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호

콘텐츠 제작 활성화 기반 VS 투자 빙자한 사금융

문화산업 점령한 벤처 캐피털, 축복인가 재앙인가

  • 송화선 기자│spring@donga.com

    입력2012-02-22 10: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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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텐츠 제작 활성화 기반 VS 투자 빙자한 사금융

    세계 시장에 진출한 국산 애니메이션 ‘빠삐에 친구’와 ‘다이노맘’(왼쪽부터).

    “저는 대한민국 정부 지원, 대한민국 정부 투자, 프랑스 정부 지원 등을 받아 한불합작 애니메이션 ‘빠삐에 친구’를 만든 양지혜라고 합니다. 국산 애니메이션 사상 최초로 EBS와 프랑스 교육방송 채널에서 동시 방송된 이 작품 때문에 저는 지금 빚더미에 앉아 있습니다. 2008년 ‘빠삐에 친구’를 제작하느라 벤처 캐피털로부터 10억 원을 투자받은 게 화근이 됐습니다. 정부가 출자한 ‘모태펀드’가 포함돼 있는 이 돈에, 지난 4년 사이 이자만 4억 원이 붙었습니다. 이자가 한 달에 900만 원씩 늘어나, 아무리 애를 써도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투자자는 부동산을 팔아서라도 당장 상환하라며 저희 회사 사무실에 근저당을 설정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2월 초 열린 대통령과 경제인 간의 간담회 자리. 양지혜 ㈜캐릭터플랜 대표는 대통령을 향해 문화 콘텐츠 제작자로서의 고충을 호소했다. “다들 좋은 얘기만 하는 분위기에서 그런 말을 해도 되나 싶어 목소리가 떨리고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래도 할 말을 하고 나니 홀가분하다”는 그는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업계의 스타 제작자다. 1995년 캐릭터플랜을 세운 뒤 ‘망치’ 등 여러 편의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왔다. 그중에서도 ‘빠삐에 친구’는 2006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애니메이션 우수파일럿 제작지원 사업 선정을 시작으로 2007년 한국콘텐츠진흥원 스타프로젝트 당선, 2008년 대한민국애니메이션대상 대통령상 수상, 2010년 서울시·EBS 공동주최 애니프론티어 당선 등 큰 상을 휩쓸었다. 2008년 6월부터 EBS와 프랑스 France5 채널을 통해 방송되며 대중적인 인기도 얻었다. 양 대표가 간담회 자리에 참석한 것은 문화 콘텐츠 제작자로서 전문성을 인정받은 덕분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는 10억 이상의 빚을 지고 있는 악성 채무자다. 양 대표는 “방송용 애니메이션의 경우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 바로 수익이 생기는 게 아니다. 캐릭터 판매 등을 통해 투자금을 회수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투자자는 당장 돈을 갚으라고 압박한다. 애초에 3년 만기로 채권을 발행했으니 이제 갚으라는 거다. 만기보장수익률 9%도 매 3개월 복리로 꼬박꼬박 부과한다. 이자는 나날이 늘고, 조정의 여지도 없다. 좋은 콘텐츠가 태어나 세상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나는 빚에 쫓긴다. 정부 자금이 들어간 펀드가 이럴 수 있나. 내가 사채를 빌려 쓴 건가. 별별 생각이 다 든다”며 고개를 떨궜다. 목소리가 떨렸다.

    “빌릴 때는 급했구먼”

    “대통령께서 제 말씀을 듣더니 웃으시며 ‘빌릴 때는 급했구먼’ 하시더군요. 정확한 말씀이에요. 빌릴 때 급했던 거죠.”



