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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 사실과 기억의 왜곡 사이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예감, 사실과 기억의 왜곡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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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 사실과 기억의 왜곡 사이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다산책방, 268쪽, 1만2800원

줄리언 반스의 신작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펼치면서 깜짝 놀랐다. 누군가의 음성, 음성의 분위기, 분위기의 수위가 고스란히 떠올라 읽는 내내 메아리처럼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너무 많은 소설을 읽어온 탓인지, 때로 서로 다른 소설이 근친적으로 엉겨 붙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한 편의 소설 속에 여러 편의 소설, 여러 작가의 흔적이 새겨져 있는 경우도 있다.

특별한 순서 없이, 기억이 떠오른다.

반들반들한 손목 안쪽.

뜨거운 프라이팬이 젖은 싱크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지면서 솟아오르는 증기.

방울방울 떨어져 수챗구멍 속을 빙글빙글 돌다가, 층고 높은 집의 기다란 홈통 전체를 타고 흘러내려가는 정액.

(중략)

잠긴 문 뒤의, 오래전에 차갑게 식은 목욕물.

마지막 것은 내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

-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에서

소설의 첫 대목인 이 부분에서 뒤라스의 회상에 잠긴 음성이 느껴지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비선형적 서술, 사건도 시제도 자유로이, 과거의 일조차 예감의 세계로 둔갑시키는 기묘한 분위기의 ‘연인’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말이다.

내 생(生)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 거기에는 중심이 없다. 길도 없고, 경계선도 없다. … 때때로 이런 생각이 든다. 마구 뒤섞인 일들을 모두 내가 강한 자의식을 가지고 한 것도, 그렇다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내버려 둔 것도 아닌 이런 시기에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또한 뒤섞인 일들이 매번 그 본질을 규명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일에 흡수되어버리는 이런 시기에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과시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인환 옮김, 민음사 출간, ‘연인’ 중에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줄리언 반스가 65세에 쓴 노블(novel)이고, ‘연인’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70세에 쓴 로망(roman)이다. 둘 다 길지 않은 분량의 장편인데 명칭은 두 나라에서 다르게 불린다. 한국에서라면 경장편 소설로 분류될 것이고, ‘돈키호테’의 나라 스페인에서라면 ‘노벨라’라고 명명될 것이다. 소설마다 분량에 적합한 사건과 인물, 주제가 있다. 2011년 영미권 최고의 소설문학상인 맨부커상에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가 선정된 뒤, 몇몇 전문 평론가는 150쪽 내외 분량의 이 작품의 정체를 파악하고 미덕을 전하기 위해 ‘노벨라’를 제시했다.

노마디즘의 창시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저서 ‘천개의 고원’에 따르면 노벨라는 비밀을 다루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노벨라보다 짧은 소설인 단편 소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다루는 것과 차이가 있다. 노벨라의 생명은 비밀을 창출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능력이다. 이를 위해 독자는 한 편의 노벨라에 몇 개의 스토리 라인이 작동되고 있는지를 관찰하고, 작가가 그 선들을 발생시키고 조합하는 정도, 나아가 결합시키는 능력에 따라 감동을 받는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산다. … 가끔, 시간은 사라져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이 정말로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 이제는 일화가 된 몇몇 사건과, 시간이 변모해가면서 확신으로 굳어진 덕분에 꽤 사실에 근접했다고 할 수 있게 된 몇몇 기억들을 돌이켜보아야 한다. 실제 사건들에 대해 더 큰 확신을 가질 수 없어도, 최소한 그런 일들이 남긴 인상에 대해서만은 정직해질 수 있을 것이다. … 우린 원래 셋이었고, 그가 네 번째로 합류했다.

-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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