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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있는 풍경

열병처럼 지나온 젊은 날 추억은 때론 슬픔이 된다

이문세 ‘광화문 연가’

  • 글·김동률|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권태균|사진작가·신구대 교수 photocivic@naver.com

열병처럼 지나온 젊은 날 추억은 때론 슬픔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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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자고 있던 옛 기억을 일깨워주는 노래, 듣는 동안 과거를 주유케 하는 노래.
  • ‘광화문 연가’는 바로 그런 노래다. 과거가 아름다운 건 꽃다웠던 그 시절이 다 가버렸기 때문 아니던가. 그래서 추억을 되살리는 광화문과 덕수궁 돌담길은 비극적이다.
  • 이별이 주는 후회와 상처다. 세월 따라 떠난 그 시절 청춘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열병처럼 지나온 젊은 날 추억은 때론 슬픔이 된다
짧은 인생 동안 정들었던 수많은 거리와 여인들을 다 음미하고 또 가슴에다 남겨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말 소중한 것은 적어도 가슴 한 켠에 남아서 가끔 슬퍼지거나 외로워질 때 순간순간 떠오르게 된다. 흑백사진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남루하지는 않고, 조금은 코끝이 찡해지는 그런 순간들이고 그런 장소들이 있다. 광화문은 우리 세대에게 그런 존재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듯, 특정 장소에도 정드는 경우가 있다.

노래 ‘광화문 연가’는 이 땅의 기성세대들에게 잠자고 있던 옛날 기억을 일깨워준다. 노래를 듣는 순간만큼은 과거의 세계로 주유(周遊)하게 된다. 그래서 이른바 꽃다운 시절로 돌아가 입가에 웃음을 띠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러하듯 꽃이 아름다운 것은 지고 난 뒤가 그만큼 더 처참하고 황폐하기 때문이고, 꽃다운 시절이 아름답다는 것은 꽃다운 시절이 다 가버렸다는 의미가 아닌가.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는 바로 그런 노래이고 노랫말이다.

일찍이 미당은 “광화문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宗敎)이자 낮달마저도 파르르 떨며 흐른다”고 노래했다. 그런 위대한(?) 광화문에는 묘한 냄새가 있다. 서울의 심장, 이 웅장한 사거리에는 혁명의 피냄새도 있고, 백성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 왕조의 남루함도 배어 있다. 정작 존재감 없는 광화문에 사람의 냄새를 입힌 것은 교보빌딩 정면에 내걸린 글판의 시구절이다.

“살얼음 속에서도/ 젊은이들은 사랑하고/ 손을 잡으면 숨결은 뜨겁다.”

열병처럼 지나온 젊은 날 추억은 때론 슬픔이 된다

교보빌딩에 내걸린 광화문 글판은 삭막한 도심에 온기를 입힌다.

12월에 등장한 신경림의 시 ‘정월의 노래’다. 1년에 4번 옷을 갈아입는 광화문 글판은 계몽적이던 과거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마음을 위무하는 시구로 바뀌어 등장하고 있다. 1997년 말 외환위기가 계기가 됐다.

그런 광화문 글판의 압권은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 였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시 구절은 연탄재와 함께 웃고 울어온 이 땅의 기성세대들에게 일갈한 수작이었다. 그러나 이 기막힌 시구를 탄생시킨 서정 시인은 아니러니하게도 지금은 정치 투사가 되어 세상의 불의에 맞서겠다며 고군분투하고 있다.

강남과는 다른 곳, 광화문

광화문 글판과 함께 대중에게 감성적으로 먹혀드는 데에는 아무래도 노래 ‘광화문 연가’도 한몫했다고 봐야 한다. 노래는 빌딩 숲으로 숨막히는 광화문 일대에 온기를 입히고 있다. 메마른 도회인들에게 ‘연가’라는 매력적인 단어를 이용해 추억과 낭만이라는 덧칠 작업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는 의미다. 광화문은 누가 뭐래도 서울의 중심이다. 압구정동, 청담동, 강남역 일대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광화문을 따라오기는 힘들다. 속성 개발된 강남 거리들이 갖는 한계다. 그런 광화문에는 저마다 사연이 엮여 있었다.

‘광화문 연가’는 기성세대에게는 자신의 청춘을 추억하는 노래다. 특히 이 일대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오리지널 서울 시민에게는 특별한 추억이 된다. 개발연대 당시, 도심 교통량을 해결하기 위해 광화문을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던 과거의 명문고들이 신 개발지 강남이나 목동으로 쫓겨가기 전 광화문은 그 시절 청춘들이 몰려다니던 추억의 거리였다.

북촌 인근의 경기고를 비롯해 서울고, 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에 있던 창덕여고, 창성동의 진명여고, 수송동 숙명여고, 정동의 이화여고, 배재고, 경기여고 등 장안의 내로라하는 명문 고교들이 광화문 사거리를 빙 둘러싼 형국이었다. 경복고, 중앙고 정도가 아직 남아 있고 중동, 휘문, 양정, 배재 등 전통의 사학들도 개발 바람에 강 건너에 둥지를 틀었다.

광화문 일대 명문고들이 잉태한 또 하나의 현상은 명문 입시학원이다. 대성, 종로, 정일학원 등 이른바 ‘3대 천왕’ 학원에다 기타 크고 작은 외국어학원까지 가히 청춘들의 용광로에 비견될 만한 요소를 갖추게 된다. 당시 이 일대에는 고고장과 나이트클럽, 음악감상실, 분식센터, 빵집이 넘쳐났으며 거리는 데이트를 즐기는 청춘들로 비좁았다. 광화문 사거리, 인터넷 예약이 없던 시절, 어쩌다 지금의 동화빌딩 자리에 있던 국제극장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도 걸린 주말이면 긴 줄이 신문로 덕수제과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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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동률|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권태균|사진작가·신구대 교수 photocivi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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