    2008년의 일이다. 프랑스 애니메이션 제작사 문스쿱과 ‘빠삐에 친구’ 공동 제작 계약을 맺은 양 대표는 양국 교육방송 채널의 편성까지 확정한 뒤에도 투자자를 구하지 못해 애를 태웠다. 각종 공모전에서 우수 콘텐츠로 선정되고 지원금도 받았지만, 국산 창작 애니메이션에 선뜻 제작비를 대는 투자자는 찾기 어려웠다. 그때 한 벤처 캐피털이 손을 내밀었다. 모태펀드 문화계정이 출자한 보스톤영상콘텐츠전문투자조합(이하 보스톤조합)이다.

    모태펀드는 ‘펀드에 대한 펀드(Fund of Funds)’로, 2005년 정부가 벤처 투자 활성화를 위해 조성한 정책자금을 가리키는 말. 고위험 산업에 대한 일반 투자자의 투자를 유인하기 위해, 민간 창업투자사가 만든 투자조합(자식펀드)에 자금을 출자하는 방식으로 운영한다. 이 중 문화계정은 문화체육관광부가 문화산업진흥 및 경쟁력 있는 콘텐츠 육성·개발을 목적으로 출자한 것이다. 이 자금을 받은 조합은 콘텐츠 제작사 지원 및 프로젝트에 우선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보스톤조합도 결성금액 187억 원 중 모태펀드 출자액이 51억 원에 달하는 자식펀드다. 양 대표는 “‘빠삐에 친구’를 방송하기로 한 EBS도 이 펀드에 출자한 상태였다. 이곳에서 투자를 받으면 우리 프로젝트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보스톤조합이 제시한 투자 조건은 예상과 달랐다. 콘텐츠 제작으로 인한 이익과 손실을 투자자가 제작사와 함께 부담하는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신 신주인수권부사채(BW) 발행을 요구했다. BW는 미리 약정한 가격으로 주식을 살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 채권으로, 투자자는 원금과 만기보장수익률에 근거한 이자 소득을 보장받을 수 있다. 주식 가격이 오를 경우 그에 대한 이득도 얻을 수 있다. 물론 경영 실적이나 자금 사정이 좋지 않은 기업의 BW에 투자하면 손해를 볼 수도 있다. 양 대표는 “보스톤조합이 채권의 만기보장수익률을 연 9%로 하고, 상환만기일을 어길 경우 부담해야 하는 연체이자율을 연 25%로 한 것도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콘텐츠 제작 활성화 기반 VS 투자 빙자한 사금융

    문화부는 2012년 업무보고에서 콘텐츠 제작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다.

    “계약조건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하지만 거부할 수는 없었지요. 방송 예정일까지 제작을 마치려면 그 돈이 꼭 필요했거든요. 보스톤조합이 제시한 조건대로 그해 1월에 6억 원, 8월에 4억 원을 투자받았습니다. 그때는 비록 계약은 이렇게 해도 우리가 최선을 다해 좋은 애니메이션을 만들면, 피치 못할 사정으로 투자금을 바로 상환할 수 없게 돼도 이해해주겠지 하는 순진한 생각을 했습니다. 어쨌든 정부가 콘텐츠 제작 활성화를 위해 조성한 자금이 들어온 펀드니까요.”

    3년이 지났을 때, 그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2011년 1월 보스톤조합은 1차로 투자한 6억 원 중 캐릭터플랜이 채 상환하지 못한 4억1285만6343원에 이자 1억2635만4680원을 더한 5억3921만1023원을 요구해왔다. 8월에는 추가로 투자한 4억 원의 원금과 그간 붙은 이자 1억2241만9996원, 즉 5억2241만9996원의 상환을 추가로 요구했다. 3년 동안 1억8000여만 원을 갚았지만, 채무는 원금보다 6000만 원 이상 많아진 상태였다. 게다가 이제 연 25%의 연체이자까지 물어야 할 상황이 됐다. 양 대표는 “콘텐츠가 좋은 반응을 얻고 있지만 방법이 없었다. 원금을 상환할 상황이 아닌 걸 알고 보스톤조합도 지금까지와 똑같은 조건으로 채권 만기를 2년 연장시켰다. 대신 이제껏 쌓인 이자는 갚아야 한다며 회사 사무실 처분을 요구했다. 사무실에 근저당을 설정하면서 나와 회사 이사들이 인담보도 서게 했다”고 했다. 문제는 부동산 경기 침체 탓에 사무실이 팔리지도 않는다는 점. 양 대표는 “이자는 계속 늘어나 4억 원이 돼가는데, 이렇게 2013년이 와 원금까지 상환해야 하게 되면 어떻게 할지 걱정”이라고 했다. “최선을 다해 좋은 콘텐츠를 제작한 문화예술인에게 이럴 수는 없다. 금융 논리를 문화산업에 여과 없이 적용하면, 앞으로 누가 콘텐츠 제작에 뛰어들겠느냐”는 게 그의 호소다.

