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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고도 친숙한 모험의 세계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새롭고도 친숙한 모험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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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고도 친숙한 모험의 세계

‘제1회 웹진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이장욱 외 지음, 문학과지성사, 400쪽, 1만1000원

그러고 보니, 어느덧, 2011년도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가끔, 길을 걷다가, 발밑에 와 부딪치는 낙엽들을 처음 본 것인 양 바라보다가 뜬금없이 뒤를 돌아본다. 도대체, 언제, 2000년대란 것이 되었던가,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시간대는 무엇일까. 2000년을 앞둔 1999년의 여름과 가을날들이 떠오른다. 당시 파리에 체류하던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허공을 향해 치솟은 300m 높이의 에펠탑과 맞닥뜨리곤 했고, 자연스럽게 탑신(塔身) 정중앙에 박힌 숫자를 보곤 했다. 숫자는 365에서 시작해 0을 향해 하루하루 줄어들고 있었고, 나는 줄어드는 숫자만큼 알 수 없는 무엇에 은근히 쫓기며 발걸음이 빨라졌다. 숫자가 줄어들고 줄어들어 0에 가까워진 어느 초겨울날, 나는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고, 그리고 2000년대가 시작됐다. 동시에 나는 20세기와 21세기 두 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이 됐다.

파리에서처럼 길을 걷는 일은 드물어졌지만, 곳곳에서 21세기를 알리는 폭죽이 터졌다. 발신처와 발신인을 알 수 없는 새로운 언어가 도착했고, 새로운 감수성이 나타났다. 한동안 하루하루는 새로움의 기호들로 축조됐고, 그렇게 10년, 2012년을 목전에 두고 있다.

새롭고도 친숙한 모험의 세계

‘제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애란 외 지음, 문학동네, 342쪽, 5500원

다시, 길을 걷는다. 발끝에 낙엽들이 와 부딪친다. 잠시 발길을 멈추고 유심히 낙엽 하나를 들여다본다. 그리하여 무엇이 남았나. 지금 무엇이 새로운가. 작가는, 아니 독자는 21세기를 어떻게 알아보는가. 대답 대신 우선, 몇 편의 소설 문장들을 만나볼 필요가 있다.

장마는 지속되고 수박은 맛없어진다. 여름이니까 그럴 수 있다. 전에도 이런 날이 있었다. 태양 아래, 잘 익은 단감처럼 단단했던 지구가 당도를 잃고 물러지던 날들이. 아주 먼 데서 형성된 기류가 이곳까지 흘러와 내게 영향을 주던 시간이. 비가 내리고. 계속 내리고, 자꾸 내리던 시절이. 말하자면 세계가 점점 싱거워지던 날들이 말이다.

-김애란, ‘물속 골리앗’ 중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추한 것을 미워하지. 그러니 어떤 생명체보다도 추한 내가 얼마나 혐오스러울까! 그대, 나의 창조자여, 하물며 당신까지도 자신의 피조물인 나를 혐오하고 멸시하고 있소. 그래도 그대와 나는 둘 중의 하나가 죽어야만 풀릴 끈으로 묶여 있소. … 삶은 비록 고뇌 덩어리라고 해도 내겐 소중한 것이오. 그러니 난 삶을 지킬 것이오. 명심하시오. 당신은 나를 당신 자신보다 더 강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최제훈, ‘괴물을 위한 변명’ 중에서

L의 여자 친구는 거실 한가운데 서서 몸을 반으로 접고 있었다. 그녀의 두 팔이 원숭이의 것처럼 길게 늘어졌다. 이마가 정강이에 붙었다. 마르고 단단한 등, 튀어나온 목뼈와 척추를 중심으로 잎맥처럼 갈라진 근육이 보였다. 그녀는 등이 깊게 파인 레오타드에 몸매가 드러나는 실크 팬츠를 입고 있었다. 내 발소리를 듣고는 허리를 곧게 펴 몸을 일으키며 좋은 아침, 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인사에 답하지 않았다. 오늘은 좋은 아침이 아니었고, 내 거실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신체의 어느 부위에서 나오는지 알 길이 없이 거실 전체에 울리는 숨소리도 거슬렸다. 나는 이 모든 적대감을 숨김없이 얼굴에 드러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의 표정에 영향받지 않았다.

-김유진, ‘희미한 빛’ 중에서

그 세 사람은 유리문을 밀고 들어와 엉거주춤한 자세로 실내를 둘러보고 돈을 지불할 때부터, 김상태는 뭔가 찜찜한 느낌이었다. 불그죽죽한 얼굴에 쥐색 양복을 차려입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가난뱅이 냄새가 나는 중년이 하나, 작은 몸피에 이십대인지 삼십대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 데다 어디서 마주쳐도 기억나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의 여자가 하나, 그리고 낡은 베이지색 점퍼를 되는 대로 걸친 채 다른 두 사람의 표정을 데면데면 살펴보고 있는 중키의 남자가 하나.

-이장욱, ‘곡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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