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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의 ‘눈으로 듣는 음악’ ⑧

‘마에스트로의 전설’ 구스타프 말러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 황승경 │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마에스트로의 전설’ 구스타프 말러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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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스타프 말러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두 사람은 폭군에 가까운 괴팍한 성격 외에 닮은꼴을 찾기 어렵다. 말러가 작곡자의 의도를 격정적으로 과장하면서 음악의 이상적 표현을 이끌어냈다면, 토스카니니는 작곡자가 창조한 원래의 리듬과 셈여림을 그대로 살려 어떤 주관적 감정표현도 하지 않았다. 서로에 대한 평가도 엇갈린다. 말러는 토스카니니에 대해 “나와는 전혀 다르게 지휘하지만 대단한 지휘자”라고 칭찬한 반면, 토스카니니는 “병든 가련한 신사는 절대 극적이지 않았다”고 말러를 혹평했다. 하지만 후세들은 지독한 완벽주의자로 악명을 떨친 두 지휘자에게 ‘전설적인 마에스트로’라는 같은 평가를 내렸다.
‘마에스트로의 전설’ 구스타프 말러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구스타프 말러(왼쪽)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오른쪽)

지난해 말 서울시가 정명훈 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연봉을 7억 원 삭감해 3년간 재계약하면서 정 지휘자의 고액연봉이 세간의 관심이 됐다. 이전에 그가 받던 20억여 원의 연봉에 대해서도 과다하다 아니다 논쟁이 일었다.

필자에게 “교향악단에 지휘자가 꼭 있어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도 더러 있다. 연주할 음악에 대해 모든 분량의 리듬과 셈여림을 그대로 컴퓨터에 입력해 그때그때 연주자에게 신호를 주는 시스템을 만들면 된다는 사람도 있다. 컴퓨터가 홀 안의 음향을 흡수해 셈여림을 인지하게 하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설명하는 건 곤혹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필자는 “지휘자가 없으면 오케스트라의 음악은 이루어질 수 없고, 지휘자에 따라 음악은 당연하게 바뀌는 것”이라고 대충 얼버무린다.

이렇듯 지휘자가 음악에서 하는 역할은 필수불가결한 것이지만, 그게 무엇인지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설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음악의 역사에서 직업 지휘자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세기 후반이었다. 물론 그전에도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에게 박자와 템포를 주는 누군가는 항상 있었다. 그 역할은 일반적으로 작곡가가 맡았다. 예컨대 프랑스에서 활약한 작곡가 장 바티스트 륄리(1632~1687)는 지팡이 형태의 지휘봉을 땅에 두드리면서 곡에 박자와 리듬을 부여했었다. 그런데 루이 14세의 쾌유를 축하하는 연회에서 ‘데 테움(Te Deum)’을 열정적으로 연주하다가 지나치게 흥분해 자신의 발가락을 찍는 대형사고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농양이 생겼고 발가락을 잘라내야 했지만 그는 끝내 수술을 거부해 결국 사고 74일 만에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글룩, 모차르트, 베버, 스폰티니, 멘델스존, 바그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곡가가 지휘자의 역할도 함께 수행했다.

지휘자들은 처음에는 종이를 말아서 악보대를 치며 지휘했다. 거기에서 나오는 소리로 막을 알려주는 청각 방식을 이용하다가, 이후 시각적으로 비트를 주는 지휘 방식으로 변화했다. 초창기 지휘는 맨손으로 했지만, 독일의 베버와 멘델스존은 확실하고 정확한 템포를 주기 위해 지휘봉을 처음 사용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가난한 베버는 나무 지휘봉을 사용했는데, 지휘봉에 익숙하지 않았던 단원들은 지휘봉을 회초리로 생각했다고 한다. 반면 부유했던 멘델스존은 상아에 도금이 된 지휘봉을 우아하게 휘둘렀다.

최초의 직업 지휘자, 한스 폰 뷜로

산업혁명 이후 중부 유럽에서 산업은 급속도로 발전했고, 신흥 부르주아를 위해 웅장한 연주회장이 만들어졌다. 또 오케스트라의 구성원이 늘면서 음향도 한결 풍부해졌다. 그 결과 웅장한 연주회장에 울려퍼지는 풍성한 소리를 누군가가 때로는 맑고 아름답게, 때로는 극적으로 휘몰아치는 음색으로 재창조할 필요성이 생겼다. 각 악기의 음악적 성격과 소리를 잘 이해하면서 연주곡에 적합한 소리를 설계하고 질감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지휘자에게 요구하게 된 것이다. 음악사가들은 이런 필요에 의해 나타난 최초의 직업 지휘자로 한스 폰 뷜로(1830~1894)를 꼽는다. 그렇지만 후세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는 최초의 직업 지휘자여서가 아니라 아내 코즈마가 그의 스승인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폰 뷜로 이후 지휘자는 단원을 통솔하고 템포와 셈여림을 전달하는 역할을 넘어 음악을 하나의 이념으로, 창조적인 예술로 당당하게 승화시키는 예술가로 자리 잡는다. 지난 150년 동안 뛰어난 지휘자, 전설적인 마에스트로는 여러 사람 있었지만, 그중 타협을 거부하고 지독한 완벽주의자로 악명을 떨친 지휘자는 구스타프 말러(1860~1911)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1867~1957)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음악과는 상관없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혈연 지연 등 외부적 도움 없이 오로지 강한 의지와 자신의 능력으로 최정상의 지휘자 자리에 올랐다.

구스타프 말러는 지휘자인 동시에 작곡가였다. 그는 50년이란 짧은 생애에 가곡 45곡과 교향곡 11곡(‘대지의 노래’와 미완성인 ‘10번’ 포함)을 작곡했다. 체코 보헤미아 지방의 작은 마을 칼리슈트에서 오스트리아계 유대인으로 태어난 말러가 어린 시절 접할 수 있었던 음악은 군대음악과 가톨릭 종교음악, 그리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민속음악이 전부였다.

말러의 초상화나 캐리커처를 보면 영락없이 깐깐한 사상가, 혹은 고뇌하는 철학자의 모습이다. 거의 병적으로 자신의 음악세계에 갇혀 살았고 주위 사람을 이해하고 보살피는 데 인색했다. 사람들은 그의 괴팍한 성격이 어릴 적 우울한 가정사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그의 아버지는 거칠고 폭력적인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자애롭고 우아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유년기에 주로 어머니에 기대어 성장했다.

평상시 연습시간을 절대 바꾸지 않던 말러는 어느 날 연습시간을 4시간 미루었다. 의아해하는 단원들에게 “결혼을 하고 왔다”고 해명한 뒤, 평상시와 다름없이 벼락같이 화를 내고 연습을 시작해 단원 모두를 경악시켰다는 일화만 봐도 그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말러는 음악에 대한 타고난 열정과 관심으로 15세에 오스트리아 빈으로 유학을 떠나 20세에 할레가 극장 여름지휘자가 되었다. 그 후 프라하, 라이프치히, 부다페스트, 함부르크에 이르는 수많은 도시를 전전하며 자신의 명성을 이어갔다. 때로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때로는 자신의 음악만을 고집하는 괴팍한 성격 때문에 지휘자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의 뛰어난 음악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말러는 함부르크 오페라극장에서 6년을 보내면서 그의 이름을 전 유럽에 각인시켰으며, 그 결과 37세에 꿈의 무대로 동경했던 빈 왕립오페라극장 예술 감독으로 부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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