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황승경의 ‘눈으로 듣는 음악’ ⑭

조국과 두 여인이 만든 ‘피아노 시인’ 쇼팽

  • 황승경│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조국과 두 여인이 만든 ‘피아노 시인’ 쇼팽

1/3
조국과 두 여인이 만든 ‘피아노 시인’ 쇼팽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피아니스트’. 이 영화는 유대계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1911~2000)이 나치의 눈을 피해 바르샤바에서 숨어 지내며 겪은 숨 막히는 생존고비의 순간순간을 프레데리크 쇼팽(1810~1849)의 음악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주인공 스필만이 폴란드 국영방송국에서 방송에 나갈 곡을 직접 녹음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이때 연주되는 폴란드 작곡가 쇼팽의 ‘야상곡 다#단조(Nocturne NO. 20 in C sharp minor)’의 달콤하고 우아한 선율은 쇼팽을 왜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하는지 알려준다.

밤의 신 ‘녹스(Nox)’를 어원으로 하는 야상곡(夜想曲·Nocturne)은 아일랜드 작곡가 존 필드가 자유로운 낭만적 언어의 성악곡이 지닌 시적 표현을 피아노 선율로 옮겨오며 시작되었다. 무지개처럼 서정적인 선율을 긴 호흡으로 나열하는 필드의 야상곡은 쇼팽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쇼팽은 21곡(생전 19곡, 사후 2곡 발표)의 야상곡을 작곡했다. 우아하고 밀도 높은 감수성으로 왼손은 저음의 화성 여운을, 오른손은 부드러운 멜로디를 엇갈린 박자로 연주한다. 쇼팽은 이렇게 듣는 이들을 밤의 적막 속에서 고요히 벌어지는 신비로운 환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원래 ‘야상곡 다#단조’는 오스트리아 빈에 거주하던 20세의 쇼팽이 폴란드에 있는 누나 루드비카에게 보낸 곡인데, 쇼팽이 사망한 지 46년 만인 1895년에 출판되었다. 하지만 쇼팽은 이 곡에 야상곡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았다. 단지 ‘느리고 풍부한 표현력(Lento con Gran Espre-ssione)’이라고만 표기했는데, 출판사에서 야상곡으로 분류해 출판했다고 한다. 출판사 분류는 맞았다. 이 곡은 쇼팽의 그 어떤 곡보다 몽환적인 마력이 들어있는 ‘야상스러운’ 곡이다.

쇼팽의 선율은 다분히 서정적이고 여성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만 20세에 떠난 조국 폴란드에 대한 그리움, 애국심, 아련함, 자부심, 열망이 녹아들어 그의 음악 에는 강인한 열정이 가득 차 있다. 그의 아버지 마코와이 쇼팽(1771~1844)은 프랑스 북동부 보주 지방의 작은 마을 농가에서 태어나 16세에 담배공장 경리일자리를 얻어 혈혈단신 폴란드 바르샤바로 이주했다.

존 필드와 야상곡

그는 일찍이 프랑스식 이름 니콜라(Nicolas)를 폴란드식 미코와이(Mikolaj)로 바꿀 만큼 철저한 폴란드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당시 나폴레옹은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 당대 열강의 지배를 차례로 받던 폴란드를 해방시키고 바르샤바공국으로 만들어 이탈리아처럼 프랑스 위성국가로 삼았다. 덕분에 도처에서 새로운 지배세력을 위한 프랑스어를 지도할 인물이 필요했고, 쇼팽의 아버지 미코와이는 폴란드 명문 귀족 자제들이 다니는 귀족학교에서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가르치게 된다. 쇼팽의 어머니 유스티나 코셰자노프스카(1782~1861)는 비록 몰락했으나 귀족집안 출신으로 성악과 피아노를 좋아하는 음악적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자녀들에게도 당시 뼈대 있는 집안 자제들의 필수 코스인 피아노를 가르쳤다. 모차르트처럼 역사적인 천재는 아니었지만, 쇼팽은 비범하고 놀라운 재능을 가진 영재로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쇼팽보다 한 살 아래인 헝가리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1811~1886) 가족은 열 살 아들의 음악교육을 위해 온 가족이 헝가리를 떠나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주했다. 리스트는 9세에 이미 첫 연주를 하면서 베토벤, 체르니와 교류했다.

리스트가 유럽 연주여행을 다니며 최고의 음악과 기술을 흡수하는 음악훈련을 하는 동안 쇼팽은 폴란드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아달베르트 지브니(1756~1842)에게 ‘엉뚱한’ 피아노를 사사하며 전원여행과 연극놀이를 하는 등 감성적인 예술교육을 습득했다. 그러던 중 18세가 되던 해에 쇼팽은 폴란드에 연주여행을 온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라 파가니니의 고난도 연주회를 10회 모두 관람하면서 큰 자극을 받았다. 너무 낯설어 어색하고 부담스러운 연주기법이라도 예술적인 경지에 도달한다면 새로운 표현의 시대를 열 수 있다는 심오한 진리를 터득했다. 당시 파가니니의 파장은 대단해 쇼팽뿐 아니라 로버트 슈만(1810~1856), 프란츠 리스트 등 동년배 작곡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슈만은 ‘피아노의 파가니니’처럼 신들린 연주자가 되기 위해 맹연습을 하다가 손가락이 마비되면서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작곡과 평론에 전념했고, 결국 대작곡가가 되었다.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화려하고 고난도의 옥타브, 트릴, 화음 등의 기술을 그대로 피아노 건반으로 옮겨 작곡하고 연주했다.

그러나 쇼팽은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테크닉을 피아노 테크닉으로 악보화하지는 않았다. 독자적으로 자신만의 피아노 스타일을 고수해도 변혁을 주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쇼팽을 두고 피아노의 고난도 기교와 고매한 시적 표현을 동시에 융합시킨 최초의 작곡가라고 평가한다.

쇼팽, 테크닉과 시적 표현 융합시킨 최초 작곡가

쇼팽은 바르샤바에서는 독보적인 연주자였고 작곡자로서도 인정받는 탁월한 음악영재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큰 세상으로 나갈 것을 권유했다. 1830년 11월 2일 스산한 바람을 맞으며 쇼팽은 많은 이의 배웅 속에 고향을 떠나 빈으로 향했다. 고국에서의 마지막 모습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은 금의환향하는 쇼팽을 기대했지만 그는 다시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 19년이 지난 뒤 그의 심장만이 쓸쓸히 돌아왔다. 그의 유언으로 돌아온 심장은 바르샤바의 성십자가 성당에 안치되었다. 폴로네즈(polonaise·기품 있는 귀족적 폴란드 춤곡), 마주르카(Mazurka·소박하지만 화려한 폴란드 농민 춤곡) 등의 작품에서 보듯 쇼팽에게는 언제나 20세에 떠난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녹아있었다. 시대적 상황도 한몫했다.
1/3
황승경│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목록 닫기

조국과 두 여인이 만든 ‘피아노 시인’ 쇼팽

댓글 창 닫기

2018/10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