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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김승호의 약초 이야기 ⑭

열과 조(燥) 다스려 오장의 맥(脈) 살린다

억척의 생명력 맥문동(麥門冬)

열과 조(燥) 다스려 오장의 맥(脈)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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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과 조(燥) 다스려 오장의 맥(脈) 살린다

연보라색 꽃을 피우는 맥문동.

부추나 꽃무릇(석산)의 잎처럼 생긴 길쭉한 잎사귀가 사철 무성하다. 언뜻 보면 춘란(春蘭)으로 착각한다. 겨울에도 좀처럼 시들지 않고 푸르고, 웬만한 환경에서도 잘 자란다. 바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맥문동(麥門冬)에 관한 얘기다. 추위를 잘 이기는 보리를 닮았다 해서 이름 붙여졌는데 알뿌리의 모양이 보리알과 비슷해 그렇다는 설도 있다. 그냥 맥동(麥冬)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의약서 ‘향약구급방’에는 동사이(冬沙伊)라고 기록돼 있다. 동사이는 겨울에도 푸르른 겨우살이를 한자로 음차한 말이다. 동의보감에는 우리말로 ‘겨으사리불휘’라고 적고 있고, 중국에선 부추(?)를 닮았다는 뜻으로 오구, 마구, 우구라 했다. 좀 난데없지만 불사의 영약이란 의미로 불사초(不死草)라고도 하고, 돌계단 주변에 많이 심어서 계전초(階前草)라는 이명(異名)도 있다.

야생의 맥문동은 우리나라 전국의 산야에 많다. 요새는 지자체에서 도심의 도로 주변이나 공원의 공터, 관광지에 정말 많이 심어 놨다. 조경용으로 적당한 지피식물(地被植物·잔디처럼 낮게 자라 지표를 덮는 식물)이기 때문이다. 산의 등산로 주변에도 굳이 잡목들을 베어버리고는 이 맥문동을 지피용으로 심은 곳도 많다. 그래서 아무리 조경이라지만 정도가 심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맥문동은 그늘에서도 무리지어 잘 자라며 가뭄과 추위를 잘 견딘다. 예부터 뜰의 가장자리나 마당의 길섶에 많이 심었다.

불사초로 불린 까닭

잎사귀도 그렇지만 연보라색의 물결을 이루는 꽃들이 더 볼만하다. 무성한 잎들 사이 길게 꽃자루가 올라와 6~8월경에 총상꽃차례로 꽃이 핀다. 시골에 가보면 장독대가 있는 뜨락과 정원 한쪽의 이끼 낀 돌들 사이에 맥문동을 무더기로 심은 집이 더러 있다. 그늘진 마루에 앉아서 꽃들을 보고 있으면 자줏빛 주단을 깔아놓은 듯하다. 한여름 무더위로 상한 기운이 적이 안정된다. 전남 구례의 유서 깊은 한옥 곡전재(穀田齋) 같은 곳에서 그런 소슬한 풍경을 누릴 수 있다.

맥문동 열매는 푸른 구슬같이 꽃자루에 둥글둥글 맺혔다가 가을이 되면 검은색으로 익는다. 겨울까지 붙어 있는 흑구슬 같은 열매를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약재로 쓰는 것은 뿌리와 줄기 부분이다. 약재로 쓰기 위해선 2년 이상 자란 맥문동을 꽃이 피기 전인 봄철에 캐야 한다. 알뿌리의 씨알이 굵기 때문이다. 수북한 수염뿌리 끝에 송골송골 매달린 흰색의 알뿌리를 채취해 맑은 물에 담그고 불린 다음 가운데에 박힌 심을 빼고(去心) 말려서 쓴다. 거심하지 않고 써야 더 좋다는 말도 있다. 꽃은 자주색이 흔하지만, 흰색으로 피는 소엽 맥문동도 있다. 잎사귀에 흰 줄무늬가 있는 것 등 관상용 변종이 좀 있다.

맥문동에는 진나라 시황과 얽힌 이야기가 전해온다. 진시황에게 새 한 마리가 날아들어왔는데 부추 잎과 비슷하게 생긴 풀잎을 부리에 물고 있었다. 기이하게 여긴 시황이 방술에 능한 귀곡자(鬼谷子)에게 물었다. “기이하다. 그 새가 물고 있는 풀잎이 무엇인가?” 귀곡자가 대답했다. “불사초의 잎입니다. 죽은 사람을 그 풀잎으로 덮어두면 사흘 안에 살아납니다. 동해에 있는 삼신산(三神山) 중 영주에서 납니다.” 진시황은 귀곡자의 말을 듣고 기뻐해 방사 서복(徐福)의 무리를 바다로 보내 찾게 했다. 그러나 그들은 불사초를 구해 돌아오지 못했다. 시황은 마지막까지 불사약을 찾아 모산과 낭야, 동해 등지를 순행했지만 미처 수도인 함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하북의 사구에서 객사했다.

