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호

조국과 두 여인이 만든 ‘피아노 시인’ 쇼팽

  • 황승경│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12-09-21 10:5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조국과 두 여인이 만든 ‘피아노 시인’ 쇼팽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피아니스트’. 이 영화는 유대계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1911~2000)이 나치의 눈을 피해 바르샤바에서 숨어 지내며 겪은 숨 막히는 생존고비의 순간순간을 프레데리크 쇼팽(1810~1849)의 음악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주인공 스필만이 폴란드 국영방송국에서 방송에 나갈 곡을 직접 녹음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이때 연주되는 폴란드 작곡가 쇼팽의 ‘야상곡 다#단조(Nocturne NO. 20 in C sharp minor)’의 달콤하고 우아한 선율은 쇼팽을 왜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하는지 알려준다.

    밤의 신 ‘녹스(Nox)’를 어원으로 하는 야상곡(夜想曲·Nocturne)은 아일랜드 작곡가 존 필드가 자유로운 낭만적 언어의 성악곡이 지닌 시적 표현을 피아노 선율로 옮겨오며 시작되었다. 무지개처럼 서정적인 선율을 긴 호흡으로 나열하는 필드의 야상곡은 쇼팽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쇼팽은 21곡(생전 19곡, 사후 2곡 발표)의 야상곡을 작곡했다. 우아하고 밀도 높은 감수성으로 왼손은 저음의 화성 여운을, 오른손은 부드러운 멜로디를 엇갈린 박자로 연주한다. 쇼팽은 이렇게 듣는 이들을 밤의 적막 속에서 고요히 벌어지는 신비로운 환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원래 ‘야상곡 다#단조’는 오스트리아 빈에 거주하던 20세의 쇼팽이 폴란드에 있는 누나 루드비카에게 보낸 곡인데, 쇼팽이 사망한 지 46년 만인 1895년에 출판되었다. 하지만 쇼팽은 이 곡에 야상곡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았다. 단지 ‘느리고 풍부한 표현력(Lento con Gran Espre-ssione)’이라고만 표기했는데, 출판사에서 야상곡으로 분류해 출판했다고 한다. 출판사 분류는 맞았다. 이 곡은 쇼팽의 그 어떤 곡보다 몽환적인 마력이 들어있는 ‘야상스러운’ 곡이다.

    쇼팽의 선율은 다분히 서정적이고 여성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만 20세에 떠난 조국 폴란드에 대한 그리움, 애국심, 아련함, 자부심, 열망이 녹아들어 그의 음악 에는 강인한 열정이 가득 차 있다. 그의 아버지 마코와이 쇼팽(1771~1844)은 프랑스 북동부 보주 지방의 작은 마을 농가에서 태어나 16세에 담배공장 경리일자리를 얻어 혈혈단신 폴란드 바르샤바로 이주했다.

    존 필드와 야상곡



    그는 일찍이 프랑스식 이름 니콜라(Nicolas)를 폴란드식 미코와이(Mikolaj)로 바꿀 만큼 철저한 폴란드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당시 나폴레옹은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 당대 열강의 지배를 차례로 받던 폴란드를 해방시키고 바르샤바공국으로 만들어 이탈리아처럼 프랑스 위성국가로 삼았다. 덕분에 도처에서 새로운 지배세력을 위한 프랑스어를 지도할 인물이 필요했고, 쇼팽의 아버지 미코와이는 폴란드 명문 귀족 자제들이 다니는 귀족학교에서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가르치게 된다. 쇼팽의 어머니 유스티나 코셰자노프스카(1782~1861)는 비록 몰락했으나 귀족집안 출신으로 성악과 피아노를 좋아하는 음악적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자녀들에게도 당시 뼈대 있는 집안 자제들의 필수 코스인 피아노를 가르쳤다. 모차르트처럼 역사적인 천재는 아니었지만, 쇼팽은 비범하고 놀라운 재능을 가진 영재로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쇼팽보다 한 살 아래인 헝가리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1811~1886) 가족은 열 살 아들의 음악교육을 위해 온 가족이 헝가리를 떠나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주했다. 리스트는 9세에 이미 첫 연주를 하면서 베토벤, 체르니와 교류했다.

