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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에세이

꽃향기는 멀리 가기에 그리움으로 남는다

  • 이태동 문학평론가│서강대 명예교수

꽃향기는 멀리 가기에 그리움으로 남는다

꽃향기는 멀리 가기에 그리움으로 남는다

덕수궁 꽃 정원.

영국의 어느 시인이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말했지만, 겨우내 얼어붙었던 들판이 초록빛으로 물들고 라일락이 구름처럼 피어나는 4월의 풍경은 아름답다. 그러나 봄에 피는 꽃들보다 어둠 속에 짙은 향기를 뿜으며 지는 꽃들 또한 아름답다는 것을 사람들이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들리지는 않지만 꽃이 피어나는 소리보다 꽃이 지는 소리가 나는 더 듣고 싶다. 누추하고 남루한 죽음을 맞는 목련과는 달리 매화와 배꽃, 복사꽃과 벚꽃은 꽃비를 뿌리며 산화(散華)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고, 라일락이 떨어지며 뿌리는 짙은 향기는 국화꽃 향기만큼 멀리 간다.

이렇게 4월의 봄이 찾아 왔는데도 내가 “꽃은 지기 때문에 아름답다”라는 말과 함께 가을날의 슬픔 속에 국화꽃 향기를 느끼듯 라일락 꽃향기를 생각하는 것은 재작년 갑자기 내 곁을 떠난 정귀호 대법관과의 우정이 문득문득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가 가버리고 난 후 나는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의 빛이 바래는 것이 너무 싫어서, 보이지 않는 곳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조용한 시간이 찾아오면 그와 함께했던 옛 시절의 일들이 무의식적인 기억 속으로 소리 없이 밀려온다.

그와 나는 고등학교를 함께 다녔다. 그는 일찍부터 신화적인 인물로서 법과대학으로 진학해서 판사생활을 하게 되었고, 나는 나의 길을 허덕이며 걸었다. 우리는 어린 시절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지만 그 시절에는 그렇게 절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가는 길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그를 자주 만나 정담을 나눌 기회가 별로 없었다.

어른이 되어 우리가 만난 것은 다만 우연한 해후에 의해서였다. 내가 어둡고 힘겨운 20대를 보낼 무렵 대구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우연히 그를 만나 우정 있는 정담을 처음 깊게 나누었다. 그는 당시 법무관이었고 나는 영문학을 공부하러 미국으로 가기 위해 막 군복을 벗으려는 연락장교였다.

40대를 보내면서 어느 날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다가 그가 생각나서 부근에 있던 법원으로 그를 찾아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차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우리는 말수가 적었지만, 서로에게서 어린 시절에는 보지 못했던 성숙하고 인간적인 모습에 기뻐했다. 그는 선비와 같이 결곡하지만 온후한 품격으로 문학의 가치를 이해하고 글 쓰는 사람의 고뇌와 외로움의 시를 읽어내려는 공감의 자세를 내게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 후 나는 이 판사 친구를 만날 때마다 존경에 가까운 우정을 느꼈다. 그것은 판사라는 신분 때문이 아니라 다른 누구에게서도 발견하지 못하던 우아하고 중후한 그의 지적 인품 때문이었다. 사람의 품격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중한 것인지를 알게 된 것은 그를 통해서였다.

또 한 번의 10년을 보낸 후 지금은 고인이 된 재미 의사 친구와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 그를 누추한 우리 집에 초대했다. 그가 우리 집 대문 안으로 걸어 들어왔을 때, 그의 머리는 벌써 희끗희끗해져 있고 주름살 속에 세월의 상처가 숨어 있었다. 그러나 비둘기색 양복에 검정 구두를 신은 그의 모습에서 옛날보다 더 원숙한 품위가 보였다.

