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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독(愼獨) 혼자서 견뎌내는 방법

맹씨행단의 대청마루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신독(愼獨) 혼자서 견뎌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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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락이 끊어진 혼자만의 시간을 견딜 수 있는가.
  •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홀로 책 읽으며 이치를 궁리할 수 있는가.
신독(愼獨) 혼자서 견뎌내는 방법
오래전, 황지우 시인이 쓴 칼럼이 생각난다. 그는, 문구점에서 펜이라도 사게 되면 ‘잘 써지나?’하고 써본다고도 했다. 누구는 선을 그어보고 누구는 자기 이름을 써보고 또 누구는 근사하게 사인도 해본다지만 시인은 ‘잘 써지나?’라고 써본다는 것이다. 그런 글을 읽으면 갑자기 황지우 시인이 진짜 시인이라는 생각을 거듭 하게 된다.

시인은 또 어떤 일로 혼자 무료하게 있게 되면, 빈 종이에 그림을 그려본다고 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지만, 극작에 연출도 하고, 조소도 했으며, 그렇다고 장르 욕심으로 이것저것 해본다기보다는, 요즘의 그 흔한 말로 융합이니 통섭이니 하는 장르 간 경계 뛰어넘기를 1980년대 초 다 이룬 시인이니만치 그가 빈 종이에 뭐라도 그린다고 하면 어떤 것일까, 궁금했는데, 집을 그린다고 했다. 내 기억이 정확지는 않은데, 아마도 방을 그려본다고 했던 것 같다. 방이든 집이든, 빈 종이에 서로 다른 크기의 네모 칸들을 쳐보고 이리저리 구획도 해보고, 그래서 현관의 위치며 안방의 크기며 서재의 방향 같은 것을 낙서처럼 그려본다는 것이다.

혼자만의 공간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서도 이런 습관이 있는 분이 있을 것이다. 꼭 빈 종이에 실제로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좋다. 혼자서, 어쩌다 생긴 막연한 시간을 무덤덤하게 보내야 할 때, 집을 생각하고 방을 생각하고 그러다가 시간이 더 남으면 서재라든지 집필실이라든지 아무튼 자기 혼자만 쓸 수 있는 방을 구상한 후, 그 안에 책상이며 오디오며 편안히 쉴 수 있는 의자라도 한번 생각해보는 것, 남의 일이 아닐 것이다.

20세기 중엽 이후 팽팽한 긴장과 갑작스러운 충돌의 시간을 거의 살인적인 속도로 통과해오는 동안, 이 거대 도시에 몰려 살기 시작한 가족의 필사적 목표는 집 한 칸 장만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아파트 가격은 폭등하거나 어떨 때는 폭락했다. 올라도 걱정이고 내려도 걱정인 게 아파트 값이다. 무리해서 대출이라도 끼고 사는 순간부터 남은 사회적 활동기를 그 이자와 원리금 갚는 것으로 허덕였어야 했다. 그 사이에 자식들 학교도 보내야 하고 혼사도 치러야 한다. 겨우 그 힘든 짐을 다 부리고 나면, 어느덧 노년이 되는데, 달리 말하면, 병원의 종합검진을 받으러 가기가 겁이 나는, 그런 나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한평생 살면서 지상의 방 한 칸을 해결하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나도 그런 경우에 속하지만, 그래도 하는 일이 책을 읽거나 책을 쓰거나 책에 대해 강의하는 것이라서, 일찍부터 집 바깥에 작업실을 둘 수 있었다. 수천 권의 책과 음반을 따로 간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직업인 까닭에 혼자만의 공간을 가져보는 호사를 누린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마무시’한 스케일에 밖의 풍광은 수려하고 안의 조명은 아늑한 곳이었느냐 하면,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다. 신혼 초에는 동네 고시원이 작업실이었고, 그 후로도 고작해야 대여섯 평 남짓한 크기의 공간을 옮겨 다녔다. 한번은 저 파주 헤이리의 어느 근사한 집의 교실 크기만한 지하실을 통째로 썼는데, 습기가 그토록 무서운 놈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장마철이면 책마다 곰팡이가 안개처럼 피어올라서 귀한 책을 많이 버렸다. 어쩌다 피곤해 소파에 엎어져 잠이라도 들면 바로 그곳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만큼 몸속 깊이 습기가 파고들어 귀한 시간도 많이 버렸다.

그래서 또 옮겨야 했다. 지금 있는 곳은, 비교적 저렴한 값에 널찍하게 쓰는데, 이번에는 소음이 문제다. 양옆의 사무실에서 들려오는 소음들, 왼쪽 방에서는 왜 안 갚느냐, 언제 갚을 것이냐, 그냥 확 찾아가는 수가 있다, 이런 얘기가 하루 종일 들려온다. 가서 노크한 후, 조금만 조용히 해주시겠습니까, 하고 말하기 겁난다. 오른쪽 방에서는 저녁마다 술 한잔 걸치고 담소를 나누는데 얻어들을 거 하나 없는 중년 사내들의 농담이다. 이쪽 방에 가서도 조용히 해달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그들의 농담을 듣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음악을 틀곤 하는데, 아마도 내가 듣는 천지가 진동하는 말러 교향악이나 가히 비명과 절규에 다를 바 없는 존 콜트레인의 색소폰 소리가 좌우의 방으로 넘실거릴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두가 꾹 참으면서 살아가는 중이다.

이런 판국이라, 나도 시인처럼, 무료한 시간이라도 생기면 빈 종이에 쓱쓱 칸을 그려본다. 집 전체를 그려볼 때도 있고, 직사각형으로 큼직하게 네모를 그린 다음, 책상과 책장과 오디오와 소파를 이러저리 놓아본다. 딱 그 몇 분 동안은 행복하다. 때로 고민까지 한다. 빈 종이에 그리는 공상이건만 작업실 크기며 빛의 방향이며 오디오 위치 따위가 제대로 잡히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면 다시 그린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가고, 약속한 사람이 나타나거나 자리를 떠야 할 시간이 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이런 생각을, 쌀쌀한 바람이 부는 충남 아산의 맹씨행단(孟氏杏壇) 대청마루에 앉아서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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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시 맹씨행단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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