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호

작약은 낯설어도 여름은 깊어간다

경북 의성군 양지리 일대

  • 글·김동률|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사진·권태균|사진작가 photocivic@naver.com

    입력2013-06-20 17: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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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약은 낯설어도 여름은 깊어간다
    그제 5월 고향집의 오래된 싱크대를 바꿨다. 지난 설날 선심 쓰듯 한 설거지가 계기가 됐다. 우연히 접한 싱크대는 낡고 물이 새는 등 남루했다. 내친김에 부엌 식탁도 바꾸고 화장실의 양변기와 세면기도 그 좋다는 ‘아메리칸 스탠다드’ 브랜드로 교체했다.

    여든이 가까우신 부모님, 특히 어머니의 반대는 완강했다.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느냐며 마다하시는 것을 거의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였다. 공사가 끝난 뒤 서울로 돌아오려고 집을 나서는 일요일 오후, 고향집 뜨락에 무더기로 핀 꽃을 발견했다. 바빴던 공사 중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무척 탐스러운 꽃들이다. 어머니가 알려주기 전에는 그 꽃이 작약꽃인 줄 몰랐다.

    가장 동양적인 꽃

    작약꽃을 보신 적이 있는가. 작약은 영어로 ‘피어니’(paeony 또는 peony)다. 모란과 비슷해 선뜻 구별하기가 힘들다. 영어 이름도 모란과 같은 것으로 봐서 서양인들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나보다. 기성세대가 ‘피어리스 피어니’라는 화장품 브랜드 정도로 기억하는 영어 꽃 이름이다.

    작약은 산삼처럼 오랜 세월 동안 피기와 지기를 거듭한다. 보통 13~15년을 살다 스스로 말라 죽는 묘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꽃도 아름답지만 뿌리는 월경통· 무월경 같은 부인과 질환 약재로 유용하다. 중국에서는 진(晉)나라와 명(明)나라 때 이미 재배됐으며 그 역사는 모란보다 앞선다고 한다.



    한국과 중국 일부에서 분포하는 작약은 가장 동양적인 꽃이기도 하다. 고향집 뜰 앞에서 만난 작약은 화려한 자줏빛의 묘한 색감과 풍성한 초록잎 등 간단히 표현하기 어려운 그 무엇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사진을 찍는 권태균 선생이 작약꽃이 만발한 오지로 가자고 말을 꺼내자 마음이 고향의 부모님께 향하는 기분으로 내내 설레ㅆ다.

    작약은 낯설고 드물다. 장미는 어디에든 널려 있다. 섬마을 등 해변 백사장에만 피는 흔치 않던 해당화조차 요즈음엔 곧잘 눈에 띈다. 하지만 정작 작약꽃은 접하기 어렵다. 모란이야 이미 김영랑 시인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덕에 ‘국민꽃’이 된 지 오래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로 시작하는 가왕(歌王) 조용필 오빠의 데뷔곡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동백꽃 또한 한국인에게 익숙하다. 실체는 몰라도 당연히 아는 것처럼 여기는 꽃이 모란이고 동백이다. 그래서 오지랖 넓은 팔방미인 조영남까지 ‘모란 동백’을 노래하지 않았던가.

    반면 작약은 모란보다 훨씬 기품 있지만 그 쉽지 않은 발음만큼이나 여전히 외롭고 낯설다. 작약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가봐야 할 곳이 있다. 경북 의성군 사곡면 양지리, 신감리 일대 작약 마을이다. 의성군은 안동과 청송, 상주 등과 접하고 있는 경북의 중심으로 1개 읍과 17개 면을 거느린 제법 규모가 큰 군이다. 너른 들판이 있어 일찍부터 번창한 안계와는 대조적으로 이름이 의미하듯 사곡면은 골짜기에 위치한 외딴 마을이다. 이 존재감 없는 사곡에서 작약꽃 향기가 초여름 바람에 날린다.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면 마을 대부분이 약재용 작약 재배로 성가를 올렸다. 하지만 값싼 중국산이 밀려오는 바람에 대부분 사라졌다가 최근에 다시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중국산 약재가 중금속에 오염됐다는 얘기에 조금씩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게 뙤약볕에 들깨 모종을 손질하던 이학선 할아버지(78)의 설명이다.

    작약은 낯설어도 여름은 깊어간다

    작약은 뿌리가 약재로 쓰이고 꽃은 비싼 값에 팔린다.

    ‘일해백리’ 마늘 세상

    할아버지는 이곳이 고향이 아니다. 본디 대구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나이 들어 자식들 눈치 보기도 그렇고 해서 할머니를 요양원에 입원시킨 뒤 남은 재산을 몽땅 털어 이곳에서 400여 평의 밭과 폐농가를 구입해 홀로 산 지가 10년이 훌쩍 지났다고 한다. 젊어서는 구멍가게 등 안 해본 것이 없었다는 할아버지의 손등 주름에는 외로움과 간난의 역사가 깊이 파여 있다.

    “사람들하고 잡담하는 것보다 흙하고 노는 것이 훨씬 재미있다”는 할아버지는 연 소출이 참깨 1가마다. 하지만 “나 혼자 생활하기에는 부족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작약꽃을 재배하지는 않는다. 약재로 쓰이는 작약은 대개 4~5년은 자라야 하는데 그때까지 살 수 있을지 자신이 없기 때문이란다. 할아버지의 무심한 넋두리에 맘이 짠하다.

