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호

“남의 담벼락에 분칠한 기 뭐 볼 거라꼬…”

21세기 해운대에서 20세기 감천동까지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입력2013-07-23 11: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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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의 담벼락에 분칠한 기 뭐 볼 거라꼬…”

    감천동 주민이 이국풍의 벽화가 그려진 축대 위에서 이불을 털고 있다.

    6월 14일, 남보다 조금 일찍 부산에 갔다. 장마가 시작될 무렵이라 김포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심하게 흔들리며 김해공항으로 들어섰다. 승무원들은 침착했고 아마도 기장 또한 이런 정도의 악천후는 평상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흐린 날씨라서 비행기가 착륙을 위해 고도를 한참이나 낮춘 다음에야 갑자기 활주로가 나타났다. 내내 시커먼 구름 속에 있다가 일순간 세상 밖으로 나온 비행기는 낙동강 하류와 인근의 화물창고 지대를 스치나 싶더니 곧 활주로에 안착했다.

    오후의 김해 하늘은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선지 낯선 풍경이 보였다. 몇 년 전에는 도착장에서 빠져나온 후 버스 정류장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거대한 광고판을 바라보며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는데, 언제 들어섰는지 허공을 가르는 새로운 시설물이 보였다. 부산을 자주 오가는 사람이나 이 일대를 삶의 거점으로 삼은 이에게는 어느덧 익숙한 풍경이겠지만 오랜만에 찾은 자에게는 낯설었다.

    급변하는 스카이라인

    이럴 때 나는 재빨리 이 새로운 인공 구조물에 대해 검색해본다. 부산 사상에서 김해국제공항을 거쳐 김해 삼계동까지 23.8㎞ 구간을 잇는 부산-김해 경전철이었다. 2006년 4월 착공해 5년여 만인 2011년 4월 완공을 보고 그 후 안전 시스템 보완을 거쳐 그해 9월 개통됐다. 총 사업비 1조3000억 원, 모두 21개의 정거장으로 구성됐으며 평속 38㎞, 2량 1편성 50량, 1일 424회 왕복 운행한다.

    어느 문화기관의 조직역량 제고를 위한 토론회에 참가한 적이 있다. 그때 누군가가 그랬다. 어떤 조직이든 한번 만들어지면 특단의 조치가 없는 한 그 조직은 흡사 하나의 독립 인격체처럼 자기보호 본능을 가지고 움직인다고. 내부의 철저한 자기반성이나 외부의 강력한 의지가 아니고서는 그 자기보호 본능을 통제할 방법은 없다고. 과연 그 문화기관은 그래 보였다. 시민의 세금으로 운영된다는 점은 그 조직이 자기 갱신을 하지 않고 강고한 ‘철밥통’이 돼버린 이유였다.



    인간의 편리와 의지에 의해 설치된 저 인공 구조물도 그렇다. 벌써부터 김해공항 일대의 시선과 동선과 관계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이 구조물을 두고 부산 전역에서 홍역을 치르다시피 한 논란이 있었다. 경전철이 지나는 곳의 지역성과 역사성과 경제성에 대한 의견도 엇갈렸다.

    그런데 이제 겨우 도착해 담배 한 대 물면서 바라본 저 구조물은 앞으로 1박 2일 동안 내가 보게 될 부산의 놀라운 급변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다. 동아시아 최대 항구 가운데 하나인 부산이니만큼 변화는 객관 세계의 강력한 요구이기도 하겠으나, 이에 적극 대응한 부산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 이제 내가 하룻밤과 낮 사이에 보게 될 부산은 몇 년의 기억에 저장된 부산과 확연히 달랐다.

    금요일 오후의 부산 시내는 꽉 막혔다.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는 간선도로는 흡사 같은 순례 목적지를 향해 일제히 몰려든 고행자들의 행렬과 같았다. 한동안 서(西)부산의 막힌 길을 달리던 리무진이 광안대교에 올라서더니, 아뿔싸, 더 막히기 시작했다. 2003년 1월 6일 개통 이후 이 대교는 누적 통행 2억6000만 대의 자동차가 오간, 수영구 남천동과 해운대구 우동 사이 7.42㎞를 연결하는 부산의 대동맥이 됐다.

