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호

‘설국열차’ 봉준호 리더십 탐구

스스로 날게 하는 경청과 설득의 힘

  • 이형석 |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입력2013-09-24 17: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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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에 이어 최근 ‘설국열차’까지 대박을 터뜨리면서 봉준호는 명실 공히 최고의 티켓파워를 지닌 감독임을 입증했다. 그와 함께 작업한 국내외 배우들과 스태프는 그를 향해 엄지손가락 치켜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든 그들로부터 기대를 넘어서는 연기와 영상을 뽑아내는 리더십 때문이다.
    ‘설국열차’ 봉준호 리더십 탐구
    “봉준호 감독은 한마디로 ‘능구렁이 리더’다. 절대 자신의 주장을 먼저 내세우지 않고 상대의 말부터 듣는다. 상대의 의견과 상황을 배려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낸다.” -배우 송강호

    “영화 ‘설국열차’ 속 인물에 빗대자면 꼬리칸의 가장 연장자인 길리엄을 닮았다. 고요하고 침착하지만 세상의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고, 그래서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갖고 있다.” -할리우드 배우 크리스 에반스

    “봉준호 감독의 첫 작품(‘플란다스의 개’)만 빼고 다 봤고 다 좋아한다. 스코틀랜드에 있는 우리 집에 봉 감독을 초대했을 때 데뷔작을 보여달라고 강아지처럼 졸라댔다. 봉 감독이 ‘강아지 도착증이 있는 당신들에겐 도저히 못 보여주겠다’고 말해 웃었다. 내가 집에서 개를 네 마리나 키우고 있고, 우리 가족 모두 개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영국 배우 틸다 스윈튼

    “봉 감독님은 까마득하게 어린(23세 차) 내게 마음을 완전히 열어놓고 소통한다. 거리낌 없이 묻고 상의할 때가 적지 않다. ‘설국열차’에는 내 아이디어로 애초의 설정이 바뀐 장면이 몇 군데 있다.” -고아성

    ‘賢者 봉테일’



    손자병법으로 치자면, 봉준호 감독은 지혜로운 장수, 곧 ‘지장’(智將)이다. ‘설국열차’의 주연 크리스 에반스는 봉준호 감독을 “촬영 현장의 모든 답을 갖고 있는 현자”라고 표현했다. 첫 흥행작 ‘살인의 추억’을 찍을 때부터 봉 감독은 ‘봉테일’로 불렸다. 봉준호와 디테일(detail)을 합친 말로, 영화 작업의 사소한 부분에까지 완벽한 계획을 세워둔다는 의미다.

    그뿐만 아니다. 기자들 사이에서 봉준호는 박찬욱과 함께 ‘모든 질문에 친절하고 현명한 답과 주석을 달아주는 인터뷰이’로 정평이 나 있다. 두 사람 모두 우문에 현답을 내놓지만 답변의 색깔은 각기 다르다. ‘설국열차’의 제작자요, 봉준호의 ‘영화적 동지’인 박찬욱은 다소 냉소적이고 현학적인 답을 내놓는 반면 봉준호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답변으로 마무리하는 타입이다.

    지적 호기심이 충만한 봉준호는 국내 영화인 가운데 최고의 ‘달변가’로 꼽힌다. 언변과 지식이 카리스마의 원천이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그를 봤다면, 현대적 영화 시스템이 부여한 감독이라는 합리적·법적 권위와 함께 개인의 능력에서 비롯된 카리스마적 권위를 가진 지도자로 파악했을 것이다. 또 계몽주의 시대 정치철학자 마키아벨리라면 그를 ‘여우같은 지혜와 사자의 용맹함을 갖춘 이상적 군주’상으로 분류했을 것이다.

    봉준호는 영화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촬영을 거쳐 후반작업을 마칠 때까지 모든 스태프와 배우를 지적인 카리스마로 통솔해 자발적 동의를 받아낸다. 모든 답을 알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는다. ‘서유기’의 삼장법사처럼 현명하고, ‘삼국지’의 제갈공명처럼 박학다식하면서도, 말을 앞세우기보단 상대의 이야기를 먼저 경청하는 유비의 귀를 지녔다. ‘괴물’에 출연할 때 중학생이던 고아성을 ‘설국열차’에서 다시 만나자 봉준호는 그에게 끊임없이 묻고 들었다. 영화에서 제법 중요한 설정들이 고아성의 머리에서 나왔다.

