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호

감잎처럼 은행잎처럼 느리게 떠나고 싶더라

경북 청도

  • 최학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 hakbong5@hanmail.net

    입력2013-07-19 10:0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문상할 일이 있어 밀양 가는 길

    기차가 마악 청도를 지나면서

    창밖으로 펼쳐지는 감나무 숲

    잘 익은 감들이 노을 젖어 한결 곱고

    감나무 숲 속에는 몇 채의 집



    집안에는 사람이 있는지

    불빛이 흐릿한데, 스쳐 지나는

    아아, 저 따뜻한 불빛 속에도 그늘이 있어

    울 밖에 조등(弔燈)을 내다 걸었네

    -정희성 시 ‘청도를 지나며’ 전문

    맑은 가을볕 속에서 감나무를 우러러본 적이 있는가. 어느새 무성한 잎들은 지고 알알이 빨갛게 익은 열매가 그 숫자만큼 매달린 물든 이파리와 더불어 햇살을 받고 있는 모습을. 어쩌면 그 잎이 열매보다 더 곱고 안쓰럽다. 천 잎의 이파리가 천 가지 색깔로 물들면서도 화려함과 번쇄함만큼은 아득한 거리에 둘 줄 아는 겸허한 위의(威儀) 때문이다.

    우리네 삶은 과실나무의 열매를 닮은 것일까, 아니면 이파리를 닮은 것일까. 부질없는 질문이다. 분명한 것은 생성과 소멸뿐. 그래도 바람이 있다면 소멸 직전에는 감잎처럼 적막하면서도 찬연한 어여쁨쯤은 지녀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해 질 녘, 터널을 빠져나온 열차는 감 익는 시골 마을을 통과한다. 집집의 감나무 가지마다 휘어지게 홍시가 달렸다. 놀빛 받아 더욱 고운 홍시와 감잎이 지붕을 가리고 있는 작은 시골집 울 밖에는 또 다른 홍시 한 알인 듯 조등(弔燈)이 걸려 있다. 아. 저 예쁜 마을에서도 누군가 세상을 떠나고 있구나! 홍시 떨어지듯이, 감잎 떨어지듯이….

    발견의 놀람은 고운 풍경 속에서 더욱 확연하다. 찰나적인 이 발견과 인식은 놀빛 아래 마지막 예쁨을 현현하는 감나무에 의해 가능하며 그로 인해 삶과 죽음의 색깔까지 가늠케 한다. 그리고 그 구체적 지점으로 청도가 표시되는데, 감 하나에 대해서도 생명의 의미를 묻는 시인의 시선에 의해 경상도 내륙의 소도시 청도는 존재론의 한 좌표가 된다.

    감나무 마을

    소싸움의 고장으로 유명한 경북 청도는 전국 최고의 감 생산지다. 감나무 마을 중에서도 특히 소문난 곳이 송금리 마을인데 경부선 기차를 이용하는 승객들은 열차의 차창을 통해서도 이 마을 풍경을 쉽게 바라볼 수 있다. 하행 열차를 타면 기차가 대구와 경산을 지나고 남성현 터널을 통과해서 청도 땅에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마을이기 때문이다. 150여 가구의 아담한 농가 저마다 키 낮은 돌담을 두르고 있고, 울안의 감나무들은 담장 밖에까지 가지를 내밀고 가을의 정체 같은 홍시와 감잎을 드리운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때 찾은 감나무 마을은 매미소리에 잠겨 있었다. 가지마다 밤톨만한 푸른 감이 매달려 여름 햇볕을 쬐고 있는 평화롭고도 넉넉한 풍경 속을 느린 걸음으로 걷는 일 자체가 가외의 복처럼 여겨진다.

    영남 내지의 고을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청도 또한 유학(儒學) 문화가 꽃피었던 유림의 땅이다. 따라서 승지마다 옛 서원이 남아 있어서 지난 시대의 사연을 전해준다. 청도읍에서 서쪽으로 멀지 않은 곳, 이서면 서원리에 있는 자계서원부터 찾아보기로 한다.

    뒤로는 야트막한 산을 두르고 앞으로 냇물을 흘리고 있는 서원마을은 먼 데서 바라봐도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이곳 냇물이 청도천인데 예전에는 운계(雲溪)로 불렸다고 한다. 조선 중기의 학자 김일손이 무오사화의 참화를 입었을 때 이 냇물이 사흘 동안이나 핏빛을 띠고 거꾸로 흘렀다 하여 ‘자계(紫溪)’란 이름을 얻었다고 전한다.