    두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항만물류도시의 수많은 컨테이너가 광안대교를 이용하고 있다는 경제적 측면과 부산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로 ‘다이아몬드 브리지’ ‘부산세계불꽃축제’ ‘부산바다하프마라톤’ 등이 이 대교와 연관된 행사라는 문화적 측면이다. 장차 광안대교를 시작으로 북항대교, 남항대교, 천마산터널, 을숙도대교, 신호대교, 가덕대교, 거가대교 등이 연계되는 총 52㎞의 ‘브리지 오브 부산(Bridge of BUSAN)’ 프로젝트가 완성된다.

    나는 그 다리 위에서 좌우로 고개를 자주 돌리며 그 장관을 바라봤다. 좀처럼 정체가 풀리지 않았기에 오히려 광안대교 위에서 부산의 급변을 웅변하는 거대한 스펙터클을 완상할 수 있었다. 수영만과 용호만 일대의 스카이라인이 다가왔다가 물러서고 센텀시티와 마린시티가 아득했다가 아찔해진 다음, 나는 해운대 바닷가에 도착했다.

    극동호텔의 아련한 추억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바닷가의 공기를 잠시 뒤로하고 우선 숙소에 들어가 샤워를 한 후 차를 마시고 나와 담배를 다시 한 대 피웠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백사장이 아니라 거대한 건물들이었다.

    저 멀리 부산 중심부의 초고층 빌딩이 광안리 해수욕장을 압도하고 해운대 해수욕장을 굽어보며 기립해 있었다. 흡사 SF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흐린 날씨에 시곗바늘마저 어느덧 7시를 넘어서자 거대한 마천루의 조명은 하늘 아래 떠 있는 라퓨타였다. 광막하고 고요한 밤하늘 위로 떠오른 천공(天空)의 성(城) 라퓨타, 그런 오랜 이야기가 있었다.

    영국의 계몽주의 사상가이자 소설가인 조너선 스위프트는 ‘걸리버 여행기’에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지름 7.24km의 거대한 암석 라퓨타를 상상했거니와, 일본의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는 천공을 날아다니는 성과 그곳으로 운항하며 전투와 모험을 펼치는 비행석을 상상했거니와 그것은 모두 사람의 관념에 의해 가상의 이야기와 이미지로 구축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바라보는 부산의 밤하늘을 압도하는 스카이라인은 밤이 깊을수록 그야말로 인간이 세웠으나 인간을 압도하는,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이는 거대한 천공의 성으로 저 항구도시를 상징하고 있다.

    가까이 눈을 돌리면 하룻밤의 내 숙소가 된 팔레드시즈 역시 그와 같은 형상이다. 저 멀리 치솟아 있는 마천루의 스카이라인이 동백섬을 따라 완만히 흐르다가 다시 파라다이스호텔을 거치면서 급상승하기 시작해 팔레드시즈의 웅장함으로 마무리된다. 그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아직 마천루의 공습을 받지는 않았으나 곧 그렇게 될 운명이라고 하는 해운대 달맞이언덕이 완만한 곡선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다.

    팔레드시즈는 해운대해수욕장 백사장과 바로 잇닿은 곳에 위치한 곳으로 동백섬 지나 APEC 정상회의장이었던 누리마루까지 걸어서 산책할 수 있는 입지, 그러니까 한마디로 해운대 한복판에 있다. 바로 옆의 파라다이스호텔과 동백섬 쪽의 웨스틴조선이 최고급을 지향한다면 이 팔레드시즈는 거대한 풍채와 현대식 외관과 달리 해운대를 찾는 일반 시민들의 소박한 하룻밤과 연관돼 있다. 1만3665㎡ 부지에 연면적 10만1632㎡, 지하 3층 지상 17층, 4개 동에 331실 규모다. 2008년 우수산업 디자인 ‘굿 디자인’에 선정될 만큼 그 외관이 압도적이다.

