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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비평

한국인의 집단 정체성

  • 김성해│대구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국인의 집단 정체성

위대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일을 하고자 노력하는 평범한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가치관과 비전의 응집체라고 할 수 있는 자기 정체성이다.

하버드대 졸업생의 다른 점

미국 뉴욕에서 고등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 있었다. 성적이 비슷한 졸업생들이 하버드대와 뉴욕주립대를 나온 이후 얼마나 달라졌는지에 대한 연구였다. 교수들도 쉽게 풀지 못하는 수학 문제를 주었을 때 하버드대 출신은 끝까지 매달렸고 뉴욕주립대 출신은 쉽게 포기했다. 제3세계 빈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라는 과제에서도 하버드대 출신은 보다 다양하고 창의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일까? 대학에 다니는 동안 형성된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뉴욕주립대는 “어렵고 거창한 문제는 다른 데에 맡기고 너희는 실리적인 일에만 충실하면 된다”고 교육한다. 하버드대는 “너희가 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지구상의 누구도 이 문제를 풀 수 없다”고 가르친다. 자기 정체성을 어떻게 설정하는지에 따라 그릇의 크기가 달라진다. 집단 정체성도 태생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형성되고 지속적으로 변한다.

한국 국민이라는 집단 정체성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만들어진다. 평소에는 잊고 지내다가 월드컵이나 올림픽과 같은 국가 대항전을 보면 소속감을 되찾는다. 공식 행사장에서 애국가를 부르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일상생활 속에서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개인적 정체성과 달리 집단 정체성은 몇 가지의 상징장치를 통해 만들어지는 경향이다. 이 과정에서 언론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언론은 집단의 기억을 관리한다. 매년 3·1절이나 광복절이 되면 언론은 일본과 관련한 많은 뉴스를 내보낸다. 기념행사를 중계하고,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을 다시 방문한다. 6월 25일이 다가오면 이념 논쟁이 재연되고 북한에 대한 부정적 기사가 많아지는 것도 같은 이유다.

언론은 또한 누가 대한민국의 적이고 누가 동지인지를 규정한다. 1992년 공식 수교를 하기 이전까지 중국은 적이었다. 국가보안법 등을 통해 적국으로 명확하게 명시한 북한에 대해서는 더 엄격했다. 북한의 모든 대외정책은 대한민국을 위험에 빠뜨리기 위한 것으로 경계의 대상이었다.

미국은 이와 달리 친구였다. 미국의 우방인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칠레는 자연스럽게 우방국이 되었고 중국 및 소련과 친한 이란, 시리아, 쿠바는 적성국이 되었다. 집단 내 정상과 비정상의 범위를 정하는 것도 언론이었다. 노동운동, 평등주의는 경제성장을 훼손하지 않는 정도에서만 정상의 범주에 포함됐다.

그런데 요즘 한국은 집단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 갑작스레 친구는 사라지고 원수가 늘고 있다. 2002년 월드컵을 공동으로 치르고 동반자 관계를 다짐한 일본은 교과서를 왜곡하고, 독도를 탐내고, 군사적 야욕을 드러내는 위협이 되고 있다. 1992년 공식 수교 이후 지속적으로 우호관계를 다진 중국 역시 동북공정을 통해 역사를 왜곡하고 북한을 일방적으로 편들고 이어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교만하고 강한 적으로 바뀌고 있다.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등으로 공존 가능성이 모색되던 북한은 국민의 생명을 앗아가는 사악한 집단으로 변하고 있다.

주변국의 부정적 측면만 부각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형성되었던 아시아 공동체 논의와 아시아 정체성은 퇴색하고 있다. 대신 한국은 중국과 북한을 견제하는 아시아판 나토를 준비하고 있다. 누가 이렇게 만들고 있나. 주변국이 잘한 일도 없다. 그러나 우리 정치 지도자들과 언론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정치 지도자들과 언론은 부정적인 측면을 너무 부각하는 경향이다. 집단 정체성의 위기와 혼란 중 상당 부분은 이들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조장되어온 측면이 있다.

언론은 보다 성숙하고 진지하며 길고 넓은 안목으로 무장해야 한다. 정치권은 국민 정서로부터 좀 자유로워져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친구 간 우정을 유지하기 위해 나쁜 점보다는 좋은 점에 주목한다. 나쁜 점을 좋은 쪽으로 고칠 수 있도록 조언한다. 마찬가지로 한국 국민이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에 필요한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정체성을 갖도록 언론이 노력해줄 것을 부탁하면 무리한 것일까?

신동아 2012년 8월 호

김성해│대구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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