    리스트가 유럽 연주여행을 다니며 최고의 음악과 기술을 흡수하는 음악훈련을 하는 동안 쇼팽은 폴란드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아달베르트 지브니(1756~1842)에게 ‘엉뚱한’ 피아노를 사사하며 전원여행과 연극놀이를 하는 등 감성적인 예술교육을 습득했다. 그러던 중 18세가 되던 해에 쇼팽은 폴란드에 연주여행을 온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라 파가니니의 고난도 연주회를 10회 모두 관람하면서 큰 자극을 받았다. 너무 낯설어 어색하고 부담스러운 연주기법이라도 예술적인 경지에 도달한다면 새로운 표현의 시대를 열 수 있다는 심오한 진리를 터득했다. 당시 파가니니의 파장은 대단해 쇼팽뿐 아니라 로버트 슈만(1810~1856), 프란츠 리스트 등 동년배 작곡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슈만은 ‘피아노의 파가니니’처럼 신들린 연주자가 되기 위해 맹연습을 하다가 손가락이 마비되면서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작곡과 평론에 전념했고, 결국 대작곡가가 되었다.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화려하고 고난도의 옥타브, 트릴, 화음 등의 기술을 그대로 피아노 건반으로 옮겨 작곡하고 연주했다.

    그러나 쇼팽은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테크닉을 피아노 테크닉으로 악보화하지는 않았다. 독자적으로 자신만의 피아노 스타일을 고수해도 변혁을 주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쇼팽을 두고 피아노의 고난도 기교와 고매한 시적 표현을 동시에 융합시킨 최초의 작곡가라고 평가한다.

    쇼팽, 테크닉과 시적 표현 융합시킨 최초 작곡가

    쇼팽은 바르샤바에서는 독보적인 연주자였고 작곡자로서도 인정받는 탁월한 음악영재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큰 세상으로 나갈 것을 권유했다. 1830년 11월 2일 스산한 바람을 맞으며 쇼팽은 많은 이의 배웅 속에 고향을 떠나 빈으로 향했다. 고국에서의 마지막 모습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은 금의환향하는 쇼팽을 기대했지만 그는 다시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 19년이 지난 뒤 그의 심장만이 쓸쓸히 돌아왔다. 그의 유언으로 돌아온 심장은 바르샤바의 성십자가 성당에 안치되었다. 폴로네즈(polonaise·기품 있는 귀족적 폴란드 춤곡), 마주르카(Mazurka·소박하지만 화려한 폴란드 농민 춤곡) 등의 작품에서 보듯 쇼팽에게는 언제나 20세에 떠난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녹아있었다. 시대적 상황도 한몫했다.

    공교롭게도 쇼팽이 빈에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폴란드에서는 민족혁명이 일어났다. 폴란드를 지배하던 러시아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던 오스트리아는 당연히 폴란드에 적대감을 갖게 되었고, 폴란드인 쇼팽은 위험인물로 낙인 찍혔다. 당장 조국의 품으로 돌아가 혁명세력에 힘을 보태고 싶었지만 주변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폴란드의 위상을 세우라고 만류했다. 연주와 출판은커녕 생계도 어려워졌다. 조국에 대한 근심과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결국 파리로 이주할 것을 결심한다. 애초에 그는 자신의 자유롭고 진취적인 성향의 음악이 빈과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파리음악계의 화려하고 떠들썩한 분위기와는 맞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쇼팽은 8개월의 짧은 빈 생활을 마치고 서둘러 파리로 향했다.

    파리로 가는 도중 러시아가 폴란드의 민족혁명을 유혈 진압하며 바르샤바를 잔인하게 짓밟았고, 때마침 콜레라까지 퍼져 폴란드인들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바그너처럼 언변과 필력으로 활동하는 지식인은 아니었지만, 투철한 민족적 애국심을 가진 쇼팽은 조국 폴란드를 박해하는 부조리한 처사와 인권탄압에 격분했다.