    여느 고급 호텔의 특장과 대중적인 콘도미니엄의 장점이 일정하게 결합해 있다. 이를테면 팔레드시즈의 1, 2층은 투숙객이든 그렇지 않든 아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각종 식당, 카페, 편의점, 와인바 등으로 구성돼 있다. 최고급의 근사한 호텔이 보이지 않는 가상의 유리벽을 치고 있다면 팔레드시즈는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이점을 갖고 있다. 게다가 바다로 향한, 그것도 바다에 매우 가까이 면한 팔레드시즈의 1층 카페들은 비록 단면이기는 하지만 흡사 유럽의 카페 거리를 연상케 한다. 바다와 카페의 거리가 숨 한 번 돌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남의 담벼락에 분칠한 기 뭐 볼 거라꼬…”

    해운대 ‘마천루 숲’의 낮 풍경과 밤 풍경 .

    해운대의 밤과 낮

    이 거대한 공간 역시 20세기 후반, 한국 현대사의 기억을 담고 있다. 팔레드시즈가 들어선 곳에 원래는 극동호텔이 있었다. 1966년 11월 7일 특급호텔로 개장했다. 지상 7층 115개의 객실로 개장 당시 서울의 워커힐 다음으로 규모가 컸다. 박정희 대통령이 개관식에 참석할 정도였다. 외국 귀빈이 부산을 찾았을 때 우선적으로 선택된 최고의 숙박시설이었다. 개관 당시의 자료 사진을 보면 해운대 백사장은 지금보다 훨씬 드넓었다. 동백섬 방향이나 달맞이언덕 쪽이나 비포장길이 많았고, 특히 달맞이 언덕 너머로는 헐벗은 야산 사이로 골프장이 널찍하게 있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형성된 해변의 낮은 건물들, 그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호텔, 그것이 극동호텔이었다.

    1970년대에는 부산으로 신혼여행을 가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들이 선망하던 숙소가 극동호텔이었다. 1979년 조선비치호텔이 문을 열고 뒤이어 파라다이스호텔 등 특급호텔이 생기면서 기운이 빠지기 시작한 극동호텔은 이윽고 1989년 문을 닫았으며 한동안 해운대의 흉물로 불리며 쇠잔했다가 마침내 완전 철거된 후 그 자리에 팔레드시즈가 들어섰다. 최근 해운대 수영만 매립지와 해운대 해수욕장, 센텀시티 일대의 초고층 사업이 잇따라 가시화하면서 차차 87층과 108층짜리 월드비즈니스센터(WBCB)도 들어설 예정이다. 그때가 되면 지금은 제법 위풍당당한 팔레드시즈 정도는 그 마천루들에 압도당할 것이다.

    밤의 해변과 팔레드시즈를 두 번 세 번 번갈아 바라본다. 동백섬에서 달맞이언덕으로 이어지는 길을 오가면서 이 상전벽해를 생각한다. 현대 도시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일 것이다. 이 부산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이 해운대의 운명이었을 것이다. 백사장은 점점 줄어들고 고층의 행렬은 더욱 아득해진다.

    나는 바닷바람을 쐬러 산책 나온 사람들 사이에 끼어 걷기도 하고 가만히 멈춰 서보기도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마음속에 있는 해운대를 상상하며 이곳을 찾았다가 상전벽해가 된 경관에 매료당한 듯 연신 사진을 찍는다. 스마트폰 만능 시대라 사람들은 산책로에 잠시 서서 스마트폰의 셔터 아이콘을 클릭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해운대 백사장과 바다를 배경으로 찍는 게 아니라 저 멀리 치솟은 마천루나 밤의 조명으로 더욱 압도적인 풍경을 보여주는 팔레드시즈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렇게 멈춰 서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 사이로 숙소에서 나온 관광객이 아니라 이 근처에서 살고 있을 법한 가벼운 트레이닝복 차림을 한 사람들이 달리기를 한다. 그중 절반은 외국 사람들이다. 지금 해운대는 팔레드시즈 같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인공 경관을 주축으로 한 국제도시가 되고 있다.