그는 남달리 명석한 두뇌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오만하거나 교만한 빛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말에는 언제나 조용한 지혜가 넘쳐흘렀고 누구를 대하든 상대를 배려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보였다. 어느 누구와 대화할 때도 자기만의 독단적인 태도는 조금도 드러내지 않고 늘 변증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어떤 큰 문제를 두고 생각할 때, 어떤 해답이 나올 것 같으면, 그것과 똑같이 진실된 또 다른 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위치에서가 아니라 상대편의 위치에서 그 문제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상반된 믿음의 가능성 사이에서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두 개의 믿음을 무리하게 결합시키려고만 하진 않았다. 그는 수많은 재판을 했던 경험 때문인지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포샤처럼 문제 해결을 위해 항상 더 많은 경험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의 매너가 가끔 상대편에게 너무나 정중하고 형식에 치우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결코 기계적으로 되풀이되는 형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랜 경험과 수양을 통해 얻은 성숙한 몸가짐과 풍부한 이해력에서 자연스럽게 잉태된 의식이었다. 그는 한 치의 자만심도 내보이지 않고 상대편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수용하며, 그의 좋은 점을 있는 그대로 정중하게 평가해서 받아들이려고 했다.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그의 노력은 히페리온(Hyperion)처럼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것에 가까웠다.

드디어 나는 그가 대법관이 되는 것을 멀리서 보는 기쁨을 가졌다. 그 뒤 그는 너무나 바빠진 데다 몸가짐과 처신에 더욱 조심해야 했기 때문에 플루트를 연주하는 그의 딸아이 연주회 때를 제외하고는 그를 자주 만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법복을 벗고 나와 변호사로 몇 년 일하고 있을 동안 우리는 가끔 만나 변화하는 세상에 대해 담론을 펼치며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다. 나는 심적으로 외로울 때 그를 찾았고, 그도 나와 만나는 것을 즐거워했다. 우리는 기쁜 일이 있을 때는 함께했고, 어려운 곳에 가야 할 일이 있을 때는 함께 갔다. 나는 그가 옆에 있으면 언제나 든든하고 좋았다. 오랫동안 소식이 없으면 서로 궁금해했다.

그는 나의 산문을 좋아했다. 그가 어느 로펌에서 변호사로 몇 년 일하고 있을 때, 대학에서 정년을 맞은 나를 위로하기 위해 출판을 시작하면 자기도 여의치 못할 텐데 내게 집필 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겠다는 말까지 했다. 나는 조용히 거절했지만 그만큼 그는 내게 깊은 우정을 보여줬다. 되돌아보면 그가 대법관 이후 변호사 생활을 10년 가까이 하는 동안이 우리 우정의 황금기였다.

그러나 2011년 내가 누군가와 자리를 함께하자고 그에게 연락했을 때 소식이 없었다. 느낌이 좋지 않아 부인에게 연락했더니, 병원에 다니며 얼마동안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쉬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건강한 군자(君子)다운 모습을 잃지 않고 있었고, 내가 감기를 오래 앓으면서 좀 우울한 상태에 있으면 녹차를 우려주고 깊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을 독일어로 외우면서 용기를 주곤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난 후 겨울이 가고 봄이 왔을 때, 그는 법원 앞 어느 음식점으로 나를 초대했다. 내가 많이 아프냐고 물었을 때, 그는 고개를 흔들고 보통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나와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그의 얼굴이 창백하고 봄이 왔는데도 옷을 좀 두텁게 입었다는 것 말고는 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그를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2개월이 지난 후 어느 날 아침 내가 책상 앞에서 졸고 있는데 검사인 그의 사위에게서 그가 간밤에 별세했다는 부음이 왔다.

꽃향기는 멀리 가기에 그리움으로 남는다
이태동

1939년 경북 청도 출생

한국외대 영어과 졸업,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 석사(영문학), 서울대 박사(영문학)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초빙연구원, 스탠퍼드대 및 듀크대 풀브라이트 연구교수, 서강대 문과대학장 역임

現 문학평론가, 수필가, 서강대 명예교수


그의 장례식에 갔을 때, 검은 상복을 입은 그의 부인이 나의 팔을 잡고 나와, 죽은 남편이 두 달 전 법원 앞 그 음식점으로 나를 초대했던 것은 내게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참된 마음의 벗이었던 귀호가 떠나간 지 벌써 두 해가 지나가고 다시 4월이 찾아왔다. 가끔 외로움을 느끼면 그와 함께 했던 지나간 옛일이 생각나고 그가 무척이나 그리운 것은 그가 뿌리고 간 깊은 우정의 향기 때문이리라. 내가 만일 그의 묘비문을 써야 한다면 “꽃은 지기 때문에 아름답고, 향기는 멀리 가기 때문에 그리움으로 남는다”라고 쓸 것이다.

신동아 2013년 5월 호

이태동 문학평론가│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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