    이때 쇼팽은 에튀드 10번(Etude C minor Op.10 No.12) ‘혁명’을 작곡한다. 물론 ‘혁명’은 쇼팽이 부제로 넣은 것은 아니고 후세에 붙인 것이다. 그의 10개의 연습곡(에튀드)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 곡은 왼손으로는 격정적이고 우수에 젖은 선율을 반복하고 오른손은 당당하고 저항적인 선율을 연주해 당시 쇼팽의 감정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폴란드인들은 연주 시간이 3분이 채 안 되는 이 곡을 조국해방의 강한 의지가 담긴 곡으로 믿고 있다. 이 곡이 작곡된 지 88년이 되는 1919년 폴란드는 독립했지만, 20년 만에 다시 독일의 침공을 받게 되었고, 이후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했다. 1990년 레흐 바웬사가 최초의 민선 대통령이 되면서 폴란드는 진정한 독립을 이루게 된다. 이 긴 시간 동안 쇼팽의 ‘에튀드 10번 혁명’은 세대를 넘어 핍박받는 폴란드인에게 강렬한 독립의식을 불어넣었다.

    쇼팽의 아버지 미코와이는 자신이 프랑스인이었다는 것을 자녀들에게 알리지 않았고, 쇼팽도 자신의 부계(父系)가 프랑스인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했다. 1931년 9월 파리에 도착한 쇼팽에게는 빈에서와는 전혀 다른 멋진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사회적 배경이 있었다.

    먼저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의 몰락, 루이18세, 샤를 10세 왕정을 거쳐 7월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평등한 자의 아들’이라 불렸던 루이 필립이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프랑스에서는 구체제에 대한 도전의식이 고양되었고, 문학과 미술, 음악 등에서 다양하고 새로운 표현양식이 자유롭게 등장했다. 동시에 그 조류를 찾아 유럽의 수많은 예술가가 파리로 모여들었다. 위고, 하이네, 드 뮈세, 발자크, 뒤마, 상드, 라마르틴, 앵그르 등의 예술인을 위시해 케루비니, 로시니, 마이어베어, 리스트, 오베르 같은 쟁쟁한 음악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양식을 가지고 있던 쇼팽이 활동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두 번째로 쇼팽은 주로 ‘피아노’에만 한정된 작품을 작곡했기 때문이다. 피아노는 18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졌지만, 오늘날 휴대전화가 매년 업그레이드되는 것처럼, 1820년부터 피아노 제작기법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피아노는 더욱 풍성한 음량과 맑은 음질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사람들은 새로운 피아노 음향에 열광했다. 피아노를 배우지 않은 사람은 교양 없는 사람으로 인식되는 풍조가 형성될 정도였다. 1845년경에는 인구 100만 명의 파리에서 6만 대의 피아노가 있었다고 하니, 가히 모든 음악을 피아노로 감상하는 시기였다. 예를 들어 오케스트라 교향곡도 피아노로 편곡된 선율로 감상했고, 오케스트라 반주가 필요한 오페라도 아리아만을 뽑아 피아노 반주로 살롱음악회를 열 만큼 파리 음악계는 피아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위고, 괴테 같은 대문호의 신작이 아니면 베스트셀러는 거의 악보였다. 음악출판사는 신작 출판에 사활을 걸었고 유럽의 작곡가들은 출판계약금과 레슨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유럽의 그 어느 도시보다 파리에서는 피아노 악보출판과 피아노레슨을 하려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새로운 음악사조와 피아노

    조국과 두 여인이 만든 ‘피아노 시인’ 쇼팽

    폴란드 바르샤바에 위치한 성십자성당. 이곳에는 쇼팽의 심장이 안치되어 있다.

    쇼팽의 조국 폴란드에 대한 호의적인 인식도 작용했다. 오스트리아와는 다르게 프랑스는 폴란드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했다. 오히려 러시아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폴란드 귀족들의 망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나라도 프랑스였다. 폴란드 귀족들은 자신들의 명예를 그대로 지키면서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기에 조국의 유능한 인재 쇼팽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성심성의껏 후원했다.

