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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배우 열전

뒷모습이 아름다운 배우 문정숙

절제된 감정의 끝 보여준 ‘만추’의 여인

  • 오승욱 │영화감독 dookb@naver.com

뒷모습이 아름다운 배우 문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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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1인 3역

뒷모습이 아름다운 배우 문정숙

영화 ‘검은 머리’의 한 장면.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처음에 등장한 젊은 여인이 문정숙인지 몰랐다. 두 번째 여인이 등장했을 때에야 뺨 아래에 난 작은 점을 보고 문정숙임을 알아봤다. 내가 아는 문정숙은 모두 30대 후반의 역할이어서 20대의 문정숙을 몰라본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외모가 머릿속에 각인될 만큼 아름답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그녀의 조용하고 다감한 연기에 빠져들었다. 내가 보기에, ‘종각’ 반대파들이 왜 이 영화를 낙선시켰는지 수긍할 만한 부분은 그녀의 연기가 아니라 시나리오와 연출상의 문제였다. 가령 허장강이 결혼을 약속한 첫 번째 여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너무나 억지스러웠다. ‘종각’은 한 인간의 집념을 진지하게 그리기 위해 공을 들이기는 했지만, 특별히 내세울 만한 게 있는 작품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정숙의 연기력 때문에 이 영화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나리오와 연출은 미숙했지만, 허장강과 문정숙의 연기는 조금도 과장되지 않고 차분해서 당대의 어느 영화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봤다. 문정숙의 연기에선 보는 이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기품이 느껴졌다. 이 영화를 옹호한 평론가 백철은 이후 문정숙의 팬이 됐는데, “문정숙은 지성적이며 연기의 신축성이 넓어 여러 가지 배역을 맡아도 능히 감당한다”고 극찬한 바 있다.

문정숙은 배우였던 언니 문정복의 공연을 보면서 연기자의 꿈을 품었다. 17세에 여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극단에 들어가 연기자가 됐고, 1952년 신상옥 감독의 ‘악야’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영화계에 발을 디뎠다.



1956년 연극 연습을 하던 그녀를 주목한 사람은 당시 인기 절정의 신인 남자배우 최무룡이었다. 그는 유현목 감독과 함께 자신이 제작, 주연을 맡은 영화 ‘유전의 애수’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문정숙을 보고는 이 영화가 원하는 슬픈 느낌의 얼굴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유 감독에게 소개했다. 단역 신세였던 문정숙은 일약 주연으로 발탁됐다. 영화는 성공했고 사람들은 “이탈리아 여배우가 나왔다”며 문정숙의 연기를 칭찬했다. 1950년대를 풍미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 속 여주인공의, 감정이 절제된 사실적인 연기를 문정숙에게서 본 게 아니었을까. 그후 문정숙은 최은희만큼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했지만, 주연과 조연으로 영화에 꾸준히 출연해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이만희 감독을 만나다

그리고 그녀는 운명적으로 감독 이만희를 만난다. 이만희 감독은 군복무 시절 문정숙이 주연으로 나온 영화를 보고 ‘제대한 뒤 꼭 문정숙을 여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이만희는 제대 후 연출부 생활을 거쳐 능력을 인정받아 감독으로 데뷔한 후 세 번째 영화 ‘다이얼 112를 돌려라’(1962)를 만들며 문정숙을 주연으로 내세웠다.

당시 인기와 연기력에서 최고의 여배우는 단연 최은희였다. 그렇다면 이만희 감독은 왜 최은희가 아니라 문정숙을 선택했을까. 최은희가 신상옥 감독의 프로덕션 소속이라 다른 영화사 작품에 출연하는 게 쉽지 않았겠지만, 문정숙에게는 최은희가 갖지 못한 어두움과 우수의 이미지가 있었다. 최은희는 낮이 어울리는 여자였다. 최은희는 신상옥 감독의 ‘지옥화’(1958)에서도 뜨겁게 내리쬐는 한낮의 고통을 표현한 양공주였을 뿐, 음습하고 우수에 찬 어둠의 고통을 표현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문정숙은 완벽한 밤의 여자였다. 그녀가 표현하는 고통에는 어둠이 드리워 있었다. 이만희 감독은 그것을 간파해 그녀를 악랄하고 더러운 세 남자의 흉계 속에서 고통받는 여주인공으로 선택했다. ‘다이얼 112를 돌려라’는 흥행에 성공했고, 김진규·최은희 콤비, 최무룡·김지미 콤비에 이어 장동휘·문정숙 콤비라는 말이 그때부터 나왔다.

영화 ‘오발탄’(유현목 감독, 1962)에서 문정숙이 연기한,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남편과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 깡패 시동생, 양공주가 되는 시누이 사이에 낀 지옥과도 같은 가난 속에서 끝내 비극적 최후를 맞는 김진규의 아내 역도 인상 깊지만, 문정숙이 명실 공히 당대 최고의 연기자임을 증명한 영화는 역시 ‘검은 머리’(이만희 감독, 1964)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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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욱 │영화감독 dook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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