방사들의 말을 너무 믿은 진시황을 상대로 귀곡자가 희대의 사기극을 벌였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귀곡자도 정말 불사초가 있다고 믿고 있었던 걸까. 후세의 사람들은 항간의 약초들 중에서 이 불사초를 추정하다 이파리가 부추 잎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맥문동을 불사초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더 허망하다. 산과 들, 집 주변, 도처에 흔해빠진 게 맥문동인데. 귀곡자가 진시황과 방사들을 제대로 골탕 먹였다는 얘기가 된다.

동해 삼신산까지 서복의 무리를 애써 보낼 필요도 없었다. 어쨌든 본초강목을 비롯한 옛 의서에는 맥문동을 불사초라고 굳이 적고 있다. 생각하건대 맥문동에 불사의 효능이 있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만물이 얼어붙는 겨울에도 잎이 죽지 않고 푸른 까닭에 그 생명력을 기려서 불사초라고 하지 않았을까.

자음청열(滋陰淸熱)의 약재

사실 맥문동은 그 억척스러운 생명력으로 따지면 불사초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예를 들어 맥문동의 알뿌리를 수확하고는 포기를 쭉쭉 갈라서 흙바닥에 그 뿌리를 아무렇게나 던져놔도 좀처럼 죽지 않고 잘 살아난다. 들판의 어느 잡초보다도 더 강인하다. 그늘진 곳에서 잘 자라지만 양지에서도 잘 산다. 매연이 많은 척박한 도로 주변에서도 끄떡없이 사계절 푸릇푸릇하다. 억척스러울 만큼 힘이 좋은 풀이다. 그러고 보니 믿을 것은 아니지만, 혹시 그 약효에도 그런 힘이 있는 것은 아닐까. ‘동의보감’에 나타난 맥문동의 효능은 이렇다.

‘성질은 약간 차다. 맛이 달고 윤택하다. 독이 없다. 심장을 보하고 폐를 맑게 한다. 정신을 진정시키며 맥기(脈氣)를 안정시킨다. 허로(虛勞·기혈이 손상되어 나타나는 빈혈이나 신경쇠약 등 만성적인 소모성 질환)로 인해 열이 나고 입이 마르고 갈증이 나는 것을 다스린다. 폐위(肺·#54291;·폐의 열로 인해 체액이 소모되어 생기는 병)로 피부와 털이 거칠어지고, 가쁘게 기침하고 숨찬 증상, 열독(熱毒)으로 인해 몸이 검어지고 눈이 누렇게 변한 것을 치료한다.’

허로나 폐위, 열독은 열(熱)과 조(燥)의 증상이다. 열은 알겠는데 조(燥)는 무엇인가. 쉽게 말하면 진액, 오장(五臟)의 체액이 모두 고갈돼 부족해진 상태를 가리킨다. 조가 먼저고 열이 뒤따른다. 자동차로 말하면 엔진은 돌아가는데 엔진오일이 부족한 상황이다. 오일이 떨어져 냉각과 세정, 윤활작용을 못하면 발열이 심해진다. 결국 엔진이 눌어붙는다. 인체도 거의 비슷하다. 사람의 몸도 오일과 같은 진액이 부족해지면 열이 난다. 그래서 입 안이 마르고 갈증이 나고, 피모(皮毛)가 거칠어지고 살과 근육이 위축되며 몸이 기름지지 못하고 마른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어서 엔진이 눌어붙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지만, 어쨌든 전조 증상이 나타난다. 심화(心火)로 인한 불면증, 위열로 인한 위장장애(식욕감퇴, 팽만감 등), 맥기(脈氣)가 안정되지 못해 심장이 제멋대로 뛰는 부정맥 같은 증상 등이다. 열과 조로 인해 몸의 기운이 쉽게 소모되는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살이 잘 찌지 않는 이들은 일견 단단해 보이긴 한다. 그러나 당장에 큰 병이 없더라도 그의 몸은, 사실은 일상의 스트레스를 잘 처리 못해 심장이 늘 불안하다. 오일이 바닥난 자동차 엔진이 툴툴거리기 시작하듯, 진액이 부족하면 조만간 이런 증상들이 찾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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