    작약은 낯설어도 여름은 깊어간다

    폐교가 된 의성중학교 사곡분교. 운동장에 마늘이 가득하다.

    의성군의 대부분 동네가 그렇듯이 사곡면도 예부터 마늘로, 그것도 육쪽마늘로 유명했다. 그 틈새를 뚫고 지금은 작약 재배가 조금씩 늘고 있다. 마늘 농사의 위세는 여전히 대단하다. 마을마다 골짜기마다 조그만 밭뙈기에도 마늘이 빼곡히 심겨져 있다. 마늘이 지천이다. 마늘은 폐분교의 운동장에도 둥지를 틀었다. 폐허가 된 의성중학교 사곡분교다.

    집에서 만들어 온 손걸레로 초칠을 하며 윤을 내던 복도 마룻바닥은 윤기를 잃었다. 한겨울 조회시간, 끝없이 이어지는 교장 선생님의 훈화에 발을 동동 구르던 운동장, 피구를 하다가 벗겨진 무릎에 ‘아까징기’라는 빨간 약을 바르고 놀던 운동장은 이제 마늘의 바다다.

    그 초록의 마늘밭에서 마을 할머니들이 보기에도 섬뜩한 날선 면도칼로 열심히 뭔가를 하고 있다. 마늘종을 자르는 작업이다. 도회에서 찬거리로 유용한 마늘종이지만 정작 마늘밭에서는 잘라내야 할 군더더기다. 단단한 육쪽마늘에 필요한 가지치기쯤으로 이해하면 된다. 마늘 재배를 위해 분교를 빌리는 데 드는 임차료는 연 170만 원, 군 교육청에 매년 이 돈을 내고 마늘을 키워온 지가 10년이 훌쩍 넘었다고 밭주인 오유희(58) 씨가 말한다. 연간 300접 정도를 한다니 꽤 목돈을 만지는 것 같지만 인건비에 농약에 거름값을 제하고 나면 큰돈은 못 건진다고 한다. 자식 둘을 서울 소재 대학까지 보냈다는 말에 묻혀 그리 믿기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마늘은 돈 힘이 센가보다.

    마늘을 일컬어 일해백리(一害百利)라고 한다. 강한 냄새를 제외하고는 100가지 이로움이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오늘날에는 마늘의 효능이 과학적으로 밝혀져 웰빙 식품의 대명사쯤으로 각광받고 있다. 중앙아시아가 원산인 마늘은 백합과 중 가장 매운 식물로, 2002년 ‘타임’은 마늘을 세계 10대 건강식품으로 선정했다. 최근 들어 서양에서도 단연 인기다. 마늘이 강장제라는 것은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알려져 있다. 기원전 2500년 무렵 만들어진 이집트 쿠프 왕의 피라미드 벽면 상형문자에도 피라미드 건설에 종사한 노동자들에게 마늘을 먹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뿐이 아니다. 왕의 무덤에 마늘을 넣었던 고대 이집트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두고 맹세하는 것처럼 마늘에 대고 맹세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오죽하면 마늘빵에다, 마늘치킨에다, ‘매드 포 갈릭 (mad for garlic)’이라는 황당한 이름의 프랜차이즈 레스토랑까지 나왔겠는가. 그래서 마늘은 단군신화에도 등장하고, 그 무시무시한 드라큘라도 마늘냄새에는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가지 않았던가.

    작약은 낯설어도 여름은 깊어간다

    아주머니가 새참을 준비하고 있다. 모내기하는 할아버지가 새참을 들면서 술을 권한다.

    흥겨운 새참, 다시 적막강산

    할머니들을 도와 마늘종을 잘라내느라 한나절을 보내니 점심때다. 마늘밭 주인 양반의 부인이 플라스틱 광주리에 점심을 챙겨 오셨다. 얼마 만에 보는 그리운 시절의 풍경이던가. 염치 불고하고 한자리 끼어들어 식은 밥을 한술 뜨니 완전히 유년의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 그땐 그랬다. 대나무 광주리에 담겨 온 보리밥에 풋고추에, 생된장에, 모두들 허기진 배를 채우고 오뉴월 뙤약볕 아래 논밭 일에 매달렸다.

    그렇게 어렵게 모은 돈으로 서울로 떠나는 아들의 팬티에 달린 조그만 돈주머니에 용돈을 챙겨주던 이 땅의 어머니들이 그랬다. 그러나 지금의 점심은 풍성하다. 풀밭 위에 놓인 아이스박스에는 우선 지난가을에 담근 김장 김치가 있었다. 단연 인기였다. 쇠고기를 적당히 다져 넣은 미역국에다 멸치조림에 고추장에 버무린 가죽나무 새순이 눈길을 끈다. 식사가 끝나니 곧바로 과일 후식에 커피까지. 그 옛날의 새참, 중참과는 아예 비교가 되질 않는다.

    짧은 식사는 끝나고 사람들은 저마다 밭으로 돌아간다. 잠시의 부산함에 이어 마을은 다시 적막강산이다. 부지깽이도 움직인다는 농촌의 바쁜 오뉴월이지만 사곡마을 골짜기에는 젊은이는 물론이고 아이들 흔적조차 없다.

    무심한 작약꽃은 지평선에 닿아 있고 시골 노인들의 한숨소리는 먼 산 뻐꾸기 울음소리에 묻혀 아득하다. ‘꽃피기는 힘들어도 지기는 한순간’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 많던 젊음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사곡 골짜기에 여름이 깊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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