    원금 10억에 이자 4억

    보스톤조합도 할 말은 있다. 이원화 보스톤조합 대표펀드매니저는 “투자와 지원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양 대표는 이 두 가지를 혼동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보스톤조합이 캐릭터플랜에 투자한 금액은 운용사를 믿고 여러 투자자가 보내온 돈이며, 보스톤조합은 이들의 수익 실현을 위해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모태펀드 출자에 대해서도 그는 “정부가 국민 세금으로 조성한 펀드가 들어왔다면 더욱 손실 없이 관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정부 자금이 투자됐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펀드가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국내 애니메이션 산업은 긴 제작기간, 한정된 매출구조, 영세한 제작 환경 등의 요인 탓에 투자 위험이 높은 분야로 평가받는다. 일반 창투사들은 해외 투자유치, 해외 수출, 국내 방송사와의 편성계약 등이 완료돼 성공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작품에조차 투자하기를 꺼린다. 2011년 관객 220만 명을 돌파하며 화제를 모은 극장용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을 연출한 오성윤 감독도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6년 내내 자금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고 털어놓을 정도다. 그는 “애니메이션 제작사만의 힘으로는 투자를 받기 힘들 것 같아 영화사 명필름과 공동제작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도 투자 유치가 쉽지 않았다. 베스트셀러 원작 소설, 유수 영화사와의 공동 제작으로도 펀딩이 안 된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다”고 했다. 정부가 모태펀드 출자 등을 통해 정책적으로 민간 투자를 유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원화 대표펀드매니저는 “우리가 ‘빠삐에 친구’에 투자한 것도 모태펀드를 받았기 때문”이라며 “정책적인 고려가 아니었다면 애당초 이런 투자계약 자체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투자 대상으로 매력 있는 프로젝트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양 대표의 열정이 감동적이었지요. 그는 이 애니메이션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말했고, 그렇게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습니다. 어떻게든 돕고 싶었지요. 양 대표도 인정하겠지만, 당시 보스톤조합의 투자가 없었다면 ‘빠삐에 친구’는 정상적으로 제작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투자자에게 손실을 끼치지 않으면서 이 프로젝트에 투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오랫동안 심사숙고한 끝에 투자 조건을 구성했고, 그걸 양 대표가 받아들여 투자가 이뤄진 겁니다.”

    콘텐츠 제작 활성화 기반 VS 투자 빙자한 사금융

    콘텐츠 투자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

    이자 감면은 배임 행위

    이원화 대표펀드매니저는 “정책자금이 들어온 펀드라는 데서 느끼는 책임감도 투자 결정을 내리는 데 한몫했다. 양 대표는 이 투자를 받음으로써 콘텐츠를 완성할 기회를 얻지 않았나. 나는 모태펀드가 하는 일이 그거라고 생각한다. 손실을 감수하는 게 아니라, 가능성 있는 콘텐츠 제작자의 제작 여건을 개선해주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만기보장수익률과 연체이자율이 지나치게 높다는 양 대표의 지적에 대해서도 “결코 그렇지 않다”고 반박했다.