    거의 바닥을 드러낸 내를 건너 마을로 들면 이내 이곳 제일 윗자리에 앉은 서원 앞에 이르게 된다. 출입문은 굳게 닫혀 있는데 담 너머의 풍경 또한 적막하기만 하다. 관리인을 만나 찾아온 연유를 밝힌 뒤에야 세월을 묻힌 안쪽 공기를 대면할 수 있다.

    자계서원은 탁영 김일손 선생을 배향하기 위해 중종 13년에 세워졌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폐철됐다가 1924년 중건됐다. 기록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청도에서 태어난 선생은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을 경기도 용인에서 보내고 10대 중반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이후 밀양의 김종직 문하에서 수학한 것으로 돼 있다. 관직에 나선 후에는 주로 언관에 재직하면서 훈구파의 불의·부패를 공격하는 반면 사림파의 중앙정계 진출을 적극 도왔다. 그 결과 연산군 4년 유자광, 이극돈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에서 사초에 넣은 조의제문 등이 문제가 되어 능지처참의 형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 34세.

    서원 안쪽, 2층 누각 형식으로 된 영귀루가 우뚝 서 있고 그 옆으로 아름드리 은행나무 고목 두 그루가 사람의 발길을 끈다. 두 그루 모두 선생이 직접 심어 오늘에 이른다는 안내문이 있다. 은행나무 사이에 있는 그의 문학비에는 성종 20년 4월 그의 나이 26세 때 섬진강에서 지리산을 보며 읊었다는 시 한 수가 적혀 있다.

    푸른 물결 넘실넘실 노 소리 부드러워

    소매에 찬 맑은 바람 가을인 양 서늘하다

    머리 돌려 다시 보니 참으로 아름다워

    흰 구름 자취 없이 두류산을 넘어가네

    문학적 감수성이 넘치면서도 도학적 이데올로기로 무장돼 있던 한 젊은 지식인이 기득 세력과의 싸움에 몸을 던져 장렬히 산화하는 역사의 드라마를 새삼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이곳 자계사원을 찾아온 보람은 있다.

    선암서원 배롱나무

    자계서원과 함께 청도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서원이 있다. 청도에서 운문사 가는 길에 거치게 되는 금천면 동곡의 동창천 물가에 있는 선암서원이 그것이다. 운문산에서 흘러내린 운문천과 단석산에서 발원한 동곡천이 선암 앞에서 합류해 동창천을 이루는데 서원 건물은 이곳 강가 높은 언덕에 앉아 있다.

    이 서원은 삼족당 김대유와 소요당 박하담 두 분을 배향하는데 김대유는 김일손의 조카다. 일찍이 조광조, 조식 등과 친교했으며 무오사화로 작은아버지 김일손이 화를 입었을 때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되기도 했다. 성균관전적, 칠원 현감 등을 지냈다.

    박하담은 중종 때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그 뒤 여러 번 대과에 실패하자 운문산 아래의 눌연에 소요당이란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뒷날 조정에서 그의 학행을 듣고 감역, 사평 등의 직임을 주어 여러 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격식보다는 주변과의 어우러짐을 중시한 건물과 공간 덕으로 여느 서원에서와 같은 긴장감 같은 것을 갖지 않아도 좋다. 특히 담 밖을 나와 마주하는 강변 풍경이 일품이다. 운치 있는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는 가운데 푸른 강줄기가 시원스럽게 발아래로 내려다보인다. 비탈을 내려가 마주하는 아래 위편의 강 풍경도 살갑다. 눈길을 돌리면 멀리 북암산, 수리봉, 운문산, 가지산으로 이어지는 영남 알프스의 스카이라인이 장쾌하다.

    더러 피비린내 풍기는 세파에 휩쓸려 드는 때도 있지만, 더 많은 시간을 경치 좋고 바람 좋은 데 앉아서 술잔을 나누며 세월과 임금을 탓하고 음풍농월을 할 수 있었던 옛 선비들이 부럽게 여겨지는 것도 이런 대목에서다. 때마침 서원 뜰의 늙은 배롱나무들이 붉은 꽃들을 탐스럽게 터뜨리고 있었다.

    청도 8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유호 연지에서도 연꽃 향기뿐만 아니라 옛 선비의 묵향(墨香)을 맡을 수 있다. 대구 수성구 쪽에서 팔조령 터널을 통과한다면 채 1시간도 걸리지 않는 곳이다. 들판 가운데 조성된 인공 연못인데 수면 가득히 연잎이 덮여 있어서 꽃피는 계절이면 장관을 이룬다.