    파리에 온 지 5개월 만인 1832년 2월, 쇼팽은 플레엘 살롱에서 전곡 암보(暗譜) 연주로 성공리에 데뷔했다. 암보로 홀로 독주회를 한 최초의 피아니스트가 되면서 쇼팽은 당당하게 파리의 음악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쇼팽 이전에는 연주자들이 항상 악보를 보고 연주를 했고, 독주회 중간에 다른 연주자가 찬조출연해서 연주 컨디션을 조절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3개월 후에 열린 두 번째 연주회에서는 무대 공포증으로 인한 컨디션 난조로 실력을 의심받게 된다. 이 ‘트라우마’ 때문에 소심했던 쇼팽은 죽을 때까지 18년 동안 공식 연주회는 30여 회만 했고, 지인들끼리의 부담 없는 살롱음악회에 집중했다. 어쨌든, 명망 있는 가문 인사들의 레슨 요청이 이어지면서 쇼팽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었다.

    당시 파리 노동자의 하루 평균임금이 2프랑 정도였는데, 쇼팽은 레슨 1회에 20프랑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하루에 5, 6명의 학생을 받아도 예약이 밀려있을 정도의 ‘스타 강사’였으니 불과 1년 전 빈에서의 궁핍했던 생활은 달나라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파리 사교계 여인들도 연체동물처럼 유연하고 미끈한 손가락에서 나오는 감미로운 선율을 선사하는 이 피아니스트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나의 슬픔’ 마리아

    쇼팽은 평상시에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이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은 날에는 난폭하게 변했다.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는 학생에게는 의자를 내던지며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다. 그래도 쇼팽은 최대 수입원이었던 레슨을 계속했고, 그에게 몇 년씩 배운 제자도 15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문적인 연주자, 혹은 음악교육자의 길로 들어선 제자는 단 2명뿐이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노래하듯이 건반을 연주하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폴란드에서 19세에 만났던 성악 전공 학생 콘스탄차와의 첫사랑 이후 쇼팽은 이렇다 할 여인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25세에 여행지 독일 드레스덴에서 아버지의 옛 제자 펠릭스 보진스키와 해후하면서 사랑을 만난다. 보진스키의 여동생 마리아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바르샤바에서 만났을 때는 열한 살 꼬마숙녀였다. 이후 파리로 돌아가서도 마리아에 대한 연정을 떨칠 수 없어 편지로 사랑을 전했다. 사랑을 꽃피운 지 1년 되어가던 즈음, 쇼팽은 정식으로 마리아에게 청혼을 했으나 가족들은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확답을 주지 않았다. 청혼한 지 1년이 지난 뒤 마리아의 부모는 혼인을 허락할 수 없다는 뜻을 전했다. 쇼팽은 당시 170cm의 키에 50kg이 채 되지 않았고, 얼굴도 매우 창백했다. 여러 차례 각혈을 해 ‘쇼팽이 죽었다’는 소문도 퍼진 터였다. 쇼팽은 마리아의 편지를 모아 폴란드어로 ‘나의 슬픔’이라고 적어놓고 죽을 때까지 간직했다.

    음악에 파묻혀서 살아가던 1838년 5월의 어느 날, 쇼팽은 조르주 상드(1804~1876)를 만난다. 오로르 루실 뒤팽이라는 본명을 버리고 ‘조르주’라는 남성 이름으로 활동한 그는 이미 두 아이를 둔 이혼한 남작부인이었다. 상드는 당시 파리 사교계에서 줄담배를 피우고 남장을 하는 기행으로 많은 남성의 호기심을 자극한 인기 소설가였다. 150cm 정도의 키에 풍만한 체형이었지만 매혹적인 언어구사력과 관능적인 미소로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2년 전 처음 만났지만, 쇼팽은 단아하고 청순한 마리아에 빠져 상드에게는 눈길조차 주질 않았었다. 이루지 못한 사랑에 심신이 지쳐버린 그는 ‘어머니 같고 누이 같은 여인’ 상드의 마력에 푹 빠져들었고, 쇼팽은 상드와 그의 아들 모리스, 딸 솔랑주와 함께 스페인 휴양지 마요르카 섬으로 요양여행을 떠났다.