    “우리 조합의 성공보수 기준수익률이 8%입니다. 고위험을 감수하고 투자하는 벤처 캐피털 업계에서 9%는 상당히 낮은 이율이에요. 게다가 캐릭터플랜 신주인수권부사채의 표면금리는 0%였습니다. 만기 전에 원금을 상환했으면 이자를 전혀 낼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지요. 저는 캐릭터플랜 측이 계약 당시 이 조건에 만족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프로젝트 성공을 확신했으니까요. 투자란 게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런데 상환할 때가 돼 ‘조건을 바꿔달라’고 하는 건 경제 정의를 무너뜨리는 겁니다.”

    그는 “우리는 펀드 운용에 대해 감사원 감사를 받는다. 내가 투자자의 손실을 감수하며 멋대로 계약 내용을 변경하면 배임으로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 계약서를 바꾸라는 건 조합 문을 닫으라는 것과 같은 얘기”라고 했다.

    보스톤조합이 속해 있는 리딩인베스트먼트㈜ 김현우 대표이사도 “문화산업의 특수성을 고려해달라는 요구도 부적절하다. 그렇게 따지면 바이오산업이나 IT산업에도 특수성이 있다. 손실이 날 때마다 ‘산업의 특수성을 고려해 배려해달라’고 하면 어느 투자자가 벤처 기업에 투자하려 하겠나. 그것은 모태펀드라는 시드 머니를 통해 민간 투자를 활성화해 더 많은 돈을 문화 콘텐츠 산업에 끌어들이려 한 정부의 정책 취지에도 어긋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양 대표님은 이자 때문에 힘들다고 하지만, 사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자를 낸 적이 없습니다. 원금을 일부 상환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배임 위험을 무릅쓰고 채권 만기를 연장해드린 건 ‘빠삐에 친구’ 프로젝트가 제 궤도에 올라 2년 후에는 수익을 내는 콘텐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이런 배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나쁘다’고만 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캐릭터플랜과 보스톤조합 사이에는 도무지 접점을 찾기 어려운 의견 차이가 있었다. 문화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양쪽이 동의한 계약 내용에 따라 조치가 진행되고 있고, 애초의 계약 조건도 벤처 캐피털의 투자 관례에 비춰볼 때 불공정한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관여할 계획이 없다.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상태”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런 갈등이 상당수 콘텐츠 제작자와 투자조합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문화산업은 다르다”

    뮤지컬 ‘맘마미아’ ‘시카고’ 등을 제작한 박명성 신시뮤지컬 대표는 공공연히 “나는 펀드 투자를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 “현재의 펀드는 공연 제작의 위험과 기회를 함께 나누는 공정한 투자를 하지 않으며, 사채와 다를 바 없는 행태를 보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화려한 휴가’ 등을 제작한 유인택 군장대 석좌교수도 “문화투자 펀드 중 상당수가 투자 대가로 원금 보장과 연대 보증, 심지어 담보 설정까지 요구한다. 상당수의 제작자가 그런 투자를 받았다가 발목이 잡혀 회사 문을 닫고 제작 현장까지 떠났다. 이들의 귀한 경험과 노하우가 사장된 건 안타까운 일”이라고 했다. 유 교수 본인도 2008년 한 영화 제작사가 창투사로부터 받은 투자금 3억 원에 연대보증을 섰다가 지금까지 채권 추심을 당하고 있다. 그는 “당시 영화 촬영 도중 제작자가 쓰러져 식물인간 상태에 빠지면서 제작이 중단됐다. 제작비 조달이 불가능해진 탓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불행한 사고였다. 그런데 투자자는 이런 위험을 공유하려 하지 않고 원금 상환만 요구한다. 이게 상식적인가”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게임업체 관계자는 “콘텐츠 제작자들은 기본적으로 벤처 캐피털이 프로젝트에 돈을 빌려주고 수익을 챙겨가는 곳이 아니라 프로젝트를 함께 키워 과실을 나누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모태펀드 문화계정 펀드 운용사들이 워낙 다양한 방법으로 위험을 회피하고 원금을 회수하려 하기 때문에 사실상의 사금융으로 여기는 것”이라고 했다. 문화예술인들은 공통적으로 투자조합이 콘텐츠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것에 대해 불쾌해한다.

