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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골목담의 탄생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21세기 골목담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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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골목담의 탄생

‘리틀 시카고’
정한아 지음, 문학동네, 233쪽, 1만2000원

여담부터 하자면, 나는 골목, 세상의 골목들을 좋아한다. 즐겨 부르는 노래 레퍼토리에는 언제나 김현식의 ‘골목길’이 있다. 골목길 접어들 때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유럽의 유서 깊은 도시는 골목으로 시작해 광장으로 끝난다. 그리고 광장은 다시 수많은 골목을 만들어 세상에 퍼뜨린다. 도시의 역사, 아니 삶의 역사가 길수록 다채로운 골목을 자랑한다. 신도시들이 백화점 신상품처럼 등장하는 21세기 한국에서 골목의 자리는 더 이상 없다. 지난 시대 유물처럼 도시의 후미진 곳으로 밀려나 있을 뿐이다. 세상이 휘황해질수록 골목은 희미해진다. 속도가 선이고 미이고 덕이 돼버린 세상, 마음이 밀리고 잊히고 버려진 세상. 골목은 세상의 정면이 아닌 이면(裏面)이 됐고, 사진가들처럼 이면의 관찰자들, 소설가들처럼 이면의 탐구자들에 의해 잠시 세상에 본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나는 뒤를 돌아 골목을 바라본다. 부대에서 골목으로 이어지는 길 위에 두꺼운 침묵이 깔린 것만 같다. 어쩌면 이 순간이 두려워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도망치듯 골목을 떠났는지도 모른다. 나는 줄곧 이때를 기다려왔다. 끝에서부터 시작하기 위해서. 이제 나는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 그것이 살아남은 자들의 책임일 테니까. - 정한아, ‘리틀 시카고’ 중에서

나는 소설의 본류는 인간학임을 누누이 강조해왔다. 따라서 소설을 구성하는 몇 가지 요소 중 핵심은 인간(인물·캐릭터)이다. 소설은 이 인간이 태어나고 자라고 살고 죽는 사건, 곧 인생의 어느 한 때, 정확하게는 문제적인 한 시기를 그리는 것인데, 이 시기 이 인간이 처한 장소, 곧 공간(환경) 또한 소설에서 의미심장한 역할을 한다. 소설에서의 공간은 영화에서의 장면(scene·스크린)보다 선행한다. 영화가 발명되기 전 독자들은 소설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장면들을 경험했고, 소설가는 영화감독 이전에 미장센(mise en scene·작가가 연극이나 영화에 부여하는 시각적인 요소, 통칭 ‘연출’)을 소설에 적용했다. 선두 그룹에 19세기 소설가 발자크가 있고, 가장 후발 그룹에 21세기 소설가 정한아가 있는 셈이다.

독자를 관객으로 만드는 문장

우리가 처음으로 마주하는 세상은 흑백의 풍경이다. 시신경이 활성화된 생후 4개월까지, 아기들은 묽디묽은 무채색의 세상을 본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간은 점차 색채를 띠기 시작한다. 맨 처음 나뭇잎이 녹색으로 빛나기 시작한 순간, 병아리의 솜털이 노랗게 변한 순간, 하늘이 석양의 붉은빛으로 물든 순간, 아기들은 놀라서 소리를 지른다. 그 빛은 우리 생에 잠시 머물렀다가, 죽음에 이르는 순간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다들 뒤늦게 이마를 치는 것이다. 좀 더 봐둘걸, 좀 더 머물러서 봐둘걸.

내가 태어나 자란 골목은 ‘리틀 시카고’라 불렸다. -정한아, 앞의 책 중에서

골목에서 시작해 골목으로 끝나는 이 소설은, 분류하자면, 골목담으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잊히고 사라져가는, 삶의 어두운 이면에 가려져 있다가 세상에 나온 공간들 -집, 골목, 거리, 광장, 언덕- 은 소설가에 의해 세상(소설)에 호명되면 끊임없이 형상을 만들며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공간, 곧 장면이 살아 있는 소설은 독자를 관객으로 변화시킨다. 문장과 문장, 단락과 단락은 스크린이 되고 독자는 관객처럼 스크린 속 구체적인 현실을 경험한다. 밀란 쿤데라는 영화감독이 출현하기 이전 독자를 관객으로 만든 작가로 발자크를 꼽는다.

어느 지방의 몇몇 도시에는 겉모습에서 아주 음침한 수도원이나 지독히 쓸쓸한 황야, 아니면 말할 수 없이 서글픈 폐허가 연상되는 그런 우울함이 느껴지는 집들이 있다. 그런 집은 틀림없이 수도원의 침묵과 황야의 쓸쓸함 그리고 해골이 나뒹구는 폐허의 분위기를 풍길 것이다. 그곳에선 삶의 움직임이 하도 고요해서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에게는 사람이 살지 않는 집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우며, 군데군데 외진 곳이 있어 지금은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그 오르막길은 늘 깨끗하고 건조한 좁은 자갈길의 돌 부딪치는 소리, 꼬불꼬불한 길의 비좁음, 구시가지에 속해 있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집들의 고요함 등으로 명성이 나 있다. -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조명원 옮김, 지만지고전천줄, ‘외제니 그랑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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