    고아성만 아이디어를 제공한 게 아니다. 지적이고 개성 강한 미모의 영국 배우 틸다 스윈튼은 ‘설국열차’에서 뻐드렁니 모양의 틀니를 끼고 우스꽝스럽지만 잔인하고 독선적인 지도자 역을 맡았다. 기존의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와 사뭇 다른 파격적인 연기를 펼쳤는데, 이 설정은 스윈튼의 아이디어다.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슈퍼히어로 영화 ‘캡틴 아메리카’와 ‘어벤저스’에서 주연한 크리스 에반스는 ‘설국열차’에서 헐벗고 굶주린 반란군 지도자로 기꺼이 변신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봉준호 감독이 동료들에게 영감을 주고 도전의욕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한다. 이것이 봉준호가 가진 경청과 설득의 힘이다.

    그에겐 여느 감독이나 지도자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강점이 있다. 영화를 통해 살짝 내비치는 빼어난 유머 감각이다. 간혹 짓궂어 보일 만큼 손오공 같은 장난기 가득하고 활력이 넘친다. 소주를 걸치고 장난기 어린 눈으로 능청스럽게 웃으며 고교생이나 쓸 법한 속어까지 동원해 좌중을 배꼽 잡게 만드는 술자리의 봉준호를 마주한다면 카리스마 넘치는 감독이 아니라 천진한 소년을 대하는 기분이 들 것이다. 그 못지않게 재미나고 장난기 많은 스윈튼과 한눈에 의기투합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의외의 면모 때문이리라.

    봉준호 리더십의 원천은 이처럼 제갈공명의 머리, 유비의 큰 귀, 조조의 입, 손오공의 장난기에서 유추해낼 수 있다.

    ‘설국열차’ 봉준호 리더십 탐구

    봉준호 감독이 만든 대표적인 흥행작 ‘설국열차’ ‘괴물’ ‘마더’ ‘살인의 추억’(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



    知的 카리스마

    연세대 사회학과를 나온 봉준호 감독은 박학다식하고 용의주도하다는 평을 듣는다. 신문과 뉴스를 장식하는 사회·정치 이슈를 꿰고 있고, 그에 관한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살인의 추억’ 제작자인 차승재 씨는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감독을 모차르트, 봉준호 감독을 살리에르에 비유한 적이 있다. 봉 감독의 지적 호기심과 열정을 강조한 말이다.

    ‘살인의 추억’과 ‘설국열차’의 소재도 지적인 모험을 통해 얻었다. 대학로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다 ‘살인의 추억’ 원작인 연극 ‘날 보러 와요’를 만났고, 홍익대 앞 만화방을 들락거리다 ‘설국열차’ 원작인 동명의 프랑스 만화를 접했다.

    그는 영화 소재에 관한 취재도 모든 궁금증이 해소될 때까지 치밀하게 하지만, 카메라의 기종부터 촬영기법까지 영화의 모든 영역에 걸쳐 해당 분야 전문가를 능가하는 지식을 갖췄다. 만화를 읽고 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그리기도 한다. 이러한 재주를 활용해 영화의 모든 장면과 세트 디자인을 한 컷 한 컷 그려 촬영하는데, 그것이 완성본과 큰 차이가 없다.

    촬영 역시 일정을 치밀하게 계산해 미리 짠 계획표대로 오차 없이 진행한다. 한국에서든 할리우드에서든 이 정도의 용의주도함은 찾아보기 어렵다. 지식과 경험에서 우러나온 용의주도함은 동료 배우와 스태프들이 그에게 보내는 신뢰와 자발적 동의의 원천이자 그가 촬영장을 지배하는 카리스마의 동력이다. 크리스 에반스는 이렇게 말했다.