    콘텐츠 제작 활성화 기반 VS 투자 빙자한 사금융

    (주)캐릭터플랜 양지혜 대표가 2008년 국정감사에서 문방위원들에게 콘텐츠업계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에 대해 벤처 캐피털 관계자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투자의 기본은 수익 추구이며, 문화산업에 대한 존중보다 중요한 것은 계약 준수”라는 의견에서다. 한 벤처 캐피털 펀드매니저는 “우리는 투자 계약을 할 때 수익 달성을 위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피투자자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그쪽에서 동의할 때만 투자금을 집행한다. 그런데 문화계 인사들은 돈이 필요할 때는 조건에 다 동의하고 나서, 손실이 나면 꼭 ‘문화산업 특수성’ 운운하며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상식적인 대화가 안 되면 계속 문화투자를 하기 어렵다”고 했다. 금융계 인사들은 문화 투자의 어려움으로 낮은 수익률과 더불어 소통의 어려움과 자금 집행의 불투명성을 꼽는다. 하지만 캐릭터 ‘뽀로로’나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서 보듯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문화 콘텐츠는 금융자본에 매력적인 투자처이기도 하다.

    문화부도 투자자들이 문화산업의 특수성을 일부분은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2011년부터 모태펀드 문화계정 투자조합결성 공고문에 “원금 보장형 투자방식은 안 된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러나 신주인수권부사채, 전환사채 등을 통한 창투사의 위험 회피는 규제하지 않는다. 모태펀드는 자식펀드에 출자할 뿐, 운용책임은 민간 투자사가 지는 것이므로 무리하게 관여할 수는 없다는 설명이다. 이런 결정의 배경에는 모태펀드의 수익 실현을 바라는 정부의 속내도 숨어 있다.

    문화부는 지난해 4월 ‘콘텐츠산업 금융·투자 지원제도 설명회’를 여는 등 콘텐츠 산업에 대한 시중 금융 및 투자 기관의 투자 활성화를 유도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문화부에 따르면 2006년 모태펀드 문화계정이 생긴 후 2011년 12월까지 이 자금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투자조합은 36개로 결성금액은 7844억 원(모태펀드 출자액은 3220억 원)에 달한다. 모태펀드 영화계정에서도 3개 투자조합, 370억 원(모태펀드 출자액은 180억 원) 규모의 자금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그동안 1010개의 프로젝트에 대해 총 6430억 원 규모의 투자를 집행했다.

    문화부는 2012년에도 모태펀드의 문화·영화 계정을 통해 모두 1700억 원의 콘텐츠 펀드를 조성할 계획이다. 애니메이션/캐릭터(200억 원), 음원/공연(200억 원) 등 투자가 상대적으로 적은 소외 장르와 콘텐츠 제작 초기 단계(200억 원)에 중점적으로 투자하는 콘텐츠 펀드를 만들고, 우리 콘텐츠의 해외진출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글로벌콘텐츠펀드(1000억 원)를 추진하며, 영화계정을 통해서는 한국 영화에 투자하는 100억 원 규모의 펀드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이 액수를 지난해 말까지 조성된 8244억 원과 더하면 올해는 모태펀드를 통한 콘텐츠 펀드 조성 규모가 1조 원을 넘어서게 된다. 박혜진 문화부 문화산업정책과 사무관은 “문화부는 2006년부터 문화산업진흥기금의 콘텐츠 투·융자 지원제도를 폐지하고 모태펀드를 통한 투자조합 결성에 큰 관심을 쏟고 있다. 정부 자금만으로 문화계를 지원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민간 투자를 활성화해 콘텐츠 제작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게 문화부의 입장”이라고 했다.

