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명사 에세이

와온 바다의 꿈

  • 곽재구│ 시인·순천대 문예창작과 교수 timeroad99@hanmail.net

와온 바다의 꿈

1/2
와온 바다의 꿈
와온 바다에 새해가 밝아온다.

와온 바다에서 한 해의 첫 해를 바라본 지도 어언 10년이 넘었다. 처음 이곳 바다에 들어섰을 때 생각이 난다. 여수 바다로 향하는 863번 지방도로를 타고 흐르다가 문득 들어선 바닷가 마을에서 해넘이 장관을 보게 됐다. 마을 앞에는 드넓은 갯벌이 펼쳐지고 섬들이 갯물 끝에서 하루의 맨 마지막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갯벌은 해가 자신의 영과 육을 던져 만든 찬란한 노을로 물들었는데 하늘이 아닌 곳에 노을이 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색종이를 찢어 도화지에 붙이는 놀이를 하는 아이의 마음이 되어 저녁노을을 바라보던 나는 마을 이름이 궁금해졌고 낡은 선창에서 만난 노인에게서 와온(臥溫)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그 이름이 내게 경이감을 불러일으켰다. 따뜻하게 누워 있는 바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몸과 마음이 한없이 정직해지고 부드러워졌을 때 만날 수 있는 정결한 평온이 허름한 포구의 이름 속에 깃들어 있었다. 언젠가 이곳 바다에 생의 한 시간을 누이리라는 꿈이 그때 찾아왔다.

갯벌에서 한 무리의 아낙이 꼬막을 채취하고 있다. 아낙들은 널이라고 하는 이동수단을 지니고 있는데 한쪽 무릎을 널 위에 올리고 다른 한쪽 발로 밀어서 움직이는 이 원시적인 이동수단이 없다면 아낙들의 노동은 불가능할 것이다. 겨울 햇살이 느릿느릿 움직이는 아낙들의 등을 비추는 모습이 인상파의 그림 같다. 사실 아낙들의 이 노동은 십년 이십년의 세월이 뼈에 스미지 않은 이라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든 것이다. 널 위에 자신의 몸무게보다 더 나가는 꼬막이나 바지락을 싣고 이동하다가 개흙이 딱딱하게 다져진 곳을 지나갈 적이면 허리는 휘고 눈에서는 피눈물이 난다고, 한 아낙은 어느 날 내게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왜 이곳에 나를 낳았을까 한스러웠다고도 말했다. 그럼에도 내게 이 아낙들의 노동은 한없이 따뜻하고 평온하게 느껴진다. 인간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노동을 하는 모습만큼 건강하고 순결한 아름다움이 있을까.

어느 해 봄 이곳 바다에 들른 박완서 선생은 와온 바다의 갯벌에서 일하는 아낙들을 바라보며 ‘봄날의 꽃보다도 와온 바다의 갯벌이 더 아름답다’는 얘길 했거니와 이는 훌륭한 육체노동을 하는 갯마을 아낙들의 삶에 대한 헌사나 다름없었다. 내가 쓴 시 한 수가 농부가 수확한 감자 한 망태나 토마토 한 광주리 같은 쓸모가 있는가 하는 것은 나의 오랜 관심사였으니 평생 글을 써온 선생에게는 그 소회가 오죽했을까. 밀물이 되어 노동을 마친 아낙들이 햇살과 바람에 그을린 얼굴로 집으로 돌아가던 모습을 바라보며 선생은 내게 ‘나도 이곳에서 좀 살다갈까봐’ 라고 얘기했는데 뒤에 그 말이 선생 또한 이곳 갯벌에 납작 엎드려 널을 밀며 노동하는 삶의 시간을 만나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는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선생이 오래 살아 와온 바다에서 널을 밀었다면 선생은 평생을 하얀 손가락으로 글을 쓰며 산 콤플렉스를 씻었을 것이다.

사실 와온 바다에는 널리 펼쳐진 갯벌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바다가 텅 빈 마음으로 밀려오고 텅 빈 마음으로 다시 밀려 나가는 것이다. 텅 비어 있으니 온몸으로 저녁 햇살을 껴안을 수 있고 텅 비어 있으니 밀려오는 바닷물도 따스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와온의 바다가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이건 1급 비밀이다, 해넘이의 시각이 아니라 만월의 시각이다. 봄날 한없이 둥글고 큰 달이 와온 바다 위에서 달빛을 뿌릴 때면 세상은 온통 눈부신 꽃밭이 된다. 만파식적의 고요함 속에 달빛의 향기가 온 바다를 그윽이 흔드는 것이다. 이럴 때 나는 내가 쓴 시들의 허름한 굴레에서 벗어나 눈앞에 펼쳐지는 생의 한 순결한 꿈에 숨을 죽인다. 가깝고 먼 갯마을의 불빛들, 먼 여행길에서 방금 돌아온 것 같은 섬의 그림자들, 알 수 없는 음절의 노래 한 자락을 떨구며 날아가는 잠들지 못하는 새들…. 핍진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 삶 속에 펼쳐진 이 아름다움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딕’과 ‘앤’생각이 난다. 둘은 부부사이고 네덜란드 사람이다. 둘은 시를 쓰는 한국인 친구와 와온 바다에 들르게 되었는데 그들이 한국을 여행하게 된 내력이 내게 감동을 주었다. 부부에게는 나이가 스물다섯인 딸이 있었는데 한국인 입양아였다. 딸이 스무 살이 되면서부터 부부는 한국행을 계획했다고 한다. 딸에게 친부모를 만나게 해주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다.
1/2
곽재구│ 시인·순천대 문예창작과 교수 timeroad99@hanmail.net
목록 닫기

와온 바다의 꿈

댓글 창 닫기

2018/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