    백사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밤바다는 여전하고 파도 소리도 여전하고 어느 시절에나 있을 법한 때 이른 청춘들의 환호작약도 여전했다. 젊은 남자 몇몇은 이제 막 개장한 해수욕장에 함부로 뛰어들어갔다가 오들오들 떨면서, 그러나 연신 그 나이에 맞는 과장된 웃음을 터뜨리며 나온다. 동행인 듯한 젊은 여자들이 꺄르르르르 팝콘 터지듯 웃어준다. 그리고 어디론가 무작정 달려간다. 그들은 꽃보다 아름답고 파도보다 강렬하다. 그러나 그들이 달려가고 있는 백사장은 과거의 해운대에 비해 비좁았다.

    팔레드시즈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나서, 짐을 챙겨 1층으로 내려와 늦은 아침을 먹으면서 신문을 봤다. 탈주범 검거 소식이 눈에 들어왔다. 5월 20일, 전주지검 남원지청에서 수갑을 찬 채 달아났던 탈주범 이대우(46)가 6월 14일 오후 6시 25분경, 부산 해운대역 인근에서 경찰에 붙잡혔다는 보도였다. 6월 14일 오후 6시? 그렇다면 내가 어제 이곳 해운대 리무진 정류장에 내려 팔레드시즈를 향해 터벅터벅 걸을 무렵에 탈주범 이대우는 그리 멀지 않은 해운대 버스터미널에서 체포되고 있었던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대여섯 명의 경찰을 압도했다는 괴력의 소유자 이대우는 어떤 저항 의사도 없이 검거됐다고 한다. 아마도 지쳤을 것이다. 무뢰한에 탈주범인 그를 두둔할 생각은 없으나 어쨌든 그 역시 한 달 가까이 도망 다니면서 지쳤을 것이다. 검거 직후 해운대경찰서로 호송된 이대우는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해운대는 사람이 많아 숨기도 좋고, 머리가 복잡해 생각을 좀 하기 위해 왔다”고 진술했다. 지쳤던 것이다.

    감천문화마을? 감천동!

    나는 부산의 새것 말고 오래된 것을 찾아보기로 했다. 우선 기차를 타기로 했다. 택시나 리무진버스나 지하철 대신 걸어서 해운대 기차역으로 갔다. 팔각정 모양의 기차 역사는 가까운 시일 내에 철거될 예정이다. 연말이면 동해남부선 복선전철화사업으로 해운대 우동과 기장을 잇는 전철 길이 열린다. 지금의 해운대역은 신시가지 옆 국군부산병원 앞으로 옮겨간다.

    역사에 들어서니 풍경은 금세 20세기 중엽으로 되돌아갔고, 표를 끊어서 승차장으로 나가보니 한반도 철길의 우측 남방한계선을 1세기 가까이 지탱해온 선로가 보였다. 부산진구와 경북 포항을 잇는 철도선으로 총 길이 147.8km이며 1918년 10월 31일 개통됐다. 1935년 12월 16일에는 경주까지 철길이 나아갔다.

    토요일 점심 무렵, 동해안을 끼고 내려온 기차는 해운대역에 수많은 젊은이를 내려놓고 종착역이 되는 부전역으로 들어갔다. 나는 차창에 바짝 붙어 21세기의 마천루 사이로 지나가는 20세기 초엽의 선로를 상상했다. 이런 여정은 이 나라 40대 남성들에게 애틋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저 산업화 시절 대도시로 몰려가는 행렬이 떠오르는가. 우리는 그렇게 서울로, 대처로 거처를 옮겼다.

    부전역에서 버스를 타고 자갈치시장에 갔다가 내친김에 영화의 거리며 국제시장이며 보수동 헌책방까지 들렀다가 이윽고 탈진해 택시를 잡았다. 이곳에서 택시를 잡으면서 김해공항이나 해운대나 부산대 같은 곳을 주문하지 않고 감천동이라고 말하는 것은 미안한 일이다. 버스로도 10분이면 올라가는 언덕 위 동네인데 한동안 손님을 기다렸던 택시라면 못내 아쉬울 것이다.