    그러나 영화, 드라마, 창작뮤지컬, TV애니메이션과 같은 문화산업은 투자 위험성이 매우 높은 분야인 게 사실이다. 최근 한류를 기반 삼아 글로벌 시장을 겨냥하는 콘텐츠 제작이 늘면서 투자규모는 크게 늘었지만, 투자 성과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콘텐츠 완성 후 흥행이라는 일회적인 결과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제작 단계에서는 성공 여부를 점치는 게 매우 어렵다는 점도 투자의 위험성을 높인다. 이런 산업에 민간 투자를 유인하려면 문화 투자로 높은 수익을 거둔 성공사례가 필요하다. 최근 모태펀드가 출자한 투자조합이 영화 ‘최종병기 활(55억)’‘도가니(21억)’,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4억)’, 드라마 ‘보스를 지켜라(14.4억)’, 공연 ‘광화문연가‘ (5억)’ 등에 투자해 최대 100%까지 수익을 거뒀다는 점을 문화부가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위험, 저수익

    콘텐츠 제작 활성화 기반 VS 투자 빙자한 사금융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의 한 장면.

    2010년 문화부가 실시한 콘텐츠 업계 실태조사(복수응답)에서 콘텐츠 제작자들이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은 것이 자금조달(70%)이었다. 문화부는 모태펀드를 기반으로 한 투자조합 증가가 콘텐츠 제작자의 자금난 해소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문화부 관계자는 “정부가 기금을 투자해 모태펀드를 운용하는 이유는 먼저 위험이 큰 분야 투자에 나서고, 이를 통해 수익을 내는 선례를 만들어 민간 자금의 유입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라며 “따라서 시장 논리에 따라 투자자들이 많은 수익을 얻어가도록 도우려 한다”고 설명했다. 빈기범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도 “수익이 안 나오는 분야에는 ‘금융투자’가 이뤄질 수 없다. 이를 유도해서도 안 된다. 문화의 다양성을 위해 꼭 필요한 순수 예술 분야의 성장, 발전, 대중화는 정부가 무상 지원 방식으로 이루면 된다. 대신 정부가 무상 지원할 정도의 사회적·문화적 가치를 지니지 않은 콘텐츠 산업에는 수익성이 전제가 돼야 한다. 이를 기반으로 삼은 투자 유치를 통해 발전시키는 게 바람직하다”고 했다.

    수익성이 투자 유치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현재의 ‘방임정책’에 불만을 나타내는 목소리도 있다. 영화제작사 싸이더스에서 ‘살인의 추억’ ‘싱글즈’ ‘말죽거리 잔혹사’ ‘범죄의 재구성’ 등을 제작한 영화인 출신으로, 지금은 340억 원 규모의 ‘동문미디어콘텐츠·문화기술투자조합’ 펀드매니저로 일하는 노종윤 씨는 “현재 문화콘텐츠에 투자하는 벤처 캐피털의 펀드매니저는 대부분 투자 분야의 전문가일 뿐 문화에 대해 무지하다. 그들에게 투자 결정을 맡기다보니 메이저 회사 작품이나 스타성 있는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 말하자면 흥행이 보장된 듯 보이는 영화에만 펀드 투자가 몰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에 따라 대형 제작사는 투자를 마다하고, 정작 정책적인 투자가 필요한 영역은 외면당하는 현상이 나타난다”며 “펀드의 본질이 수익 추구라고 해도, 문화 산업의 특징을 반영해 투자자가 제대로 수익을 추구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문화계정의 지원을 받으려는 창투사에 문화계 인력을 의무적으로 채용하도록 하는 방법 등을 검토해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다양한 장르에서 가능성 있는 콘텐츠가 발굴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문화산업의 다양성 확보와 수익 추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노 씨는 나아가 문화 쪽에 특화된 ‘스페셜리스트 투자조합’의 결성도 제안했다. 유인택 군장대 석좌교수도 “현재 투자조합들이 돈만 좇아 투자하기 때문에 콘텐츠 제작자들이 상처를 입고, 중소규모 제작자는 타격을 받는 것”이라며 “문화 전문 펀드 매니저를 육성해 장기적인 관점에서 프로젝트의 발전과 수익 실현을 함께 고민하는 펀드를 운용하도록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장기적인 지원 정책