    “솔랑주를 잘 돌보시구려”

    쇼팽은 상드의 내조를 받으며 창작활동을 펼칠 수 있게 되었지만 건강은 여전히 좋아지지 않았고 폐결핵 진단까지 받게 된다. 지금이야 백신 개발로 폐결핵이 치명적인 전염병이 아니지만 당시 폐결핵은 ‘백색 페스트’로 불리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를 간호하는 상드의 부담도 컸다. 파리로 돌아온 상드는 자유분방했던 삶을 청산하고 헌신적으로 쇼팽을 내조했고, 쇼팽은 자애롭고 다정한 아버지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드가 딸 솔랑주와 불화를 겪자 쇼팽은 딸의 편을 들어 아내 상드에게 조언을 했다. 이 일이 있은 뒤 상드는 매정하게 돌아섰고, 장장 9년의 독특하고 아름다웠던 사랑은 허무하게도 종지부를 찍었다. 1847년 9월 쇼팽에게 보낸 상드의 편지는 이렇게 쓰여 있다.

    “솔랑주를 잘 돌보시구려. 당신이 몸 바쳐 돌보려는 사람이 그 아이라니까요. (중략) 빨리 병을 치료하길! 9년간 우정의 시간이 이렇게 이상하게 끝난 것을 신에게 감사해야겠군요. 가끔 소식이나 전해줘요.”

    혼자 남겨진 쇼팽은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48년 2월 연주회를 결심한다. 연주회는 다른 악기 연주자와 성악가와 함께 기획되었지만, 자주 감상할 수 없는 쇼팽의 연주에 관객이 몰려 순식간에 매진이 되었고, 이에 고무된 쇼팽은 그날 바로 다음 연주회를 계약했다. 쇼팽과 파리의 운이 다했을까. 연주회 6일 뒤 2월 혁명이 발발했다. 부패하고 무능한 내각과 루이 필립 국왕은 물러나고 나폴레옹의 조카 나폴레옹 3세를 수반으로 하는 제 2공화정이 성립된 것이다. 쇼팽을 후원하던 주변 인물들은 하루아침에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쇼팽의 레슨 학생 수도 급격히 줄었다. 한가로이 피아노를 배우며 예술을 논하기에는 너무나 불안하고 모든 것이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제자였던 제인 스털링의 조언을 받아들여 쇼팽은 영국으로 거처를 옮긴다.

    당시 영국에는 프랑스에서 피신한 유능한 예술가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아무리 쇼팽이 빅토리아 여왕 앞에서 연주한 인정받은 연주자라 할지라도 영국은 피아노 음악보다는 성악에 더 열광했다. 수입 역시 파리에서만 같지 않았다.

    다시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의 건강 상태는 최악이었다. 이제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도 알게 되었다. 폴란드의 어머니와 누이를 불렀고, 헌신적인 스털링도 쇼팽의 마지막을 함께하기 위해 도버해협을 건넜다. 결국 쇼팽은 자신의 심장을 폴란드로 보내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지금 파리 몽소 공원에는 피아노 치는 쇼팽과 상드의 동상이 서 있지만 실제 상드는 병문안도 오지 않았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반면 스털링은 쇼팽의 죽음을 애도했고 5000 파운드에 달하는 장례비용을 부담했다.

    쇼팽은 파리를 대표하는 모든 예술가가 잠든 ‘페르 라세르 묘지’에 묻혔고, 19년 전 바르샤바를 떠나올 때부터 간직한 조국 폴란드의 흙이 뿌려졌다. 그의 유언대로 쇼팽의 여동생은 쇼팽의 심장을 폴란드로 옮겼다. 혹자는 쇼팽을 자신의 한계에 갇혀 피아노에만 집착했고 인기 위주의 짧은 소품만 작곡했다고 비판하지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대표적인 클래식 작곡가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쇼팽의 묘지를 사랑의 우편함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던 솔랑주(상드의 딸)의 남편이 조각한 쇼팽의 대리석 묘비는 특별히 환하게 빛나고 있다. 팬들이 헌정한 수많은 꽃다발에 파묻힌 비석 위에 새겨진 그의 얼굴은 그의 음악처럼 고혹적이고 아름답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