    “‘설국열차’는 매우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놀라운 배우들, 놀라운 감독과 함께했다. 촬영 방식도 독보적이었다. 보통은 마스터숏(전체를 보여주는 장면)을 먼저 찍고 자기와 상대 방향에서 각기 다시 촬영한 후 편집실에서 자르고 이어 붙인다. 그런데 봉 감독은 이미 머릿속에서 편집이 끝나 있다. 스토리보드(콘티)가 곧 편집본이다. 예를 들면 집을 짓는데 목수가 ‘못이 한 봉지 필요하다’고 하지 않고 ‘못 53개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그의 비전에 완전히 복종했다.”

    ‘설국열차’의 최초 설계 도안 역시 봉 감독의 작품이다. 그는 기차가 구동하는 시뮬레이션 도면을 직접 설계했으며 이것을 해외 특수효과 전문팀이 실물로 구현했다. 한 칸의 길이가 최소 20~25m에 달하는 기차 4량이 필요하다는 전제 아래 너비가 100m를 넘는 체코의 촬영 스튜디오를 섭외한 것도 봉 감독의 계획이었다.    

    봉 감독은 ‘살인의 추억’을 찍기 위해 세상 모든 연쇄살인의 역사를 탐독했던 것처럼, 이번 영화에선 혁명과 계급의 사회사적 의미를 훑었다. 그에게 영화에 대해 물어본다면 꼬리칸 사람들의 유일한 식량인 양갱 모양의 단백질 블록 같은 소품의 의미는 물론, 영화에 나오지 않는 인물의 과거사까지 들을 수 있다. 그런 식으로 그는 배우와 스태프에게 자기 발상에 대한 논리적이고 서사적인 맥락을 완벽하게 설명한다. 아마도 타고났을 법한 이런 달변은 그의 지적인 카리스마를 배가하는 힘이 됐으리라.

    ‘큰 귀’를 열어놓다

    ‘큰 귀’를 갖지 못한 ‘큰 머리’가 어떻게 실패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영화를 찍다 제작자, 배우와의 소통에 실패해 도중하차한 어느 ‘명감독’의 경우다. 그와 일한 배우의 전언에 따르면, 감독과 제작자가 영화 기획과 촬영 때부터 줄곧 갈등을 빚었다. 여기까지는 영화계에서 종종 벌어지는 제작 과정의 산고(産苦)쯤으로 이해할 만하지만, 결국 두 사람은 등을 돌렸고 감독은 영화에서 손을 뗐다. 문제는 감독이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할 배우들에게까지 귀와 입을 굳게 닫았다는 것.

    “우리야 감독 때문에 출연을 결정했고 그의 입장을 지지할 준비가 돼 있지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말을 해줘야 알 수 있을 것 아닌가. 어떻게 연출할 건지, 어떤 내용으로 싸우고 있는지 우리에게도 전혀 말하지 않았다.”

    이와 달리 봉준호는 귀를 늘 열어놓는다. 꼬리칸, 검역칸, 주방칸, 정원칸, 수족관칸을 거쳐 머리칸까지 설국열차를 구성하는 각 칸을 설계하던 중 고아성에게 불현듯 물었다.

    “또 어떤 칸이 있으면 좋을까?”

    고아성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몸에 줄자를 대고 의상을 재단하는 칸이 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이 영화에 머리칸에서 내려온 관료가 꼬리칸의 아이들을 불러 세워 줄자로 키를 잰 뒤 앞칸으로 색출해가는 장면이 있다. 영화의 마지막 복선이 되는 중요한 설정이다. 고아성은 ‘사람 몸을 줄자로 잰다’는 콘셉트에 맞춰 모티프를 중간에 다시 한번 시각화하되, 이번에는 “가로로 재면 좋겠다”고 했다. 이 제안은 영화에 그대로 구현됐다.