    현재 수익성이 다소 취약한 콘텐츠라도 발전 가능성을 판단해 장기적이고 전문적인 지원을 계속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연구 자료에 따르면 프랑스는 아동·청소년의 정서를 보호한다는 문화보호적인 목표와 자국의 영상산업을 강화한다는 산업 육성적인 목적에서 애니메이션 산업을 지원한다. 프랑스의 모든 방송사는 애니메이션 제작비 쿼터제 적용 대상으로, 매년 전체 매출의 일정 비율을 애니메이션 제작비로 낸다. 공영방송 France Television은 이에 따라 2005~06년 5000만 유로, 2007~08년 5250만 유로, 2009~10년 5500만 유로를 극장 및 TV용 애니메이션 제작에 투자했다. 상업방송인 TF1과 M6도 매출의 0.6%와 1%를 각각 극장 및 TV용 애니메이션 제작에 투자한다. 케이블과 위성채널도 방송위원회와의 협약에 따라 애니메이션 지원 의무를 진다. 김영재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우리도 ‘뽀로로’의 성공을 통해 알 수 있듯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지만 현재는 소외돼 있는 애니메이션 분야의 수익성 증대를 위해 방송사업자 제작비 쿼터제, 제작자동지원제도 도입, 애니메이션 진흥기금 신설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제작자동지원제도는 국산 애니메이션이 방송사의 투자 및 판권 구매 등 일정 조건을 충족시킬 경우 공공기금을 활용해 일정 비율의 제작비를 자동적으로 지원해주는 제도로 현재 프랑스와 캐나다 등에서 시행 중이다.

    백승혁 한국콘텐츠진흥원 정책연구팀 선임연구원은 “제작비 지원 못지않게 중요한 건 제작 기여도에 대한 콘텐츠 제작자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라며 “콘텐츠 제작자가 금융 자본에 비해 투자액이 적더라도 적절한 성과·권리 배분 시스템에 따라 수익에서 정당한 권한을 갖고, 향후 그 성과를 제작에 재투자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런 주장은 ‘마당을 나온 암탉’의 오성윤 감독이 흥행 성공 뒤 인터뷰에서 “콘텐츠를 창작하고 그것을 완성해가는 시간과 노력이 재화의 가치로 환산되지 않아 고통스럽다. 흥행에 성공했고 DVD 온라인 다운로드도 1등을 차지했으며 해외 수출 길도 열렸는데 정작 창작자·제작사에 돌아오는 게 너무 적다. 다음 작품에 투자할 게 없을 정도로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고 한 것과 맥이 통한다.

    정부는 올해를 ‘지식재산 강국 원년’으로 선언했다. 성장 잠재력이 큰 3D, 컴퓨터그래픽, 스마트 콘텐츠 등 5개 분야에 대한 지원체계를 구축해 매출 1억 달러가 넘는 콘텐츠를 2010년 16개에서 2020년까지 100개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또 문화산업에 투자하는 모태펀드 규모를 2020년까지 2조 원으로 확대하겠다고도 밝혔다. 이를 통해 지난해 42억 달러를 기록한 문화 콘텐츠 수출액을 2020년 224억 달러로 5배 이상 늘려, 세계 문화 콘텐츠 시장점유율을 5%(5위)까지 끌어올린다는 구상이다.

    박혜진 문화부 문화산업정책과 사무관은 “콘텐츠 제작을 활성화해 다양한 장르에서 질 좋은 콘텐츠를 개발·육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문화부에서는 문화예술계 인사와 금융 투자자의 의견을 수렴해 양자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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