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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배우 열전 ⑧

80년대 신여성 아이콘 심혜진

섹시한 커리어 우먼 이미지로 영화판 ‘올킬’

  • 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80년대 신여성 아이콘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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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년대 여배우들은 고만고만했다. 1970년대보다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었다. 당시 한국 영화의 화두는 ‘노출 수위’였다. 여배우를 얼마나 벗기느냐가 지상과제였다. 여배우들은 그저 소모품으로 여겨졌다. 그럴 때, 전혀 다른 유형의 한 여배우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몸에 착 붙는 청색 투피스를 입은 커리어 우먼. 미모와 지성, 게다가 섹시하기까지 한 이 신세대 여성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바로 심혜진이었다.
80년대 신여성 아이콘 심혜진


도대체 뼈와 살이 불타는 밤이란 어떤 밤일까. 1980년대 중반, ‘뼈와 살이 타는 밤’(1985, 조명화 감독)이란 영화가 상영되는 삼류 동시 상영관 앞에서 얼큰하게 술에 취한 나는 친구들과 극장 간판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심야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친구들과 나는 한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뭐 별거 없네.”

아시아경기대회와 올림픽을 치른 서울의 1980년대. 해외여행이 자율화됐고,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그런 세상이 됐는데, 서울의 극장가에는 말과 개를 비롯한 동물들을 사랑하는 온갖 부인네가 어깨와 허벅지를 드러내는 영화들이 판을 쳤다. 조선시대 여인네가 이상한 막대기를 손에 들고 깜짝 놀라는 얼굴로 ‘무엇에 쓰이는 물건인고?’ 하는 영화들, 성매매를 하는 비운의 여성들의 벗은 몸이 화면에 가득한 세상이었다.

한국 영화의 전성기였던 1960년대 말에 생긴 동네 극장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동네의 유서 깊은 제2개봉관들이 UIP(다국적 영화배급사) 직배 영화관이 되어 개봉관으로 승격됐다. 그 대신 상가 건물의 지하에는 작은 동시상영관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객석이 100여 석 남짓한 이 극장들은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버스 정거장 하나에 하나씩 생겨났다. 극장에 들어가면 요구르트를 하나씩 나눠주기도 했다.

“이야! 영화도 보고, 요구르트도 먹고.” 이태원과 압구정동에는 해외여행 자율화로 잠깐 미국 물을 먹은 아이들이 오렌지족이라 불리며 청춘을 불태울 때, 낑깡족임을 자처한 돈 없고 한심한 나 같은 청춘들은 동네 동시상영관에서 주말 밤에 ‘뼈와 살이 타는 밤’ 같은 영화를 보면서 요구르트를 쪽쪽 빨았다.

입에 꽃 한 송이를 문 사내 하나가 산마루에 서서 바지춤을 내리고 힘을 쓰자 지축이 흔들린다. 사내가 쏟아내는 오줌발은 소방 호스 물줄기처럼 콸콸 쏟아져 폭포수가 되고 금세 계곡이 되고 강이 되어 버린다. 사내의 반대편 북쪽에선 한 여인이 치마를 걷어 올리고 소변을 본다. 그러자 단단한 바윗덩이에 구멍이 파이고, 커다란 동굴이 되어버린다. 두 사람의 가공할 만한 정력은 보통 사람들이 당해낼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사내는 남에서 북으로, 여자는 북에서 남으로 짝을 찾아 길을 떠난다. 남남북녀가 드디어 만나 합궁을 하자 사슴들이 놀라 도망가고 새들이 땅에 떨어진다. 땅과 하늘이 들썩이고 지구가 요동을 치고 은하계가 부르르 떤다.

변강쇠와 옹녀의 가공할 정력을 다룬 영화 ‘변강쇠’다. 이를 비롯해 조선시대의 야담인 고금소총, 어우야담에서 소재를 가져온 영화들이 쏟아져나왔고, 당시 여성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여성 인신매매 소재 영화 ‘매춘’ 시리즈, 동물을 사랑하는 유부녀 시리즈들이 1980년대의 극장가를 점령했다. 이런 영화들을 우리는 에로영화라 불렀다. 주말에 여가를 즐길 마땅한 놀이가 없었던 젊은 남자들은 에로영화가 상영되는 동네 극장을 찾아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다가, 낄낄거리며 시간을 죽였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1970년대 ‘트로이카’라 불리던 여배우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여배우들이 들어섰다. 하지만 그들은 불운했다. 1970년대 중반~1980년대 말 한국 영화는 사상 최악의 암흑기를 맞았다. 이런 암흑기에 등장한 여배우는 아무리 뛰어난 연기력을 갖췄어도 재능을 꽃피우지 못했다. 좋은 시나리오와 감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미경, 이보희, 나영희 같은 이들이 그런 경우다.

이보희의 등장은 신선했다.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암담했던 시기에 절치부심한 이장호 감독은 ‘바보선언’(1983)으로 사회적 울분을 토해냈고 관객은 공감했다. ‘바보선언’에서 이보희는 가짜 여대생으로 출연해 그녀의 신선한 외모를 관객에게 각인시켰다. 그리고 이보희 주연의 ‘무릎과 무릎사이’(1985, 이장호 감독)와 ‘어우동’(1985, 이장호 감독)이 개봉됐다. ‘애마부인’ 이야기에 약간의 지적인 해석으로 여성의 트라우마를 넣은 ‘무릎과 무릎사이’는 흥행에 성공했다. 이장호 감독은 그 여세를 몰아 조선시대 야담에서 이야기를 가져온 ‘어우동’을 만든다. 조선시대 여성 수난사의 틀에 에로티시즘을 덧입힌 이 영화 역시 흥행에 성공한다. 연기력으로 그녀의 존재감이 발휘되기 이전, 이보희는 에로틱한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흥행을 이끈 여배우로 각인되고 만다.

1979년에 데뷔한 원미경은 아름다운 외모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좋은 작품을 만나지 못하고 ‘김두한형 시라소니형’(1981, 김효천 감독) ‘종로 부루스’(1982, 김효천 감독) 같은 깡패 액션 영화의 조연을 맡거나 고만고만한 멜로 영화에 주연으로 등장했다. 흥행에 성공한 영화는 없었다. 오히려 애욕에 가득한 여인으로 등장한 ‘반노’에서의 노출 때문에 ‘예술이냐, 외설이냐’는 해묵은 논쟁을 부른 비운의 주인공이 됐다. ‘여인 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3, 이두용 감독)를 통해 비로소 연기 잘하는 여배우로 인정받기 전까지 그녀는 많은 시련을 겪었다.

노출 여배우들의 시련

나영희는 ‘어둠의 자식들’(1981, 이장호 감독)로 영화계에 데뷔해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1982, 정진우 감독)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녀를 화제의 중심으로 만들어준 영화는 역시 ‘매춘’(1988, 유진선 감독)이었다. 그녀는 데뷔작인 ‘어둠의 자식들’에서 ‘카수 영애’로 등장, 가수를 꿈꾸었으나 창녀로 전락한 한 많은 여자를 연기했는데, 공교롭게도 영화 ‘매춘’에서 매춘녀 역을 맡으며 최고의 흥행을 거둔 것이다. 영화가 개봉되자 아무도 그녀의 연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고, 가슴 노출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1980년대 후반엔 대놓고 에로배우라는 칭호를 받는 여배우들도 등장했다. 1984년 ‘산딸기2’(김수형 감독)로 등장한 선우일란, ‘애마부인’ 출신의 오수비, ‘어울렁 더울렁’(1986, 차성호 감독), ‘요화 어울우동’(1986, 김기현 감독)의 김문희 같은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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