    또 있다. 열차 안에서 태어난 ‘요나’(고아성 분)는 원래 한국인인 아버지(송강호)와 달리 여러 나라 말을 할 줄 아는 캐릭터였지만, 감독은 이를 고집하지 않고 “뭘 해도 어설픈 아이일 것 같다”는 고아성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극 중 고아성의 한국어가 붕 떠 있는 느낌을 주는 이유다. 요나의 머리도 단발로 설정돼 있었지만 고아성이 “‘괴물’과 똑같은 헤어스타일이다. 짧은 머리에 내내 후드를 쓰고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제안한 뒤 바뀌었다.

    ‘설국열차’ 봉준호 리더십 탐구


    봉 감독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의견이나 결과가 나와도 배우를 먼저 배려한다. 오랜 동지인 송강호에게도 마찬가지다.

    “10여 년 동안 봉 감독과 작업하다보니 늘 같이 한다는 느낌이 든다. 나보다 두 살 어리지만 친구 같고 든든한 동지로 느껴진다. 봉 감독이 내게 ‘설국열차’에선 살을 많이 찌워서 곰 같은 느낌으로 등장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런데 체코 촬영 현장에선 오히려 살이 빠져버렸다. 그랬더니 봉 감독은 그게 또 어울린다고 했다.”

    틸다 스윈튼이 맡은 ‘메이슨 총리’는 원래 남자였다. 영화 ‘올랜도’와 연극 ‘맨투맨’에서 남자 역할을 한 경력을 염두에 두고 그를 캐스팅한 것이다. 하지만 봉 감독은 스윈튼과의 논의 끝에 생각을 바꿨다.

    “봉 감독이 처음 제안한 역은 정신이 온건한 남자였다. 내가 출연을 결정한 뒤에도 대본에서 ‘남자’라는 표현을 바꾸지 않았다. 봉 감독이 스코틀랜드에 있는 우리 집에 왔을 때 들창코 분장을 해보고 싶다고 했더니 그도 좋아했다. 생선 파이를 오븐에 넣어놓고 캐릭터에 대해 얘기했는데, 파이가 다 됐을 때 내 안에 메이슨이란 인물이 창조됐죠. 2시간 만에 뚝딱 만들어진 인물이었다.”

    그래서 크리스 에반스는 봉 감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분명히 소통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어떤 방향으로 갈지를 잘 전달했고 그러면서 신뢰가 쌓였다. 배우는 늘 새로운 시도를 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싶어 하지만, 일단 연기를 한 뒤에는 감독에게 그걸 온전히 넘겨주기 때문에 감독을 믿지 못하면 새로운 시도를 하기 어렵다.”

    송강호가 말하는 ‘능구렁이 리더십’의 바탕은 다름아닌 경청과 설득의 힘이다.

    “피곤한 스타일이라 좋다”

    동료와 부하가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하려면 신뢰와 배려만으론 부족하다. 최선을 다하는 수준을 넘어 전에 없던 창의성과 도전정신을 발휘하게 하는 데는 영감과 동기가 필요하다. 봉 감독의 영화가 함께 일하는 이들에게까지 성취감을 안기는 비결이다. 송강호는 봉 감독으로부터 늘 새로운 자극과 영감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는 매번 나를 당황스럽게 한다. 어떤 식으로든 배우를 혼돈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어버린다. 그러니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배우로서 늘 머리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어야 한다. 봉 감독과 작업하면 뇌가 계속 활동하니 치매 걸릴 일은 없을 거다. 피곤한 스타일이지만, 그래서 좋다.”

    한류 스타 원빈이 군 제대 후 처음 선택한 작품은 봉준호의 ‘마더’였다. 약간 모자라 보이지만, 알 수 없는 괴물의 심연을 가진 청년. 이전의 원빈에겐 감히 요구할 수도, 기대하기도 어려운 연기였다. 봉 감독은 이런 원빈을 재창조했다. “꽃미남 원빈이 제대 후 첫 영화에서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게 그의 후일담이다.

    할리우드 슈퍼히어로 ‘캡틴 아메리카’ 역의 크리스 에반스를 수염 기른 초췌한 모습의 반란군 지도자로 캐스팅한 것은 봉준호의 파격적인 선택이자, 놀라운 발상이었다. 틸다 스윈튼도 “미국인을 리더로 삼은 것, 게다가 미국의 영웅을 반란의 선봉에 서게 한 것이 놀라웠다. 누가 그런 발상을 할 수 있겠나, 기막힌 선택이다”라며 혀를 내둘렀다. 당사자인 크리스 에반스의 얘기도 들어보자.