    “에이, 그거 마 신경 쓰지 마이소. 그기 그런다고 몇 푼 더 벌고, 또 아이라꼬 못 벌고 그리 생각하면 택시 우예 함니꺼. 기본요금으로 왔다리 갔다리 하능 것도 괘아느께네 신경 쓰지 마이소.”

    내가 미안하다는 표시를 하자 기사는 그렇게 답했다.

    “감천동, 좋지예. 실제로 그 동네는 참으로 몬사는 동네고 한 많은 동넨데, 요즘이사 그것도 구경이 되고 시에서 지원도 하고 손님처럼 타지에서 많이들 구경 오고 해서, 모를 일 아닙니꺼, 사람 사는 거.”

    내가 가는 감천동의 감천(甘川)은 옛 이름 감내(甘內)에서 비롯했다. 감(甘)은 ‘검’에서 유래했고 신(神)을 뜻한다고도 한다. 천(川)은 물론 물 흐르는 ‘내’를 한자로 적은 것이다. 예부터 물이 좋아 감천이라고 했다고 한다. 오래전에는 물이 좋아서 그렇게 불렸을지 몰라도 20세기의 이 동네는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의 마지막 생존 터였다. 1918년 조철제가 증산사상에 기초해 세운 태극도의 신도 4000여 명이 이 일대의 고개 주변에 모여 집단 거주지를 만들었고 6·25전쟁 때 몰려든 피난민이 그에 또 더해져서 부산의 대표적인 달동네가 됐다. 지금은 ‘한국의 산토리니’로 불리고 있다.

    산토리니는 에게 해 남쪽 그리스령 키클라데스 제도 중에서도 가장 남쪽에 있는 섬이다. 그 섬의 절벽 위에 마을이 있다. 인근 미코노스 섬과 함께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하얀 벽과 푸른 지붕의 집들이 ‘관광엽서 사진’의 형상으로 모여 있다. 스포츠 음료를 비롯해 수많은 광고의 배경 마을이 되면서 어느덧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관광지로도 떠올랐다.

    “남의 담벼락에 분칠한 기 뭐 볼 거라꼬…”

    자갈치 시장.

    그런데 그런 외경을 가진 마을이 부산에도 있다 해 몇 해 전부터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찾기 시작하다가 2013년 1분기에만 무려 10만여 명의 관광객이 몰려드는 명소가 됐다. 지난해 9만8383명이 다녀갔는데 올해는 1분기 안에 그 숫자를 상회해버린 것이다.

    추억 여행과 타인의 삶

    그러나 지금 감천문화마을은 진통을 앓고 있다. 평일에도 쉼 없이 몰려드는 관광객 탓에 사생활 보호가 제대로 되지 않는 점도 그렇고, 전국적 명소가 됐지만 식당, 카페, 숙소 등을 제대로 준비해놓을 만한 자금, 여건, 행정 지원 등이 부족해 관광객들은 그저 값싼 음료수나 기념품을 사갈 뿐 실제 소비는 송도, 남포동, 자갈치시장 쪽에서 이뤄진다. 관광진흥법 시행령에 의해 도시에서는 내국인을 상대로 민박업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마을 입구에 감정초등학교가 있어 모텔이 들어서는 것도 어렵다. 평일 평균 500명, 주말 평균 1000명 넘게 찾아오는데, 그들은 단지 저마다 들고 온 사진기나 스마트폰으로 연신 ‘가상의 추억여행 놀이’를 즐기다 빠져나간다.

    마을 입구에서 안내를 맡고 있는 중년의 자원봉사자는 “관광객이 많아지면서 불편한 게 많은데, 경기는 없고 해서 불편하다꼬 이사가는 사람도 없지는 않지예”라고 말한다. 실제로 2010년(12월 31일 기준) 1만394명이던 감천2동 인구는 2011년 1만110명, 2012년 9677명으로 줄었다.