    청도 땅에 고성 이씨의 기반을 세운 모헌공 이육 선생이 전부터 있던 못을 더 깊고 더 넓게 만들어서 연못으로 꾸몄다고 전한다. 이육 선생은 연산군 시대에 무오, 갑자사화를 겪으면서 부친이 부관참시되는 등 가문이 수난을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 유곡리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러나 좀 더 자세한 사정을 살펴보면, 그전부터 이 마을에 살았던 이들은 흥해 최씨들이며 최초의 연못도 이들 최씨 가문에서 조성한 것이었다. 이육 선생이 최 씨의 무남독녀와 혼인해 처가 쪽에 정착함으로써 뒷날 연못의 주인도 고성 이씨로 바뀌었다. 이육의 아들은 앞서 선암서원에서 소개한 박하담의 딸과 혼인했다.

    이렇듯 청도 땅의 몇몇 문화유산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조선 중기 이곳 사회를 지배했던 네 성바지 사족(士族), 즉 김해 김 씨(김일손), 밀양 박씨(박하담), 고성 이씨(이육), 흥해 최씨들이 엮어가는 연비관계들을 짐작할 수 있어서 재미있다.

    연못 가운데 단을 쌓고 기품 있는 집 한 채를 올렸는데 현판에 적힌 이름이 ‘모헌정사’요, 사람들이 쉽게 부르길 ‘군자정’이다. 송나라 때 주돈이가 ‘애련설(愛蓮說)’을 지어 연꽃을 군자로 비유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근래에도 유림들이 정기적으로 이곳에 모여 글을 읽고 시를 짓는다고 하니 온고지신의 한 아름다운 그림처럼 여겨진다.

    명산이 품은 名刹

    큰 산들이 수면에 엎어져 있는 운문호를 지나 마침내 운문사에 이르렀다. 드넓은 자리에 질서정연하게 앉은 절집들이 주는 정갈한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호위하듯 절집을 둘러싼 산들이 빚어내는 호쾌하고 위엄 있는 품새도 예사롭지 않다. “명산이 명찰(名刹)을 품는다”는 말을 새삼 되새길 만하다.

    창건 당시부터 운문사는 화랑들의 심신 수련장이 된 곳으로 유명한데 고려 때는 일연스님이 이곳에 머물면서 ‘삼국유사’ 집필을 시작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잘 알려진 바대로 운문사는 석남사, 동학사 등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비구니 전문 수련 도량이다. 현재도 300명에 가까운 비구니 스님이 이곳 승가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설핏 해가 기울고 있었지만 더위는 가시지 않았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처진 소나무를 구경하고 만세루 마루에서 땀을 식히던 나는 뒤늦게 무슨 깨달음이라도 가진 양 이웃 사람에게 은행나무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무심코 불이문(不二門) 쪽을 가리키던 상대가 갑자기 쿡쿡 웃음을 놓았다. 스님들의 수행 공간에 있는 그 나무는 가을 단풍철에 딱 하루만 일반에게 공개된다는 설명이었다. 그랬구나! 나도 무심히 탄식을 놓았지만 한 편의 시를 통해 알게 된 나무를 내 눈으로 보지 못한다 해서 섭섭한 마음은 없었다.

    비구니 스님들 사는 청도 운문사 뒤뜰 천 년을 살았을 법한 은행나무 있더라

    그늘이 내려앉을 그늘자리에 노란 은행잎들이 쌓이고 있더라

    은행잎들이 지극히 느리게 느리게 내려 제 몸 그늘에 쌓이고 있더라

    오직 한 움직임

    나무는 잎들을 내려놓고 있더라

    (…)

    이 세상 떠날 때 저렇게 숨결이 빠져나갔으면 싶더라

    바람 타지 않고 죽어도 뒤가 순결하게 제 몸 안에다 부려놓고 가고 싶더라

    내 죽을 때 눈 먼저 감고 몸이 무너지는 소릴 다 듣다 가고 싶더라

    -문태준 시 ‘운문사 뒤뜰 은행나무’ 중에서

    최학

    1950년 경북 경산 출생

    고려대 국문과 및 대학원 졸업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창작집 ‘잠시 머무는 땅’ ‘식구들의 세월’ 등

    장편소설 ‘서북풍’ ‘안개울음’ ‘미륵을 기다리며’ ‘화담명월’ 등


    어쩌면 차라리 그 나무를 보지 않음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절간을 돌아 나오는 길에 가졌다. 느리게 나뭇잎을 내려놓는 나무를 보며 갖는 궁극적인 바람 하나. 이승을 하직하는 때 내 마지막 숨결도 저렇게 빠져나갈 수 있었으면. 눈 먼저 감고 몸 무너지는 소릴 들을 수 있으면. 감잎 하나, 은행잎 하나에서 갖는 막막함과 벅참. 이것이 곧 시의 절창으로 옮겨진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