로 베니스에서 유대인을 위한 소수민족 거주구역(게토)을 만들어 유대인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지금도 베니스에는 당시의 거주지역이 남아 있는데, 유대인들은 이 분리된 공간에서 경비병의 감시를 받으며 해 진 후부터 해 뜰 때까지는 게토지역 밖으로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으며, 낮에 게토지역 밖으로 나갈 때에도 붉은색의 뾰족한 모자(일부 다른 도시에서는 노란색)를 써 유대인임을 반드시 표시해야 했다. 이들은 토지를 소유할 수도, 상거래를 할 수도 없고 전문직 종사도 허용되지 않아서 기독교인들이 죄악시하는 금전대부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들은 고리대금업자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라 절박하게 내몰리며 생존을 위해 고리대금업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도 유대인에 대한 당시의 편견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작품은 중계무역 도시로 발전하면서 비교적 타인의 사상과 표현이 자유로웠던 베니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유대인 ‘샤일록’을 인정머리 없는 잔인한 고리대금업자로 묘사하고 있는 까닭이다. 셰익스피어가 재정적인 담보가 전제되어야만 했던 베니스 유대인들의 80년 게토생활에 대해, 그리고 차별과 멸시를 겪으면서 금융업을 이어간 당시 유대인 생활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은 당시 전 유럽에 만연해 있던 유대인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인리히 하이네의 단편 역사소설 ‘바허라흐의 랍비’를 비롯한 많은 문학작품에서 묘사된 것처럼, 유대인의 처참한 생활과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사실상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공공연히 유럽 각지에서 실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폴레옹은 자유와 평등이란 혁명이념을 앞세우면서 이 이념을 전파하려는 정치적 계산으로 정복지의 모든 유대인 게토를 없애고 유대인에게 거주 이전의 자유를 허용했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독일에서 물러간 다음 프로이센 국왕은 유대인들의 자본이 가진 사회적, 경제적 파장을 감안해서 1812년 유대인의 차별금지에 관한 칙령(Emanzipationsedikt)을 선포하고 유대인의 부분적 자율권을 인정했다. 그렇지만 이 칙령은 1815년 이후 프로이센이 획득한 지역에는 적용되지 않았으며, 칙령에 반발하는 반(反)유대 운동이 거세어져 독일 내 여러 도시에서는 폭력사태까지 발생했다. 그 결과 1800년대 후반까지 유대인의 거주지 제한은 여러 독일연방국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이네를 비롯한 많은 독일계 유대인이 프랑스로 이주한 것은 프랑스에서는 1830년 7월 혁명 후 유대인에게도 동등한 법적 권리를 인정해주었기 때문이다.



유대인 이름 바꾼 작곡가들

이 시기에 유대인 작곡가의 상당수는 사회적으로 수세기 동안 계속되어온 반갑지 않은 시선을 극복하기 위해 유대인 이름을 자신이 소속된 국가에 맞게 개명했다. 그랜드오페라 최고의 작곡가라고 칭송받는 자코모 마이어베어(1791~1864)의 본명은 ‘야콥 리프만 마이어베어’로 성은 ‘베어’이고 외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야콥 리프만 마이어’가 원래 이름이다. 그런데 중간 이름과 성을 하나로 합치고 이름을 이탈리아식의 ‘자코모’로 바꾼 것이다. 펠릭스 멘델스존도 기독교로 개종하고 바르톨디를 이름 뒤에 덧붙여 유대인 표시를 감추려 했다. ‘유대인 여자’라는 그랜드오페라를 작곡해 인기를 얻은 프랑스 작곡가 자크 프로망탈 알레비(1799~1862)의 본명도 ‘엘리아스 레비’였다. 반유대주의가 강했던 독일에서 프랑스로 이주한 오페레타의 선구자 자크 오펜바흐(1819~1880)도 원래 이름은 ‘야콥’이었으나 프랑스식의 ‘자크’로 바꾸었다.

당시의 독일 음악계에서는 유대인 작곡가의 작품에 대해서는 음악이 낯설고 그로테스크하며 비독일적인 감상성과 애절함으로 유대인적인 성격을 드러낸다는 식의 논리를 펴고 있었다. 예를 들어 유대인 구스타프 말러의 작품에 클라리넷이 자주 나오며 구슬프고 우울한 느낌과 이국적이고 동양적인 분위기를 주는 것은 그의 출신배경이 음악에 녹아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식이다. 또한 작곡가이자 비평가로 활발한 활동을 한 로베르트 슈만(1810~1856)은 마이어베어의 작품에 대해 추잡하고 부자연스러운 음악과 천박한 리듬이라고 평했다. 물론 비평가로서 슈만이 찬사를 보낸 작곡가는 거의 없기 때문에 마이어베어가 유대인이란 이유로 이 같은 비평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듣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의 분위기는 유대인의 작품을 예술이 아니라 민족적 특징의 발현으로 간주해 사람들은 마이어베어를 유대인에 결부시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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