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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 단박에 끊는 ‘참된 지혜’ 찾아

봄의 꽃사태와 개심사의 연못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번뇌 단박에 끊는 ‘참된 지혜’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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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 단박에 끊는 ‘참된 지혜’ 찾아

사람들이 소원을 적어 붙여놓은 파주 약천사의 나뭇조각.

때는 곧 초파일이라, 벌써부터 이 심학산 약천사에 정성을 바치는 이들이 연등을 달고 있었다. 초파일의 연등은, 연말 크리스마스의 트리처럼 부처님께 공양을 하는 한 방법으로 온갖 번뇌와 헛된 망상과 무지로 가득 찬 어두운(無明) 세계를 부처님의 밝은 지혜로 비추게 해달라고 비는 것이다.

오래전 가난한 여인이 있었는데, 가진 것은 오직 동전 두 닢뿐. 존귀한 분 석가를 위해 등불 공양을 하고 싶었으나 너무나 가난했던 여인은 자신의 전 재산이랄 수도 있는 두 닢 동전으로 등과 기름을 사서 부처께서 지나가시는 길목에 아주 작은 등불을 밝혔다. 그날 밤, 큰 바람이 불어 왕후장상이 켜놓은 등불이 다 꺼져버렸지만 지극정성으로 전 재산을 바친 이 여인의 작은 등불만은 꺼지지 않았으니 이로써 ‘빈자일등(貧者一燈)’이란 이야기로 완성된다. 이를 기이하게 여겨 부처님의 제자 아난이 한밤중에 이 작은 등불로 다가가 불을 끄려 해도 꺼지지 않았는데 이에 부처님께서 “헛되이 힘쓰지 마라. 가난하지만 마음씨 착한 여인이 온 정성으로 켠 등불이니 결코 꺼지지 않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는 얘기다. 연등을 밝히는 까닭이다.



보광사와 마곡사의 연등

봄날, 고즈넉한 산사의 연등에 처음 마음을 빼앗겼던 곳은, 신혼 시절 아내와 함께 산책 삼아 들른 파주의 보광사였다. 지금은 대불 공사도 완료됐고 오가는 길이며 요사채가 꽤 정비됐지만, 10여 년 전의 보광사는 어수선했다. 오후에 들렀는데, 한쪽에서는 공사를 하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연등을 달고 있었다. 비좁은 계곡에 들어앉은 사찰이라 공사 소리가 계곡을 쉬이 빠져나가지 못해 어수선했고, 그래서 잠시 둘러보고 나갈 참이었다.



그랬는데 사찰의 행사로 인해 모든 공사가 일시 중지됐고, 서서히 해가 기울자 연등의 불빛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아! 그것은 흡사 출항하는 선단이 저 먼바다를 향해 밝힌 불빛 같았다. 동해안의 속초나 저 제주도의 표선면에서 깊은 밤에 아득하게 멀리 보이는 고기 잡는 배들의 집어등 같았다. 나는 한참을 보광사의 연등에 사로잡혀 있었다.

번뇌 단박에 끊는 ‘참된 지혜’ 찾아

공주 마곡사의 연등.

또 기억나는 연등은 마곡사의 것이다. ‘춘마곡 추갑사’라, 봄에는 마곡사요 가을에는 갑사라 했으니, 이 무렵의 마곡사는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한순간을 빚는다. 한반도의 중심에 있는 사찰이고 대전이나 공주의 역사가 간단치 않은 데다가 세종시가 창건되면서 마곡사 이르는 길이 많아지고 넓어졌으나, 어쩐 일인지 그 마곡사를 제대로 가본 일이 없다. 경상이나 전라의 대찰들은 그 자체로 목적지가 돼 큰맘 먹고 들르기 마련인데 대전 인근 공주의 마곡사라서 오가는 길에 한번은 들르겠지 하다보니 그 절에 들어가 무릎 한번 제대로 굽혀 앉은 일이 없으니 늘 마음만 분주했다. 올해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태화산의 봄 마곡사는 꽃들과 연등과 또 그것들을 보려는 사람으로 붐볐을 것이다.

그래도 아예 인연이 없었던 것은 아니니, 내 마음속의 마곡사는 몇 해 전, 급한 마음에 너무 서둘러서 잠깐 들렀던, 그래서 더욱더 아쉽게 남아 있는 절집이다. 길을 잘못 들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거의 뛰다시피 마곡사로 직진했다. 봄의 마곡사라고? 빛나는 경치에 눈을 줄 겨를이 없었다. 아무리 봄이라 해도 산사의 어둠은 일찍 드리워진다. 재촉하는 걸음 도중에 아는 사람을 만나는 불운까지 겹쳤다. 가벼운 인사 몇 마디로 헤어질 수는 없는 사이라서 선 채로 꽤 오랫동안 말을 나눴다. 제법 긴 얘기 끝에 헤어지고 나자 능선의 어둠이 기슭 아래로 침범해오고 있었다.

개심사의 사계, 그 연못

나는 봄의 마곡사를 보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신라 선덕여왕 재위 시기인 서기 640년에 창건돼 충남 일대의 사찰 양식을 대표할 뿐 아니라 ‘춘마곡’이라는 표현답게 봄의 경치가 빼어나다. 또한 ‘택리지’며 ‘정감록’ 같은 인문지리서와 비서에 기록되기를 환란과 병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의 하나라서 김구 선생이 한때 몸을 숨겨 승려 생활을 했을 정도로 깊이 있고 기품 있는 곳인데, 나는 다만 서둘러 걸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해탈문을 지나고 천왕문을 지나고 이제 본격적으로 어둠이 깃든 마곡사로 접어드는 순간인데, 연등이었다. 아니, 등불로 피어난 연꽃이었다. 천왕문을 지나면서부터 연꽃의 행렬이었다. 개천 위의 극락교를 따라 경내 곳곳으로 연꽃이 번져 있었다. 나는 그제야 속도를 줄였다. 어둠이 내리면서 찾는 이도 하나둘씩 떠나고 난 뒤였다. 나는 연꽃이 핀 마곡사를 천천히 둘러보다가, 또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연등은 슬픔 하나씩을 살며시 끌어안고 허공에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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