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호

영화 시작 전 세 시간 스마트폰으로 읽는 첫사랑 신화

  • 함정임 │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입력2013-06-20 09: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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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시작 전 세 시간 스마트폰으로 읽는 첫사랑 신화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br> 세 시간<br>F. 스콧 피츠제럴드, 싱글에디션3 , 김욱동 옮김, 민음사, 990원

    2013년 5월 24일 오후 1시. 맨해튼 34번가의 상영관(AMC Leuws 34street 14)으로 며칠 전 개봉한 영화 ‘위대한 개츠비’를 보러가는 길. 몇 걸음 걷지 않아 천둥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 삽시간에 도로에 물이 고이더니 쿨렁거렸고, 나는 뉴욕타임스 사옥 처마 밑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뿌옇게 시야를 흐리는 거센 빗줄기 사이로 허드슨 강 건너 마을에서 버스를 타고 링컨 터널을 통과해 맨해튼으로 진입하는 동안 읽은 짧은 소설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비행기가 착륙하자 그는 중서부의 한여름 밤 속으로 걸어나와 낡고 붉은 ‘철도역’처럼 판에 박은 듯한 푸에블로 인디언 집 같은 공항 건물로 향했다. 그녀가 살아 있는지, 아직 이 읍에 살고 있는지, 또는 그녀의 이름이 어떻게 달라져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점점 흥분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는 전화번호부에서 (…) 이름을 찾아보았다.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 시간’

    나는 왜 거기,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속절없이 서 있었을까.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나는 파리 시내 곳곳에서 레오나르도 디캐프리오가 분(扮)한 개츠비와 마주치곤 했다. 1920년대 뉴욕을 현장에서 호흡해보는 것. 부지불식간에 개츠비는 파리보다는 뉴욕에서 봐야 제격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은 대부분 시간을 내어 개봉관에서 보아온 터였고,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이나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The reader)’,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소장하며 가끔 꺼내보곤 했다.

    ‘위대한 개츠비’



    특히 개츠비는 3년 전 이 지면(2010년 4월호)에 쓴 바 있다. 글의 지향점은 주식과 밀주 매매로 벼락부자가 된 개츠비라는 사내의 이름에 왜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지에 있었다. 작가의 의도(주제)와는 상관없이 독자가 부여하고, 나아가 간직하고 싶어 하는 것이 있는데, 대부분 첫사랑의 신화가 그러하다.

    이 작품을 쓸 당시 피츠제럴드가 롱아일랜드의 그레이트 네크에 정착했다는 사실까지 독자가 알 수는 없다. 더욱이 한때 작가는 ‘위대한 개츠비’의 제목을 ‘황금모자를 쓴 개츠비’ ‘높이 뛰어오르는 연인’으로 붙일 생각을 했다는 후일담까지 일반 독자가 알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개츠비라는, 황금 소나기를 맞은 기막히게 운 좋은 사내의 모든 것이 오직 데이지라는 한 여인만을 향하고 있는 데에서 위대함을 찾기도 한다.

    사실, ‘위대한 개츠비’는 첫사랑을 다룬 수많은 작품 가운데 단연 손꼽히는 소설이다. 이런저런 맥락을 짚어보자면, 피츠제럴드의 열렬한 추종자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의 서사 골격 또한 첫사랑에 대한 후일담인 셈이다. 내가 영화 ‘위대한 개츠비’를 보기 위해 맨해튼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읽은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 시간’ 역시 첫사랑에 대한 소설이다.

    굽은 차도 끝에 검은 머리에 몸집이 작은 미녀 한 사람이 손에 술잔을 들고 서 있었다. 마침내 그녀의 모습이 나타나자 놀란 도널드는 택시에서 내리며 말을 걸었다.

    “기포드 부인인가요?”

    그녀는 현관의 불을 켜고 눈을 크게 뜨며 주저하듯 그를 쳐다보았다. 의아스러운 표정을 짓던 얼굴에 갑자기 미소가 떠올랐다.

    “도널드, 바로 너로군. 우린 너무 변했어. 아, 정말이지 믿어지지가 않아!”

    집안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그들은 “그동안 지나가버린 세월” 하며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고, 도널드는 가슴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 시간’

    누구나 가슴 한 켠에 첫사랑이 자리 잡고 있기 마련이다. 세월이 흐른 뒤, 첫사랑이 지척에 있을 경우 만날 것인가. 대개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경험한다. 만나보고 싶은 호기심과, 만난 후의 실망감이 두려워 그대로 묻어두려는 마음.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 시간’은 제목에 명시되어 있는 대로 세 시간 동안 화자인 도널드 플랜트라는 서른두 살의 사내가 경유지이자 고향인 미 중서부의 한 마을에 살고 있는 첫사랑 낸시 홈스를 20년 만에 집으로 찾아가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다. 흥미로운 것은 ‘위대한 개츠비’가 경장편의 분량(호흡)으로 집요하게 첫사랑의 내막과 첫사랑과의 재회를 전하고 있다면, 단편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 시간’은 저마다 가슴 한 켠에 간직한 첫사랑의 실체와 허상을 마치 시트콤을 보듯 속도감 있게 그리고 있는 것이다.