    이곳뿐이 아니다. 서울 이화동 낙산공원 인근 ‘벽화마을’, 서울 염창동 ‘자연 속의 하모니’, 강원도 철원군 월하리 ‘달이 머무르는 마을’, 경기 광명시 철산4동 ‘벽화마을’ 등 미술가들이 허름한 동네의 담벼락에 선의로 그린 그림들이 보전이나 사후 수습이 따르지 않아 흉물이 될 처지에 있다. ‘벽화마을’은 2006년부터 문화관광체육부가 주최, 공공미술추진위원회 주관으로 진행된 ‘공공미술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07년까지 예산 27억3000만 원을 들여 전국 31곳에서 진행된 문화 사업이다. 더불어 ‘마을미술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전국 52개 지역에 조성된 ‘마을 그림 사업’도 있다.

    이 중 일부가 관리 기금이나 인력 부족, 주민들의 사생활 침해 문제 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나마 감천문화마을은 구청에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관리하고 있다. 2009년 ‘꿈을 꾸는 부산의 마추픽추’, 2010년 콘텐츠융합형 관광협력사업 ‘미로미로 골목길’ 프로젝트, 2012년 마을미술 프로젝트 ‘마추픽추 골목길’‘산복도로 르네상스’ 등이 꾸준히 진행돼왔다.

    하지만 동시에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수전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말한, 그러니까 좀 더 안전하고 안락하고 풍요롭고 편안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재난, 전쟁, 사고, 기근 등)을 다룬 뉴스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일갈했던 점을 기억해야 한다.

    감천문화마을, 아니 감천동에서 오래 살아온 노인들에게 한두 마디 물어보았다. 어떤 노인은 말한다. “화장실도 없는 집구석도 많은데 뭐 볼 게 있다고 오노?” 어떤 노인은 말한다. “날은 더운데 집 밖에 나와 앉아 있지도 몬하지. 오가는 사람마다 사진기로 찍어대는데, 내가 뭐 동물원 원숭이가?” 또 한 노인은 말한다. “돈이라도 한푼 내놓든가. 죄다 저 아래로 가서 먹고 자고 할 끼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작은 기대가 있을 것이다. 잃어버린 어떤 추억이 이 마을에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골목은 다들 어디로 갔는가. 밤늦도록 술래잡기하던 조무래기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아이들 이름을 외쳐 부르며 저녁밥을 짓던 어머니들은 또 어디로 갔는가. 동네마다 심술궂은 할아버지 한 분씩은 꼭 있었다. 그런 어른들이 “예끼놈, 저 공터 가서 놀지 못해!” 하고 소리치면 아이들은 짐짓 무서워하면서도 낄낄 웃어대며 공터로 뛰어갔다. 그 노인이며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가난이 여전히 현실인 곳

    오늘날의 아파트 단지와 초고층 빌딩 행렬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런 추억 때문에 사람들은 그러한 추억이 여전히 살아 있으리라는 상상으로 가난한 마을 감천동을 찾는다. 요즘 유행하는 ‘힐링 여행’ 치고는 소박한 것일 게다. 경치 좋은 곳에서 비싼 돈을 들여서 코스 따라 과제를 이행하는 힐링과는 전혀 다른, 애틋한 힐링이다. 그러나 ‘가난’을 추억으로 여길 수 있는 사람들에 한해 그것이 가능하다. 그들이 찾은 산동네의 가난은 20세기의 추억이 아니라 21세기의 현실이다.

    나는 한동안 감천문화마을, 아니 산동네 감천동 입구에 서 있다가 택시를 탔다. 바삐 움직이지 않으면 부산역에 맞춰둔 기차를 놓칠 수도 있었다. 택시에 오르자 기사는 거침없이 복잡한 고갯길을 내달렸다. 기사는 굳이 대답을 원하지 않는 투로 말을 했다.

    “하이고, 남의 담벼락에 분칠해놓은 거 보러 오셨어예? 그기 뭐 볼 거라꼬. 우예튼가예? 볼 만하든교? 읍는 사람 담벼락에 분칠해놓은기 뭐 볼 거라꼬….”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복잡한 고갯길은 어느덧 끝이 났고 대로에 들어서자 택시는 부산역을 향해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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