    “‘캡틴 아메리카’ 역은 계약상 2년에 한 번씩은 촬영해야 한다. 그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찍을 때는 내가 거대한 기계나 대형 퍼즐 속의 작은 조각이라는 생각이 든다. 연기자로서 다양한 역할을 해보고 싶어 전혀 다른 이미지의 작품을 계속 찾는데,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보고 출연을 자청했다. ‘(미국의) 다른 배우들이 제발 봉 감독의 영화를 보지 않아야 하고, 봉 감독을 모르고 있어야 하는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번 영화에선 감독과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직접 소통하니까 훨씬 더 열심히 하게 됐다. 영화를 진짜 만들었다는 느낌, 뭔가 창의적인 예술작업에 참여했다는 포만감이 왔다.”

    잘생긴 미국 영웅을 거뭇거뭇 때가 낀 꼬리칸 탑승객으로 변신시킨 봉 감독은 “크리스 에반스는 미국에선 대단한 스타지만, 내 영화를 통해 미국 관객은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그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며 “그저 외양이나 캐릭터가 아니라 전혀 다른 연기의 깊이를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 끄는 재담꾼

    성격과 작품 세계는 다르지만 관객 1000만 고지를 넘은 영화로 한국을 들었다 놨다 했던 강우석과 봉준호 감독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작품과 사석(私席)을 가로지르는 유머다. 유머는 그들 작품 세계의 일부이자 중심일 뿐 아니라 그들이 현장 안팎에서 이루는 인화(人和)의 원동력이다. 강우석 감독은 좀 과장하면 ‘5분 이상 웃음이 나오지 않는 술자리에는 앉아 있지 않는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어색한 분위기를 참지 못해 5분에 한 번씩은 스스로 좌중을 웃긴다. 봉준호 감독 역시 영화에 비치듯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유머 감각을 지녔다. 기자가 “얼굴이 참 크네요” 하면 봉 감독은 “세상 어디 내놔도 뒤지지 않는 크기”라고 받아치는 식이다.

    그는 ‘마더’ 촬영을 끝내고 ‘설국열차’를 진행하면서 왼쪽 팔뚝과 등에 문신을 새겼다. 커다란 나무 옆에 새가 날아다니는 모양의 문신이다. 그런데 봉 감독의 체중이 불면서 새의 덩치도 불었다. 지금은 살이 좀 빠졌지만 그렇지 않아도 거구인 봉 감독은 ‘설국열차’를 한창 촬영할 때 100㎏까지 나갔다. 원래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찍을 땐 체중이 불어난다고 한다. 덧붙인 그의 말이 가관이다. “문신을 하고 나니 무엇보다 몸이 좋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신이 똥차에 붙인 스티커 같다”고 했다.

    그와 인터뷰를 하든, 사석에서 술자리를 하든 수많은 농담과 재담을 들을 수 있다. 같은 이야기라도 건조하고 두서없이 늘어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눈앞에서 보는 듯 생생하고 재미있게 전하는 이가 있다. 그는 말만 가지고도 사람을 끄는 천부적인 재담꾼이다. 그 속에서 피어나는 웃음의 마법 같은 힘은 상대로 하여금 긴장을 풀고 마음을 열게 한다. ‘설국열차’가 900만 관객을 돌파한 후 영화사가 마련한 술자리에 오랜 벗인 배우 윤제문을 불러 낄낄거리며 농담을 쏟아내던 봉준호에게서 그런 유머의 힘이 느껴졌다.

    요컨대 봉준호는 소통의 리더다. 경청과 설득의 힘을 발휘해 동기를 부여하고, 영감과 도전욕구를 불러일으켜 결국 자신의 원하던 답을 얻고야 마는 진정한 승부사 말이다. 결국 그가 배우와 스태프에게 안기는 유머와 웃음은 촬영 현장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윤활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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