    에피퍼니 법칙

    오 분쯤 앉아 있는 동안 도널드는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첫 번째는, 똑같은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사람이 기억해내는 것을 절충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놀랍게도 낸시가 어렸을 때 자신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처럼 지금도 여자로서 자신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삼십 분 동안 그는 아내와 사별한 뒤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던 바로 그런 감정을 느꼈던 것이다.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 시간’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 시간’은 20세기 초 단편소설 양식을 이끌었던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 파티’나 ‘행복’,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이 구현하고 있는 에피퍼니(epiphany)의 법칙을 따르고 있다. 에피퍼니는 현현(顯現)이라고 부르며, 갑자기 닥친 어떤 사태나 사안이 잠깐의 혼란(시험)을 통과하면서, 또는 견디면서 명료해지는 효과라 할 수 있다. 20년 전 사랑의 대상을 찾아 확인하는 과정(장면)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다. 이것이 소설이 되기 위해서는 에피퍼니를 장치해야 하는데, 피츠제럴드가 고안한 것은 한 사건에 대한 두 사람의 어긋난 기억이다. 아이러니, 또는 반전이 창출되는 지점이다.

    여기 낸시라는 열 살짜리 여자애가 있다. 도널드라는 이름의 사내아이 두 명이 동시에 이 여자애를 좋아했고, 이 여자애는 그중 한 명을 좋아했다. 사내아이들의 이름은 도널드 플랜트와 도널드 바워스다. 두 도널드는 낸시에게 키스를 했다. 20년 후 도널드 플랜트는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 시간 낸시 홈스와 서로 기억을 맞춰가던 중, 서로가 생각하는 대상이 같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기억해. 너도 기억한다고. 하지만 그건 아주 오래전의 일이잖아.”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굳어졌다. (…) 공항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널드는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이제는 완전히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와 있었지만, 그 경험의 의미를 되씹어볼 수 없었다. 비행기가 굉음을 내며 어두운 밤하늘로 높이 올라가고 (…) 도널드는 비행기를 갈아타는 시간 동안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인생의 후반부란 여러 가지를 잃어가는 기나긴 과정인 탓에 이번의 경험도 어쩌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 시간’

    맨해튼으로 ‘위대한 개츠비’를 보기 위해 외출 준비를 하면서 나는 최근 ‘싱글에디션’으로 출시된 피츠제럴드의 단편소설 두 편을 스마트폰에 저장했다.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 시간’과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 단편소설 한 편을 읽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평균 30분 내외. 독자는 30분 안에 어느 시기 한 사람의 생을 통과하는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 시간’은 첫사랑을 둘러싼 인간의 기억에 관한 에피소드이고,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은 인간에게 주어진 생의 흐름을 모래시계 뒤집듯 거꾸로 놓음으로써 일상의 규칙을 낯설게 전복시키는 시간에 대한 에피소드다.

    ‘출간’이 아닌 ‘출시’

    두 작품이 ‘출간’이 아닌 ‘출시’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학 시절부터 단편소설을 왕성하게 창작했던 피츠제럴드의 160편 중 대표 단편소설들은 단행본으로 출간된 상태다. 최근 들어, 음악 시장의 싱글 앨범처럼 싱글에디션으로 e북이 출시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그것이다. 장기로, 또 수시로 국외의 이 도시 저 도시로 이동 중인 현재의 나에게는 매우 유익한 독서 시스템이다.

    비가 그치자, 이방인들이 봇물처럼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영화가 시작되려면 한 시간이 남았고, 나는 밖이 잘 보이는 영화관 유리창가에 앉아 누군가로부터 온 메시지를 읽듯 스마트폰을 열어 피츠제럴드의 문장들을 읽을 것이다.개츠비, 아니 벤자민의 마지막 순간이 이방인들 틈에서 은밀하게 공명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이다운 그의 잠에 괴로운 기억이라고는 없었다. (…) 낮과 밤이 흐르고 숨을 쉬었다. 그 위로 그의 귀에 간신히 들리는 웅얼거림과 간신히 식별되는 냄새와 빛과 어둠이 있었다. 모든 것이 어두워졌고 그가 누운 하얀 아기 침대와 위에서 움직이던 희미한 얼굴들, 따뜻하고 달콤한 우유향이 그의 뇌리에서 모두 사라져버렸다.

    -F. 피츠제럴드,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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